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기, 당신, 그 노래에 우리를 묶어두지 마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이원식 감독의 <조선인 여공의 노래>가 8월 7일 정식 개봉하였다. 영화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일제강점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다 건너 방적공장에서 일해야 했던 조선인 여공 22명의 증언을 낭독과 재연, 인터뷰라는 방식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이다. 조선인 여공들은 식민지 출신 여성 노동자로서 차별과 폭력 속에서도 존엄하게 살아감으로써 투쟁했다.
옛 구로 공단이 있던 구로디지털산업단지에는 <수출의 여인상>이 있다. 기름 한 방을 나지 않는 나라에서 수출로 우뚝 선 경제 성장의 신화. 그 구체적인 얼굴로써 ‘산업화의 역군’을 떠올릴 때 우리는 건장한 남성 노동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런데 틀렸다. 초기 자본의 축적은 그렇게 건강하고 우람하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업화를 이룩한 것은 입만 덜어도 다행이었던, 학교에 다니기보다 남자 형제를 부양해야 했던, 젊기보다 어렸던 시골에서 올라온 여공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견디며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 여성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산업혁명 초기,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자본가들은 임금이 비싼 남성 숙련 노동자 대신 임금이 싼 부녀자와 아동을 고용해 일을 시켰다. 걸을 수 있으면 공장에 다녔고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스무 살을 전후했다. 어떻게 이 세계의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지어졌느냐 묻는다면, 그들의 피로 섬유가 섞인 기침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여자 노동으로 먹고 산 것은 유서 깊은 일이다. 우리는 여자 노동으로 이렇게 먹고살고 있다.
다큐멘터리의 배경은 1910~1940년대의 일본이다. 1910년대 경제 대호황기였던 일본에서는 오사카 지역의 방직공장 역시 활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 성장은 곧 내국인 인건비의 상승을 의미했으며 선진국의 국민이 된 일본인들은 더럽고 위험한 방직 공장에서 일하기를 꺼렸다. 비용을 줄이고 인력을 확보하고자 한 일본 자본가들은 값싼 노동력을 찾게 되었고, 이에 조선의 어린 여자들을 ‘수입’해 오게 된다. 일본에 가는 것은 무서운 일이지만 제일 무서운 건 아침저녁으로 밥을 넣어줘야 하는 입이니, 어린 소녀들은 그렇게 일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제국 일본은 타국의 이주민 여성의 노동으로 자본을 축적한다.
이에 ‘호르몬’이라는 단어로 영화는 시작한다. ‘호르몬’은 오사카에서 쓰레기라는 의미로 사용되던 단어였다. 배가 고픈 조선인 여공들은 당시 일본에서는 먹지 않던 돼지의 내장을 정육점에서 받아와 구워 먹었다. 살기 위해 먹을 뿐인 여공들을 일본인들은 ‘돼지 년’이라 칭했다. 병들어 죽지 않기 위해 여공들은 쓰레기를 꼭꼭 씹어 가장 낮은 쓰레기 노동을 한다. 그렇게 그들은 ‘조선에서 온 돼지 년’이 되고, 쓰레기를 씹어 만든 것들은 일본을 유지한다. 호르몬 구이는 이제 한국인이 일본 오사카 지역을 들리게 되면 반드시 먹는 대표 음식 중 하나이다. 재일 한국인의 삶은 이렇게 지금의 일본 사회에 딱 달라붙어 있다.
여공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 일본에 왔다. 여공들은 노동하여 자신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본에 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임금을 잘 받아, 먼 타지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주기적으로 나는 잘살고 있다 연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0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살게 된 가난한 소녀들은 조선의 문자를 배우지 못했고 편지 하나 붙이려 해도 조선인 감독에게 담배 몇 개비라도 쥐여주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이 서로를 가르치게 된 까닭이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조선인 연맹이 야학을 만들기 이전부터도 여공들은 스스로 학습모임을 꾸리고 한글 배우기에 나섰다. 그러나 이걸 공장 감독들이 눈감아 넘길 리 없었다. 학습모임이 들키는 날이면 조선인 여공들은 매를 맞아야 했지만, 분명 그런 폭력이 멈출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간다움’이라 지칭할 뿐이다.
