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그럴 수 없겠지
그날, 새벽 4시쯤, 잠자리에 누웠을 때 생각보다 잠이 빨리 들었다. 나는 밤을 꼬박 새우고 출근하게 될 줄 알았지만, 밤 10시부터 동네를 돌아다닌 탓에 몸이 피곤함은 정신의 공포마저 눌러버렸다. 턱에는 8cm가량의 스크레치가 나고, 팔꿈치는 까지고, 엄지와 검지 사이의 근육은 놀랐는지 욱신거렸다. 아침 7시에 눈을 뜨고 몸이 아파서 출근을 못하겠다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은 했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허락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 고민은 나의 행동반경 밖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방에 가만히 있을 자신이 없었다. 바깥에 도둑고양이가 도사리고 있어 새장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참새가 된 기분이었다. 일단 나가기 전 창문을 단단히 잠갔다. 현관문 앞에 그가 서 있을지도 모른다. 살며시 새장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었다. 1층에도 아무도 없었고, 그의 차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1층 현관에 담배꽁초 다섯 개가 있었다. 오늘 새벽에 그가 연거푸 피워댔을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무사히 회사에 도착했고, 실장님은 나를 보더니 물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맞았어요.
뭐?
실장님은 나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누구한테?
남자 친구한테요. 미쳤다. 신고했어?
아니요.
휴... 너 어떡하니...
그러게 난 어떡해야 할까. 나는 일단 엄지 손가락 근육과 턱 상처에 대한 진단서를 받았다. 혹시 모른다며, 그 새끼한테 대응하려면 이 방법뿐이라는 언니들의 조언이었다. 나는 살면서 맞아봤다면 엄마에게 주먹이나 회초리로 맞은 것 이외에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그것도 남자 친구가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에 대한 대응은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배운 적은 없었다. 여기저기 몸은 아프고 정신은 몽롱했다. 지난밤 10시부터 밖에서 그가 짐을 싸고 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이기도 하겠지. 우리는 상견례를 앞두고 있었다. 난 그에게 '결혼하기 싫다'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했다. 내 핸드폰을 뒤졌나 보다. 그는 단순한 내 비밀번호를 알아내 내 핸드폰을 뒤적거리는 짓을 잘했다. 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락하는 남자는 있었다. 아마 그것을 봤으리라. 12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가니 집 비번이 바뀌어 있었다. 기가 막혔다. 내가 내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다니. 나는 열쇠 아저씨를 새벽 1시에 불렀다. 40분 뒤 아저씨가 도착했다. 문을 부숴야 한단다. 그 야밤에 드릴로 쇠문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고막을 울리는 거친 소리가 건물에 퍼졌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문이 잠긴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큰 소리에 아무도 나와보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다. 그렇게 30분을 아저씨와 내가 문과 씨름을 할 때쯤. 그가 다시 돌아왔다. 본인의 집에 짐을 두고 돌아온 모양이다. 아저씨는 눈치를 보면서 30분을 더 씨름을 하셨고 입금 확인 후 빠르게 사라지셨다. 그는 나보고 앉아보라고 했다. 이 씨발년아.부터 시작됐다. 이 쓰레기야. 너 같은 년은 죽어야 돼. 핸드폰 줘봐. 너네 부모님 연락처 다 불러.
이거는 남녀가 다투는 게 아니었다. 군대 선임과 후임 사이의 가혹행위에 관련된 애니메이션이 생각났다. 미친년아 핸드폰 내놔봐.라고 하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뒷걸음쳤다. 싫어. 그의 손이 올라갔다. 내 팔을 강하게 잡고, 엄청난 힘으로 장악하려고 했다. 그는 내 뺨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 일들에 대한 현실감이 없을수록 기억이 오래 남는다는 건 정말이지 좋지 않다. 그 와중에도 나는 핸드폰을 꼭 쥐었다. 급기야 그는 내 목을 잡고 바닥에 눌렀다. 그리고 결국 뒷팔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뺏어갔다.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경찰이 범인을 압도해 결국 흉기를 뺏는 상황이 연출됐다. 나는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창문이 열려 있어 누가 들어주길 바랬다. 그러나 그는 손을 허공으로 올리며 더 맞고 싶다고 물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절망적이었다. 그가 빨리 이 집을 나가주길 바랬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비밀번호가 뭐냐고 소리 질렀다. 그가 내 핸드폰을 본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이미 미리 바꿔놓았기 때문에 그는 더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왜 부모님한테 잘했냐고 소리 질렀다. 그게 가장 억울한 눈치였다. 그리고 몇 번 더 소리 지르다가 갑자기 읍 하고 입을 틀어막더니 치솟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그렇게 끝이었다. 2년 간의 연애와 결혼 준비는.
나는 그가 나가고 창문과 모든 문을 걸어 잠갔다. 이 집에 다시 들어올까 봐 정말이지 무서웠다. 조금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집을 돌아보니 그는 내 안경이나 소소한 물건을 부셔놓았다. 나를 때릴 정도로 열이 받았지만 실제로 큰 물건은 던질 수가 없다는 건 정말 그 다운 행동이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무서웠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바로 그 집을 내놨다. 그가 그립지도 않고, 원망스럽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주일이 지났을 때쯤 어느 날,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 그와 정말 행복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억눌렀던 눈물을 쏟아냈다. 너 어떡하니.라고 물었던 실장님의 말이 생각났다. 정말 어떡해야 되나요. 이제는 어떡해야 되나요. 되묻고 싶었던 내 심정이 꾹 눌러왔던 무거운 추에서 빗겨 나 결국 터지는 것 같았다.
한 달이 지났다. 나는 밤새 그와의 추억을 생각하며 울었다. 내가 감히 결혼을 결심하게 된 그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웠던 2년의 시간은 어떤 계기로 인해 완전히 끝을 맺었다. 그 계기는 나였다. 나는 결혼이 하기 싫어졌고, 다른 남자와 연락을 했다. 그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는 언제나 똑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변했다. 계속 변할 사람이다. 그 연락을 하던 남자는 내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연락이 끊겼다. 또 한 명의 쓰레기 생성이다. 내가 아는 선배에게 '나는 세 명을 동시에 쓰레기로 만들었어요.'라고 하자 선배가 말했다. 왜 세 명이야, 두 명이지. 넌 쓰레기 아냐.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마.
우리는 모두 각자 잘 살고 있다. 자신을 용서하면서. 남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하면서.
하지만 그는 나를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걸 생각하고 있자면, 과연 우리가 스스로를 용서하며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다. 용서라는 것이 스스로에게 허용된 감정과 행위가 맞긴 한 건지. 어쩌면 인간은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용서받아야 행복해질 수 있는 타인 의지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난 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