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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M코칭랩 Mar 17. 2021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제현주 지음


2021.03.02~03.14

문장은 좋다. 내용도 좋다.

그런데 잘 읽히지는 않는다...

나의 이해력이 갈수록 저하되는 탓이련가...

점점 내가 단순해져 가기 때문이련가...

글을 점점 쉽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정리**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라고 하는 조직에서 그 구성원이 주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조직은 별로 없다. 능력을 갈고닦는다고 해서 대체 불가한 인력이 되지는 않는다. 존재의 가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일터에서 일해야 한다.


**

p10. 노동은 화폐로 환산되는 한에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가치가 높아야 자신과 가족의 배를 채운다. 그러나 밥벌이야말로 귀하다지만, 누구든 밥벌이만으로 인생을 채우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을 둘러싼 모순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한 욕구를, 창조하고픈 욕구를, 인정받고 은 욕구를 일 하나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p27. 현재 2제 전문대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미국 청년은 앞으로 40년의 취업 기간 중에 최소한 11차례 전직하고, 최소한 세 차례 '밑천 기술'을 바꿀 것이라 예상된다 - 리처드 세넷,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26쪽


이제 우리의 모든 '일자리'는 단기 프로젝트에 가깝다. 그 단기 프로젝트를 이어 붙여서 그럴듯한 커리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이제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언제나 일이 최우선인 <미생>의 오차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캐릭터인 이유는,

p28,29 첫째, 현실에서 오차장 같은 이가 결국 배신당할 것을 알기 때문, 둘째 우리가 현실에서 오차장 같은 상사나 동료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개 '지나치게'윤리적인 사람을 옆에 두길 꺼린다. 오차장 같은 이가 보이는 열정 앞에 우리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며 죄책감을 강요당한다. 일이 곧 자기 자신인 사람 앞에서 우리는 초라함을 느낀다. 일이 돈벌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조하는 자신은 그 앞에서 속물이거나 게으름뱅이,  현실과 타협한 비겁자처럼 보인다. 누구도 그런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일상의 반경 안에 놓이길 원하지 않는다.


p30. 세넷이 말했듯이 "일에 대한 애착심의 결핍은 심리적 혼돈과 짝을 이루게 마련이다". 하루에 최소 여덟 시간씩 들여야 하는 활동에서 애착을 거둔다면 우리 삶은 과연 행복해질까?


직장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 개인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식으로 밖에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뒤늦게 일에 배신당한다.


p31. 남는 것이 있다면 그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희미한 상징자본뿐일 것이다.


p32. 결혼에 골인하느냐가 연애의 의미를 판단하는 유일한 준거가 아니듯이, 이 일을 평생 가지고 갈 수 있을지가 일에 마음을 다할 조건이 될 필요는 없다. 하나의 일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까지 하는 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행운이 아니다.


p38.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 vs 호모 파베르(만드는 인간)


스스로 결정하고 통제하는 과정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 내놓는 행위라면 그 행위는 '일'이 된다. 인간은 한때 정해진 섭리에 따라 묵묵히 일과를 따르며 하루하루를 채우는 것은 미덕으로 여겼다. 그러던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일은 단순히 고된 노동이 아니라 창조적 활동이 되었다. 호모 파베르는 그렇게 탄생했다.


p49.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일하기 싫다'고 말하지만 싫은 것은 대개 일 자체라기보다는 일이 놓인 조건이다. 그저 싫다, 괴롭토로하는 대신 정확히 어떤 부분이 싫은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무엇이든 하나씩 지금과는 '다르게' 해보아야 비로소 실마리가 드러난다.


p60.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괜한 일 벌이지 말고 우선 '하면 안되는 일부터 하지말자'


p88. 돈벌이가 전부라는 중독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돈벌이의 무게를 부인하지 않아야 얼마만큼의 돈벌이를 감당하며 살아갈지 냉정히 판단할 수 있다.


p132. 일의 네가지 의미 1)활동 자체가 주는 의미. 몰입의 재미와 가까울 것 2) 원하는 판을 짜서 일하는 재미, 이것은 자기결정권의 문제다. 3)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재미. 결과물이란 성과와 같은 말이 아니다. ~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재미란 성과가 확인되기 전에 느끼는 것이다. 이런 재미는 두번째 재미와 어느 정도 연되는데, 내가 원하는 판에서 일하여 결과를 만들어내는 재미는 때로 지루하고 괴로운 활동을 견뎌내고 남을 정도로 크다. 4)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재미다.


