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조차 못 되는 약탈과 혐오의 시대
크리스토퍼 말로의 그로테스크 코미디 <몰타의 유대인>이 극단 적의 연출로 국내 초연을 맞이했다. <몰타의 유대인>은 극단 적의 르네상스 고전 다시 만들기 세 번째 작품으로 2024년 9월 21일부터 9월 29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상연된다. 지중해의 작은 섬 몰타에 사는 유대인 바라바스는 몰타의 지배층에 모든 재산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몰타를 상대로 피의 복수극을 벌이게 된다.
나라 없는 유대인들이 그러하듯 <몰타의 유대인>의 주인공 바라바스는 몰타에 국민이 아닌 채 거주한다. 몰타의 전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바라바스는 몰타의 지배층에 전쟁 비용을 명목으로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이에 바라바스는 복수를 결심한다. 바라바스는 돈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다. 친딸 아비게일 마저 그녀가 수녀로 개종하자 배반했다 여겨 수녀원 전체에 독을 풀어 살해해 버린다. 한편, 자신과 똑 닮은 잔인한 튀르키예 출신 노예 이싸모어와 함께 자신을 혐오하고 조롱하는 세상을 파괴해 나간다.
르네상스 시대 무대에서 바라바스가 인기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던 까닭은 그가 마음껏 조롱하고 혐오해도 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 바라바스마저 예수 대신 풀려난 도둑이자 살인자 바라바에서 온 이름이다. 그는 당시 유대인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악감정과 편견을 그대로 구현한 인물이며, 따라서 사람들은 일상의 감정과 불쾌함을 구체적인 인물 바라바스를 향해 쏟아부을 수 있었다. 현실에서는 미워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맥락과 사정이 지워진 바라바스라는 인물은 당당히 혐오할 만했고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바라바스가 지독히 못됐기에 바라바스 주변 인물들인 기독교 사제들과 부패한 관료들의 죄악은 ‘사악한 유대인’의 이름으로 사해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관객들 역시 바라바스를 마음껏 혐오할 수 있는가.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결여되어 보이는 바라바스는 혐오의 대상이자 주체라는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받은 핍박과 고통은 오히려 그의 잔혹함에 쉽게 가려진다. 그가 그토록 잔인하고 철저하게 복수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저 그런 고통받는 유대인으로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의 잔혹함은 혐오 받기의 증거가 된다. 그래서 바라바스가 나는 아주 밉지도, 혐오스럽지도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관객들처럼 바라바스를 놀림감 삼으며 연극을 즐기기에는 그가 받아야 했던 탄압이 먼저 이해됐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이 개와 고양이를 먹는다. 이들은 이웃의 반려동물을 잡아먹는다” 9월에 진행된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에서 트럼프 대통령 후보는 이주민과 여성 등에 대한 혐오를 전면에 들어냈다. ‘이민자가 개와 고양이를 먹는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문제인 까닭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 그의 발언이 미국에 사는 이민자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악화시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혐오와 분노는 극단적인 폭력의 형태로 표출되며 실제 문제를 해결할 여지를 축소한다. 즉, 백인 하층 노동자 계급이 이민자들에 대해 가지는 분노의 원인은 경제 불황이며 이민자에 대한 추방이 실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에도, 사회적 약자가 일종의 제물이 되어 분노를 대신 받게 하는 것이다. 혐오 받는 집단과 혐오하는 집단 모두 불행해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불쌍한 바라바스와 못된 바라바스 사이의 간극을 이해한다면, 바라바스라는 인물을 탄생시키고 욕하기를 즐겨한 배경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21세기에도 바라바스가 무대 위를 활보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은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탐욕은 오랜 시간 비판과 야유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금욕적 세계관에서 바라바스는 근대적이며 세련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평할 수 있겠다. ‘돈으로 안되는 것은 없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해서 안 되는 짓은 없다’는 신념을 굳게 가진 그는 자신의 믿음을 실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한편, 주변 인물들은 악독한 바라바스를 업신여기면서도 그가 가진 막대한 부 앞에는 꼼짝하지 못하고 은근히 그를 시기 질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은 학자에 따라 다르겠으나, 근대국가 설립 이전 16~18세기 무역과 상업 활동을 통해 금과 은을 모아 초기 자본에 축적이 이루어졌던 초기 자본주의의 형태가 <몰타의 유대인>의 배경이 될 것이다.
중세 시대와 달리 자본주의에서 탐욕은 선이며 지향하고 권장할 만한 미덕이 된다. 자본의 축적은 약탈과 배제 폭력을 통해 진행될 수밖에 없다. 직접 독을 타고 계략을 짜는 바라바스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올해에만 쿠팡에서 일하던 노동자 5명이 사망했다. 주문 뒤 만으로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물건을 받아 볼 수 있다는 어떤 명확한 사실은 작업 속도와 과정을 비정상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화성에 있던 아리셀 공장에서는 한국인 5명, 중국인 17명, 라오스인 1명 등 23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다. 경찰과 고용노동부의 수사 결과, 아리셀은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비숙련 근로자를 제조 공정에 불법으로 투입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불량 전지가 폭발 및 화재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됐다. 파견 노동자들이 더 많이 죽은 까닭은 충분한 안전 규칙을 설명받지 못했으며 문을 열 수 있는 카드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유통되는 국산 농산품과 육류 및 어류는 모두 이주노동자의 노동으로 생산되고 있다. 고용허가제로 인하여 이주노동자는 사업장 변경에 대한 자유가 없고, 이는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의 부당한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바라바스는 마치 게임처럼 살인은 계획하고 그 결과를 보며 통쾌해한다. 그 과정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그는 가지지 않는다. 그의 결정으로 몰타의 모든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건 오히려 하나의 오락처럼 연극에서 다뤄진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오락이나 게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사실을 아는 우리라면, 우리의 평온한 일상이 이미 세련되게 시스템화된 폭력과 약탈을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만지는 모든 돈에서 바라바스를 만나게 된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비극은 한자로 슬플 비를 사용하지만, 슬픈 이야기는 아니다. 비극은 차라리 비장한 이야기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가치 있고 비범한 인생을 모방하여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고 카타르시스에 이르게 하는 극의 한 형식”으로 비극을 정의한다. 고귀한 주인공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고통을 겪고 파괴되지만, 그 과정에서 관객은 오히려 비장미와 고결함을 느끼며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해소되기에 강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왕과 귀족과 같은 지위를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현대의 비극들의 인물들 역시 나름의 고귀함을 내재한다.
<몰타의 유대인>의 극 형식은 비극과 상당히 유사하다. 바라바스는 유대인이라는 바꿀 수 없는 사실로 인하여 세계의 탄압을 받게 되고,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복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은 차례차례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에도 <몰타의 유대인>이 온전한 비극이 될 수 없는 까닭은 바라바스라는 인물에게서 어떠한 고귀함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몰타의 유대인>은 비극의 형식을 취하지만 재현 방식은 희극적이다. 배우들은 익살과 과장과 허풍을 실어 각각의 인물을 재현해 낸다. 관객은 그러한 각 인물을 보며 역겨움과 부담스러움을 소화해 내야 한다.
그렇기에 비극은 희망적이며 희극은 절망적이다. 아아, 비장함은 우리의 몫이 아닌 듯하다. 비장하게 살기에는 너무 많은 고결함이 상실된 시대가 아닌가. 너무 많은 비극이 쌓인 세계라기보다 최소한의 비극도 상실된 세계가 아닌가. 그리하여 무수한 인간이 죽음을 맞이함에도 비극조차 되지 못하는 시대에 <몰타의 유대인>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남아야 할까.
*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