공장의 감독 중에는 한국인 남성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 감독보다도 험악하게 조선인 여공을 다루었다. 그것이 그들의 밥벌이 기술이었다. 같은 민족이라고 챙겨주다가는 겨우 구한 귀한 일자리를 잃어버릴 것이었으므로. 또한 그것은 일본 자본의 노동력 관리 기술이었다. 형식적이나마, 방직공장의 일본인 사장은 여공이 도망친다고 하여 그들을 패거나 잡아 오지는 않았다. 근로계약은 노예계약이 아니지 않는가.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겠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의 시민에게는 일하지 않을 자유는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임금은 일본인 사장이 주었지만, 조선인 여공 노무 관리는 한국인들의 협회인 상애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사장은 상애회에게 돈을 지급했고 한국인 노동자들은 상애회의 눈밖에 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여공은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남성 노동자가 상애회에 돈을 찔러주면 금액에 걸맞은 수준으로 얼굴이 반반한 처녀를 알선해 주는 식이었다. 댕기 머리가 쪽 찐 머리가 되어 출근하면 으레 사는 게 그렇다고 넘겨야 했다.
조선인 여공은 살기 위해 글을 배우기도, 고개를 숙이고 매를 맞기도, 억지로 결혼 당하기도, 투쟁하기도 했다. 나는 그것들이 서로 다른 것이라 상상되지 않는다. 조선인 여공은 기본적으로 일본인 여공에 비해 낮은 처우를 받았고 일본인 여공 역시 조선인 여공을 배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래봤자 모두 같은 일을 하는 어린 여자애들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친구가 되기도 억울한 일이 발생하면 대신 싸워주기도 했다. 조선인 여공들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얼굴만은 맞아서 퉁퉁 부어도 위풍당당했다고 한다. 싸운 것도 진 것도 다 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 달 초인 8월 5일 서울시와 고용노동부가 추진하는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필리핀 여성 노동자들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외국인 가사 관리사 사업은 한국의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써 외국인 가사 노동자들을 고용허가제(E-9 비자)로 고용하기 위한 제도이다. 일부 여론은 외국인 가사 노동자들을 선주민인 한국 노동자와 동일한 시급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한다. 혹은 저출산 대책이라고 하면서 한국인 부부가 아이를 양육할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돌봄을 손쉽게 외주화/이주화한다고 비판한다.
고용허가제는 타국의 건강한 노동자를 단기로 들여와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유지되는 제도이다. 이들은 직장을 그만둘 자유가 없다. 사업장을 변경할 수 없는 조건은 그들이 부당한 업무 지시를 거부할 수 없게 하여 유순한 노동력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 조선인 여공이 방직공장에서 도망칠 수 없게 세운 붉은 벽돌 담장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가. 현대의 자본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조국 없이 이동하며, 본인이 이동할 수 없을 때는 노동력을 이동시킨다. 한국의 어린이가 가족과 떨어질 수 없으므로 깻잎이 땅에서 자라지 않을 수 없으므로(우리가 먹는 국산 농산물은 대체로 이주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생산되었다) 이주노동자는 한국에 왔다. 이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함부로 슬프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라는 영화의 제목은 1980년대 한 연구자가 일본에서 편찬한 저서의 서명이라고 한다. 그는 당시에 이미 오사카라는 타향을 고향 삼아 살고 있던 조선인 여공 출신 여성들의 생애를 기록했다. 40년이라는 시간이 두 번 흐르고, 이번에는 이원식 감독이 그 책을 영상으로 만들었다. 다큐멘터리의 형식 자체는 소박하다. 1) 조선인 여공들의 증언 낭독 2) 재일 조선인 4세 배우들의 재연 3) 재일 조선인 4세 배우와 여공이었던 할머니와의 인터뷰. 촬영된 영상들이 몇몇 키워드를 중심으로 배치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글로 기록된 증언과 누군가의 입으로 뱉어지는 증언은 다른 재현이 된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글자로만 남아있었다. 임의로 음을 붙여 노래로 만든 것은 이 영화의 몫이었다. 아, 그래서 이 영화를 봐야 한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