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피치 & 후지쿠라 다이와 심포닉 아르모니아
연출가 오카다 토시키(Toshiki Okada)와 작곡가 후지쿠라 다이(Dai Fujikura)의 협업작인 <거실의 변신>이 2025년 서울국제공연에술제(SPAF)에 11월 1일과 2일 무대에 올랐다. <거실의 변신>은 일본 첼피치(chelfitsch) 소속 배우 6명과 한국 현대음악 연주자 7명이 함께 무대에 올라 독특한 무대 언어를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현실과 허구, 움직임과 소리, 말과 음악이 뒤섞이고, 또 다른 층위의 감각이 출현한다. <거실의 변신>은 극과 음악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을 익숙한 공간 속 낯선 감각의 세계로 초대한다.
거실은 ‘살 거’와 ‘방 실’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거실의 의미를 단순하게 해석하자면, 사는 방이라는 의미다. 현대적 의미의 거실은 서양의 주택 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파트와 같은 공동 주택이 보급되면서 일반적인 주거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거실은 가족이 모이는 공간인 동시에,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거실은 타인에게 닫힌 공간인 동시에 열린 공간이 된다. 연극 <거실의 변신>은 7명의 연주자가 무대에 입장하며 시작한다. 연주자들은 무대 전면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연주한다. 이는 다수의 무대 예술에서 연주자를 무대의 후면 혹은 아래에 배치해 그들을 ‘보이지 않게’하는 것과 대비되는 연출이다. 연극 <거실의 변신>에서 무대 전면이 연주자의 몫이라면, 배우들은 무대 좌측 후면에 있었다. 무대 좌측 후면에는 의자와 협탁, 전등 등 몇 가지 목재 오브제를 통해 거실이 간단히 표현된다. 이러한 배치를 통해 관객들은 배우의 대사와 움직임을 연주자들에 의해 가려진 채 목격하게 된다. 이는 마치 거실이라는 공간이 열린 동시에 닫힌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시도로 보인다.
집은 편안한 곳,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곳, 그리하여 다시 일터로 가기 전까지 자신을 회복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혹은 ‘말 된다.’. 그러나 공간과 관계로서 진짜 존재하는 우리 주변의 집들을 생각해 보면 집에 대한 여러 수식어가 근거 없는 이상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너무 비싸지만, 비좁은 비적정 주거지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러나 대체로 한 사람-아내, 엄마, 여성-에게 집중된) 가사 노동, 지긋지긋한 폭력. 그럼에도 집에 관하여 진짜 존재하는 것들은 극단적인 예외 혹은 불행으로 치부되거나 적당히 덮어 넘겨진다. 그렇게 우리는 집에 대하여 딱 거실만큼만 보기로 선택한다. 평온과 불행이 집에 대한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바로 집에 대한 사실이다. 쓰레기가 쌓인 방도, 설거지가 넘치는 부엌도 아니고 손님을 부를 수 있을 만한 거실만큼만 집을 생각한다.
연극 <거실의 변신>의 PART1 배우들이 서로 맞지 않아 불안한 연주와 함께 거실에 등장한다. 검은색 옷을 입은 남성은 집에 퍼져있는 ‘음습한 기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인물들은 모두 강렬한 색감과 기하학적 무늬의 옷을 입고 있다. 대사 한마디 그들은 편하게 내뱉을 수 없다. 그들은 온몸을 꺾고 구부리며 고통받는 모습으로 말을 이어간다. 한 마디로 그들은 기괴하고 불편해 보인다. 우리가 집이라는 이미지로 떠올리는 것들을 뒤틀고자 결심한 것처럼.
거실에 모인 이들은 강제 퇴거 위기에 놓였다. 머리띠를 쓴 여성이 아침에 집주인에게 연락받았고, 그들이 나가야 하는 까닭은 그 집에 사는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전화받은 머리띠를 쓴 여성은 불안해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붉은 옷을 입은 여성은 법률적으로 세입자를 내쫓을 권리가 집주인에게는 없다며 불안해하는 여성을 덜 불안하게 할 수 있는 법적 사실들을 충분히 설명한다. 오직 한 사람, 붉은 로브를 입은 중년의 남성만이 뒤틀린 이 거실에서 평온하다. 남성은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 이를테면 베란다에 말린 이불이 비바람에 날아간 것, 그 때문에 오늘 밤 포근히 잠들지 못하는 것. 생각 없이 베란다에 이불을 널었기에 비바람이 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도 함께다. 주변 모든 인물이 고통받고 불안해하지만, 남자는 그들이 이상한 것은 계속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계속하기 때문이라고 타박한다. 어쩌면 그의 말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히스테리에 사로잡힌 듯한 이 거실에서 그의 유유자적한 태도는 눈에 띄게 거슬린다. part 2에서 검은색의 끈적이고 매끈한 표면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가 사람인지는 불명확하다. 난데없이 남의 거실에 들어와 검은색 옷의 남성과 한 세트와 같은 춤을 추는 그녀를 본 중년 남성은 크게 분노한다. 이 상황을 정말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남성뿐이다. 그때 중년 남성을 제외한 인물들은 간단하게 결정한다. ‘저 짜증 나게 하는 남자를 죽여버리자.’ 갑자기 나타난 여성이 건네준 돌덩이를 안고 남자를 끌고 나간다. 그렇게 남성은 죽어버린다.
남성의 죽음을 경계로 연극 <거실의 변신>은 초현실로 넘어간다. 배우들의 기괴한 움직임과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PART1과 part 2가 강제 퇴거와 같이 현실의 문제 위에서 진행되었다면 남성이 죽은 이후로 남은 사람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재앙을 마주하게 된다. 폭풍우와 몰아닥친 후 우선 이들은 색만을 보게 된다. 이때부터 무대 좌측 후면에 있던 가구들은 부서지고 엎어지며 원래의 용도와 다르게 활용된다. 거실은 해체되고 사람들은 초현실의 세계관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나간다.
와중에도 머리띠를 쓴 여성은 불안을 멈추지 못하고, 붉은 옷을 입은 여성은 세입자를 보호하는 법령을 외우며, 검은 옷을 입은 남성은 이 집의 기운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거실의 변신> 속 죽은 남성을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에 강박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현실이었다면, 우리는 강박적이고 기괴한 인물을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 <거실의 변신>에서 유일하게 짜증 나게 하고 이상해 보이는 것은 죽은 남성이다. 현실에 존재할 법한 죽은 남성만을 낯설게 느끼게 된다.
다 부서진 거실에도 집주인이 매물로 내놓은 그들의 집(이었던 것)을 보러 사람 혹은 물체들이 온다. 이제 사람들은 색만을 보지 않는다. 부서진 거실을 중심으로 세계는 뭉텅이로 재구성된다. 무대 뒷면에는 검은색의 거대한 튜브가 부풀고 검은색 기하학 모형이 놓인다. 사람들은 가구였던 것에 매달려 자신조차 물질이 되어버린다. 연주자 앞으로 절대 나서지 않았던 인물이 한 명씩 무대 앞으로 달려 나와 말을 내뱉는다. 그렇게 불안은 멈춘다. 연극 <변신하는 거실>은 무대를, 그리고 세계의 의미를 뒤튼다. 무엇이 선행되지도 목적이 되지도 않은 채, 서사와 그 형식을 하나로 통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