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사랑에 대하여
제78회 칸 영화제 라 시네프 섹션에서 1등상을 수상한 허가영 감독의 단편 영화 <첫 여름>이 2025년 8월 한국에서도 개봉했다. 오랜 춤 파트너이자 애인이었던 학수의 49재와 손녀의 결혼식이 같은 날 열리게 되고, 영순은 보고 싶은 사람과 가야 할 곳 사이에서 갈등한다. 영순은 어떤 선택을 할까. 혹은 해야 했을까.
영화 <첫 여름>의 갈등 구조는 명확하며 간결하다. 영화는 갈등을 양자택일의 방식으로 대놓고 드러내기 때문이다. 영순은 손녀의 결혼식과 남자 친구의 49재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할 것을 급박하게 요구받는다. 손녀의 결혼식이라는 세계와 남자 친구의 49재라는 세계는 좀처럼 만날 일이 없는 세계, 서로의 존재를 인지할 뿐 비집고 들어갈 필요 없는 세계이다. 이 두 세계가 시간의 중첩과 공간의 분리를 통해 마침내 하나의 세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손녀의 결혼식이 포함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가족의 구성, 할머니, 엄마, 아내의 역할, 남편의 간병, 세간의 수군거림 피하기 등. 남자 친구의 49재가 포함하는 것의 가짓수는 이보다 헐겁다. 소중한 사람과의 작별. 한 가지의 이유가 만 가지의 이유와 대적한다. 이 낯선 세계의 접합이 보여주는 것은 이 둘의 친연성이기도 하다. 즉 무성적 존재로 여겨지며 가족과 돌봄에 헌신하길 기대받는 노년 여성의 섹슈얼러티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여겨지는지, 동시에 이 일종의 사회적 ‘기대’가 담아내지 못하는 이면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영순과 학수가 영순의 방에 누워 발을 벽지 위에 올려두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일 것이다. 회색으로 보였던 방의 벽지는 어스름한 밤의 빛을 받아 청록빛으로 빛이 나고, 맨몸과 그림자가 그 공간을 채운다. 학수는 영순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다. 앞으로 함께 할 시간보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긴 것이 우리 나이 아니겠느냐는 말과 함께. 영순은 벽에 기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춤을 나지막이 소개한다. 영순은 그 순간 온전한 영순이 되었다.
손녀의 결혼식 하루 전 영순은 손녀에게 시장에서 사 온 고급 속옷을 선물로 건넨다. 손녀는 웃음을 터트린다. 영순은 그러나 시종일관 진지하게 말한다. 너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최고라고. 콜라텍 장을 누비고 학수와 함께할 때 영순의 낯빛과 쨍한 형광등 아래에서 남편을 돌보는 영순의 낯빛은 완전히 대비된다. 그것은 콜라텍 장의 불빛과 요양원의 불빛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딸은 영순과 학수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는 방법으로 인정한다. 아무리 폭력적인 남편인 동시에 아버지였음에도, 이 둘의 법적 관계는 말소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이제 늙고 병들어 요양원에 누워있기 때문이다. 엄마인 영순이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지만, 동시에 자기 딸의 결혼식에 아버지와 함께 참석할 것은 당연하게 기대하는 것이다. 불륜이라고 할 수도 있는 관계이지만 딸이 문제 삼지 않는 것은 엄마의 삶을 이해해서이기도, 동시에 그 관계가 후차적인 것이라고 넘겨짚어서일 수도 있다.
결혼은 사랑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모든 면에서 맞는 말이지만 그 말은 어쩐지 모든 사실을 지우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순은 몰아닥치는 혼란 속에서도 간명한 선택을 한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콜라텍 드레스를 손빨래 하고 창밖을 바라본다. 학수는 죽었고, 그렇기에 다시 볼 수 없으며 남편과의 혼인 관계는 여전히 지속되지만. 영순에게도 날뛰는 감정이 있음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영화 <첫 여름>은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