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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의 위성 Oct 24. 2022

영국대학교에서 뮤지컬 오디션 보기

18-22시까지의 대장정

나는 한국 대학에서 내내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모두가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 올린다는 건 엄청난 매력이 있는 예술이다. 그래서 그렇게 빠져서 했나 보다. 아무튼 교환 학기 초에, 동아리를 홍보하는 행사를 통해 이곳에도 극예술을 하는 클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마침 마음 맞는 친구가 있어서 같이 그 동아리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아리 모임을 가게 되었는데,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내 모교나 여기나 연극 동아리는 비슷하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무조건 동그랗게 크게 원을 만들어서 활동한다. 자기소개도, 이어지는 게임도 말이다. 둘째로, 엄청난 재능꾼에 확신의 대문자 E 친구가 있다. 보통 이 부류는 게임을 주도하고 때때로 똘끼를 보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분위기 메이커다. 이들 사이에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게 된다.


이렇게 활동이 끝나고 연출로 보이는 학우가 오디션 공고를 알려주었다. 언제어디서어떤 작품인지 말이다. 사실 나는 배우 오디션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배우 욕심은 크게 없었으니까.. 스태프로 들어가서 스태프  하면서 여기 동아리는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근데 같이 갔던 친구가 이왕 하는 김에 오디션도 가보자고 해서 가게 되었다근데  두려운  두려운 거라 해산 무렵에 연출에게 가서 어떤 종류의 오디션을 보는지 따로  준비해야 하는지 물어봤는데, 연출님이 정말로 친절하게 아무 준비도 안 해도 되고 즐기는 마음으로 오라고 했다. 그러니까  자신감이 찼던  같다. 그래선 안됐는데




집 가고 싶다…


오디션 후반 무렵의 나와 친구는 이 말을 계속했다. 물론 우리끼리 속삭였다. 예의는 있어야 하니까. 오디션이 정말 정말 길고 고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오디션은 이렇다.


1. 스크립트를 받는다. (사전에 고지하거나 나눠준 스크립트가 없었음)

2. 정해진 시간에 한 명씩 혹은 여러 명씩 들어가서 오디션을 본다. (오디션 공고에 시작 시간과 끝나는 시간만 쓰여있었다)

3. 각자 오디션을 본 뒤, 기숙사로 귀가한다.

4. 결과를 기다린다


그러니까 나는 당연히 혼자 오디션을 보거나, 조를 짜서 시간대별로 오디션을 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작 시간과 끝나는 시간은 무려 오디션에 참여한 모든 이들과 다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일종의 오디션 겸 워크샵이랄까..?


1. 춤을 함께 배운다

1-1. 춤을 함께 열심히 춘다

1-2. 반을 나눠서  오디션을 본다! (나머지 학우들은 관람)

2. 노래를 함께 배운다

2-1. 노래를 함께 열심히 부른다

2-2. 노래 오디션을 본다. 한 명씩. (나머지는 전부 나만 보고 있다. 심지어 조연출은 내 노래 영상을 찍는다.)


여기서 탈주 욕구가 급히 왔는데, 논스톱으로 이어지는 오디션이라 스리슬쩍 나갈 수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누가 봐도 교환학생이라 탈주하면 눈에 띌 것이 분명했다. 모르겠고 일단 킵 고잉 해보자. 하고 마음을 다잡는데..


대망의 연기 오디션.


3. 독백 스크립트를 준다.

3-1. 30-40분의 개인 시간을 준다. 이게 연습시간이다. 독백 연습시간. 물론 무조건 외워서 안 보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3-2. 한 명씩 나가서 독백 연기를 한다. 나머지 친구들은 역시나 다 관객으로 관람. 그야말로 오픈 오디션


연출의 마지막 오디션 세션 설명을 듣는데 진짜 도망칠까 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리고  손에 들어온 독백 스크립트. 다들 받자마자 연습실 안팎 곳곳에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3  고민했다.  사이에 도망갈까. 진짜로  진심으로 집 가고 싶다. 하지만 나도 친구도 집념으로 이겨냈다. 해보자 해보자  끝까지 해보자. 나는 외우는  애초부터 포기했고, 최대한 버벅대지 않고 인물이 말하는 것처럼 하기에 집중했다. 너무 읽는 것이 아닌 말하는 것처럼! 사실 그것도 어려웠다. 처음 보는 영어 스크립트였으니까.


그리고 대망의 독백 오디션. 나의 오디션 순간 자체는 괜찮았다. 물론 퀄리티가 괜찮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전이 달달 떨리고 벌써부터 쪽팔리고 난리였는데  때는 진정이  되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끝내고 앉았다.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이제 정말 집갈  있어..?


기숙사를 돌아가는 길에 학내 편의점에 들러서 커피와 쿠키를 샀다. 내 안의 것을 너무 많이 쏟아내고 왔기 때문이다. 나를 채울 원료가 필요했다. 코스타 캔커피와 1파운드도 안 되는 쿠기 한 줄이었지만 뒤풀이 음식으로 충분했다. 


근데  신기한  가로등 불빛 받아가며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신이 났다. 이거 그건데. 연극 활동하고 오면 나오는 조증 상태. 들뜨면서 이상하게 상쾌하다. 허기짐과 상쾌의 공존. 연극쟁이들은 어디서나 똑같다.


집에 와서 캔커피를 들이붓고 쿠키를 와작와작 씹으니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돌아온 정신으로 복기해보니 용감한 선택에 엄청난 경험이었다. 와 세상에 내가 영국 대학에서 오디션을 다 봤네..


내가 놓쳤던 건 이 클럽에서 이번에 선택한 극은 뮤지컬이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연극 동아리였지 뮤지컬 동아리는 아니었다. 둘 다 극예술이긴 하지만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무대에서 혹은 관중 앞에서 노래나 춤을 춰본 적이 없다. 그걸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거기서 기가 홀딱 빨려 버렸다. 다 같이 춤추고  혼자 춤추고.. 노래하고.. 노래하고.. 특히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게 너무 떨렸다. 


그런데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언제 영국 대학에서 오디션을 봐보겠나. 물론 나는 아무 배역도 따내지 못했지만(하하!) 과정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다만 가끔 캠퍼스에서 연출을 마주쳤는데 그게 좀 곤혹스러웠다. 먼저 인사를 해야 할지..? 하지만 그만 보면 내가 췄던 뚝딱 춤과 노래와 연기가 떠올라서 그가 나를 알아차리기 전에 휙 방향을 꺾곤 했다.


저녁 6시부터의 10시까지의 꽉 찬 오디션. 그리고 돌아오던 밤공기를 잊지 못한다. 체력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 좋던 걸음. 극예술은 그런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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