생각의 늪에서 나를 건져주는
혼자 노는 걸 잘하는 사람이었다. 혼자 전시 보러 가거나 책이나 스케치북을 들고 카페에 가거나 동네 산책을 가거나 산에 가거나 바다에 가거나 도서관에 가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기타나 베이스 연주를 시도하거나 옷을 만들거나 리폼하거나. 어딘가 훌쩍 떠나서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낯선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도 했다. 혼자 놀기의 대부분은 돈이 크게 들지 않지만 그래도 소비와 병행되었다. 20대의 나는 저임금 단순 노동으로 비용을 충당했다. 혼자 놀기는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 행동은 아니었고 커리어가 쌓이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런 시간은 조금씩 쌓여 내 취향이 되고 내가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목적 없이 노는 일은 인생을 허비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다 큰 어른이 책임감 없이 현실을 회피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지금도 혼자 전시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고 산책을 가고 산에 가고 바다에 가지만 내 이 한 몸 열심히 놀아보갓어! 하는 마음은 아니다. 내 삶에 도움이 될만한 지식, 경험을 밀도 높게 흡수하고 싶은 마음,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하고 있다. 어찌 보면 그냥 노는 것에서 약간 발전된 형태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한국의 많은 20대 초반 사람들이 대학에서 공부할 때 나는 전투적으로 놀았다. 모두가 손에 넣고 싶어 하는 파이는 어차피 못 가질 것 같았다. 갖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경쟁에는 누구라도 뛰어들 수 있지만 진짜 초대되는 이들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구질구질 바득바득 끼고 싶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 금싸라기 땅의 높디높은 빌딩에서 먼 지평선을 바라봤을 때 자그마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어딘가에 있고 싶었다. 그게 어디인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혼자 놀기에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는 30살 초반 뒤늦게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같다. 가족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어디서 일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그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미래를 상상할 때도 그랬다. 좀 더 멋지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누군가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이것도 지금은 부질없는 것 같다. 그 기준은 나에게 있어야 한다. 내가 나를 멋지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할 때 내가 멋지고 자랑스러운데 넌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연인이라면 그 인연은 아닌 것이다.
어제는 조금 우울한 일이 있어서 울고 오늘 아침에도 울었더니 머리가 너무 아팠다. 평소에 발꼬락으로 처리할 법한 일도 제대로 판단이 안됐다. 그런 내가 밉고 짜증 났다가 가여워져서 샤워하고 어디든 나가서 혼자 열심히 놀아보자 마음먹었다. 강원도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검색해 보았는데 혼자 가면 우울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버스표 예약하고 거기에서 혼자서 또 뭐 찾아타고 들어가고 이런 거 생각하니 너무 귀찮기도 했다. 그래서 책과 노트북을 배낭에 넣고 집에서 걸어서 40분 거리 카페로 나왔다. 테라스에 자리 잡아 재스민 잎차를 마셨다. 여전히 혼자서도 잘 놀아지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친김에 내일 등산하러 가자고 친구에게 연락했더니 내일은 안 되고 오늘 저녁 먹자고 나오라고 했다. 고마워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무언가 쫓지 않고 잡히길 기대하지도 않고 변함없이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하고 그 마음을 베풀고 맘껏 사랑하며 살면 그걸로 됐다. 혼자 놀기는 인생을 허비하는 일이 아니었다. 혼자 노니까 내가 어떤 허상 속에서 허덕였는지 어렴풋이 보인다. 혼자 놀기는 실체 없는 생각의 늪에서 나를 건져 올려 주었다. 혼자 놀기를 소중하게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