p146. 나는 한 인간의 '열심의 총량'을 마냥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갖고 있는 열심 용량의 대부분을 밥벌이에, 그것도 원하지 않는 밥벌이에 쏟아넣을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재미있는 일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p152. "특정한 하나의 직업 안에서 스스로 마비되기보다는 어떤 가능성의 네트워크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을 선호한다" - 빌 게이츠. 안락한 평생직장보다는 변화무쌍한 가능성의 세계에 투신하는 것이 오늘날 성공한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이다.


오늘날에도 "무슨 일 하세요?"라는 말은 곧 "누구세요?" 하는 질문이다. "예전에 어떤 일을 하셨어요?"는 "어떻게 살아왔나요?"라는 뜻이다. 좋든 싫든, 명함은 당신의 현재를 말하고 이력서는 당신 삶의 역사를 말한다. 당신 삶의 스토리는 늘 이렇게 일과 함께 전개된다. 필연적으로.


p157. 처음 만난 자리에서 명함을 주고받는 것이 어른들의 교제법이다. 명함을 내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둘러서라도 집요히 물을 것이다. 그 답을 알고 나서야 그들은 머릿속 지도에 당신을 위치시키고 마음을 놓는다.


p160.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대개의 일자리는 장기적 관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장기적 관점으로 일할 수 없는 직장에서 도전적인 일을 만나기는 어려우며, 경제적 안정성을 담보받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다.


p161. 직장이 어떤 안정성도 담보해주지 못할 때 일을 배우기 위한 동기 부여는 지극이 개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p180. 현재를 견딤으로써 미래에 더 큰 과실을 누리라는 교훈은 안정적 토대 위에서만 빛을 발한다. ~ 내가 놓인 환경의 어떤 측면도 견실히 지속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시대, 오늘을 견디라고 부르짖는 노동 윤리는 결국 당신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지연된 만족에 이자를 붙여 돌려줄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p189.  아름답지 못한 일자리에서 묵묵히 성실해봤자 겨울에 대비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 개미는 그 자리의 최선을 다해내면서 언젠는 이 자리를 박차고 날아오를 가능성까지 지닌 자여야 한다. 모든 개미는 베짱이의 준비 단계일 때만 그나마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 오늘의 노동에 성실을 쏟으면서도 미래에는 더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p203. "요즘 바빠서요"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서요" 라는 의미임을 우리는 안다. 끊임없이 일로 회귀하며, 무엇이든 일과 연결짓는 열정가가 사랑하는 것은 사실 일이 아니라 대상화된 '자기'다. ~ 결국 일에 중독된 사람은 자기에 중독된 사람일지도 모른다.


p208. 세넷은 루소를 인용하여 자존감이 "세상에서 자신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확신"이라면 자존심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싶다는, 그래서 그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싶다는 욕망"이다. 자존심은 베버가 말하는 노동 윤리의 핵심이며 능력주의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이다.


p217. 우치카 타츠루 "사냥꾼인 아버지가 사냥한 짐승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듯, 농부인 아버지가 곡식과 채소를 지고 집으로 돌아오듯, 현대의 샐러리맨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언짢은 얼굴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가족을 위한 노고와 희생을 과시한다는 것이다.(<하류지향>)


아버지의(그리고 맞벌이라면 어머니의) 돈벌 노동도, 공부하는 자녀의 예비 노동도 집 밖에서 이루어진다. 각자가 어떤 노고를 치르는지 가족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니 가족 구성원들은 집으로 돌아와 얼굴과 몸으로 괴로움을 드러낸다. 그것조차 없다면 아무도 자신의 괴로움을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p230. 능력을 갈고 닦는다고 해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려면 등가성을 따지지 않고 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주는 일터에서 일해야 한다. 내 존재 자체를 일의 규정에 포함해주는 일터가 필요하다. 그런 일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없다면 우리 스스로 '무리'를 이루어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P244. 스터즈 터클의 저서 <일>


p246. 직원더러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한다면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꽤 가능성 높은 전망이 직원에게 있어야 한다. 그런 전망 없이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그건 자기기만이 아닐지. 끝내 주인이 될 수 없을 직장에서 그저 일만을 바라보며 일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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