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명화의 탄생-그때 그 사람>(성수영) 후기
그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림에는 내가 해석하지 못한 무수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혹은 나의 미술사적 교양이 부족해서 인류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것을 앞에 두고도 바보 같은 말밖에 하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무지를 들킬까 긴장하는 일, 나의 감상을 신뢰할 수 없는 일이 돼버린다. 그런 마음이 예술을 대하는 좋은 태도가 아니라는 조언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한다. 그림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문화예술이라는 거대한 이름 앞에 우리는 그것들을 즐기기에 앞서 평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쉽게 몸을 웅크리곤 한다.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 머무는 반년 동안 유럽 내의 유명하다는 미술관들을 열심히 방문했었다. 서울에서도 때때마다 열리는 전시회나 상설 전시를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작품을 허겁지겁 봤던 적은 없었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과 루브르박물관, 런던의 내셔널갤러리, 테이트모던, 이탈리아의 우피치 미술관, 암스테르담의 고흐 박물관, 그리고 각 국가의 국·시립 미술관들. 그곳에서 마주한 나열하기에는 내가 소화하지도 못한 수많은 작품들과 장소들.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솔직한 심정으로 바삐 돌아다녔던 시간이었다.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을 조금 더 알고 싶어 호기롭게 미술사 책을 들고 갔으나, 그마저도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핑계로 진득이 볼 수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성수영 기자의 《명화의 탄생-그때 그 사람은 반년 일찍 출간되지 못한 점이 아쉽게 남은 책이었다. 혹은 이제라도 읽을 수 있어 좋았다고 말해야 할까.
《명화의 탄생-그때 그 사람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되었던 성수영 기자의 글들을 다듬어 묶은 책이다. 책의 소주제 분류도 작가들의 서사를 중심으로 사랑, 헌신, 고난, 일상으로 분류하여 작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미술사의 큰 흐름을 이해하고 싶거나 표현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더욱 전문적으로 학습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먼저 고려될 책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방식은 우리가 예술을 대하는 첫 번째 마음의 가능성을 그려줄 수 있다. 그것이면 되었다. 한 책에 우리가 하나의 가능성을 빚질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책의 충분한 세계인 것이므로.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먼저 우리의 눈으로 외부의 세계를‘보는’일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긴장하면 보지 못하는 것이 많아진다. 이때 관찰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힘을 빼는 일이다. 그저 그림을 보자. 가장 나중의 일을 가장 처음으로 끌고 와 눈앞에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그만큼 슬픈 일도 없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힘을 뺄 수 있을까. 힘을 쓰는 것만큼 힘을 빼는 것 역시 여러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점에서 그 그림이 단지 한 시기를 앞서 살았던, 혹은 동시대를 사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담아 그려낸 결과물임을 인식하는 것도 하나의 계기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범한 인물의 엄청난 예술작품으로, 그리하여 나와 관련 없는, 학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린 인물의 삶을 이해해 보는 것이다. 성수영 기자는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작업을 탁월하게 해낸 것으로 보인다. 각 꼭지는 길지 않으나 한 사람의 생애 초·중·말기를 찬찬히 비추어준다. 그리고 각각의 시기에 그린 작품은 책이라는 매체를 훌륭히 활용하여 적절한 크기로 삽입되어 있다. 기자의 기록을 따라 우리는 한 예술가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던 인물의 생애 곁으로 다가가 본다.
본 책에서 소개되는 여러 작가 중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대패질하는 사람들>(1875)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인상 깊게 남았던 작품 중 하나였다. 구스타브는 화폭에 19세기 후반의 강렬한 인상주의 작품들 속 노동자들의 거센 뒷모습을 정갈하고, 절제하여 담았다. 이 작품의 구도와 어딘가 칙칙한 색감은 오히려 도발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의 나는 별도의 음성 안내나 팸플릿을 들고 다니며 그림의 이력을 확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림만 눈에 담은 채 지나쳤을 뿐이었다. 혹은 노동의 순간을 가감 없이 담아낸 작가의 시각에서 그의 사회적 위치를 자의로 추측해 버렸던 거 같다.
성수영 기자가 이 그림에서 포착한 것은‘일을 빼앗긴 사람’이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귀스타브가 그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예술계에서 후원자 이상으로 어울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력을 확인한 후 살핀 그림은 이전의 감상과 또 다르게 다가왔다. 자신이 애정하는 것에 진정으로 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객관성과 세밀함이 다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먼저 알았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지 않아 느낄 수 있었던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마음도 함께 남기기로 했다.
대부분 사람에게 그림에서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그림의 색과 형태, 그리고 요소이다. 그것의 조형적인 아름다움, 혹은 그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느끼는 것을 겁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작가의 이력을 알게 되는 것은 이러한 작품 감상의 본질을 두려운 것으로 만들지 않는 동시에 한 발짝 더 나선 이해를 도와주었다. 그렇기에 성수영 기자의 글들은 나에게 미술을 일반 시민의 곁으로 돌려주는 하나의 걸음으로 평가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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