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라후프를 잘 돌리는 아이

프롤로그

by 과몰입낭만주의자


오늘 유튜브에서 사이키 쿠스오의 재난을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환영받는 사람, 인정받는 사람에겐 이유가 있다.

그림을 잘 그리거나, 줄넘기를 잘하거나, 키가 크거나, 성격이 좋거나, 예쁘거나.

나는 어릴 적 훌라후프를 유독 잘 돌렸다.

체육 시간에 잠깐 반짝 인기를 누린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을 빼면 나는 늘 아웃사이더였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가는 길도 각자 다르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멋진 일을 하고 있겠지."

근거 없이 품고 있던 이 확신은

어딜 가든 겉도는 기분이 들어도(혹은 실제로 겉돌더라도)

오히려 나만의 특별함을 입증하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마치 막걸리의 누룩처럼 그 믿음은 조용히 나를 취하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믿음은 남들에게 별다른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좀 특이한 애'였거나 아예 관심 바깥의 존재였겠지.

나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관심했으니까.

지금쯤 선생님들 중에 나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까?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까지 남의 눈치를 봤던 걸까?

국제법 수업을 하던 멋쟁이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지금 가진 걸 다 버리고라도 다시 20대 초반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말은 오래도록 내 안에 잔물결처럼 남아 있다.


지금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

자소서, 자격증, 대외활동으로 '특별함'을 증명하려 애쓰는 동기들 사이에서

나도 나만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훌라후프를 가장 잘 돌리는 아이가 아니다.

어딜 가도 중심보단 주변에 있는 느낌이고,

좁은 자취방에서 늦잠을 자고, 강의엔 지각을 밥 먹듯이 한다.

친구들은 저마다의 방향으로 단단히 나아가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걸었던 친구는 그 여정을 담아 앨범을 냈고,

한국어를 배우겠다며 나에게 특훈을 받았던 친구는

지금 파리에서 한국인 혼혈 남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학점은 높지만, 남의 기준에 맞춘 결과일 뿐이고

전공엔 특별한 애정도 없다.

중국어도 그다지 잘하지 못한다.

휴학 직전 나는 나의 대학생활을 매일 반추한다.

너무 자주 되돌아본 나머지 이제는 발레리나가 되어버렸다.


열심히만 살기엔 시간이 아깝고,

열심히 안 살기엔 처지가 무섭다.

노동은 하기 싫다.

일이 하고 싶다.

그냥 인강이나 들어야지.


2023. 11.26. 19:20

고시 진입을 앞두고 휴학 전 자취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