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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 Apr 15. 2023

영자씨와 순간온수기

분명 냄새는 소고깃국인데 아무리 휘저어도 고깃덩어리가 보이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무얼 먹어도 영자씨가 차려낸 밥상이 최고였는데, 나이가 드니 영자씨의 솜씨가 줄어든 건지 내 입맛이 까다로워진 건지 늘 뭔가 하나 빠진 듯 허전하다.

영자씨의 시그니처인 언제 먹어도 최고인 빡빡이 된장은 예외지만.


“엄마, 신선한 재료를 듬뿍 넣어야 맛있어 진대, 음식이 다 재료의 맛이래잖아.”

넉넉하게 장 봐서 맛있게 먹자라고 해도 영자씨는 한사코 재료를 아끼고야 만다.

소고기 냄새만 풍기는 멀건 소고깃국, 고춧가루를 아껴넣어 빨간색 스치고 간 듯한 찌개…

형편이 괜찮아지고도 영자씨는 늘 그렇게 말 그대로 한 푼을 아끼고 사셨다.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그 절약정신에 태클을 걸었으면 좋았을 걸.



늦은저녁 아빠가 택시운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언제나 아랫목에 넣어놓은 커다랗고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긴 아빠밥을 상에 올린다.

엄마는 항상 밥을 지으면 뚜껑을 열자마자 제일 뜨거울 때, 제일 먼저 국그릇처럼 큰 아빠의 밥그릇에 고봉밥으로 한 그릇 퍼내어 아랫목 이불밑에 넣어두셨다.

15평 남짓한 작은집에 부엌에서 방까지 그 몇 걸음 사이에 밥이 식기라도 할세라 종종걸음으로 재빨리 걸어가 이불을 들추고 밥을 고이 모셔둔다.

그 모습을 지켜봐 온 나는 엄마가 아빠밥을 풀 때면 소매 끝을 손가락 끝까지 끌어내려 쥐고 있다가 엄마가 열기로 뜨끈뜨끈한 밥그릇을 소매 끝 위에 조심히 올려주면 부리나케 달려가 아랫목 제일 뜨끈한 곳에 밥을 넣어두곤 했었다.

이불밑에서 계속해서 온기를 품고 있을 커다란 아빠의 밥 속에는 엄마의 바깥양반에 대한 존경과 이제 결혼한 지 10년 남짓된 남편에 향한 새댁의 수줍고 고운 마음도 함께 담겨있다.

밥뚜껑을 열면 열기가 식지 않은 밥에서 갖지은 것처럼 구수한 밥냄새가 올라온다.


반찬은 늘 김치와 콩나물국.

늘 시원찮은 반찬에도 아빠는 반찬투정한번 없이

"아~ 맛있겠다!"하며 국부터 한 술 입에 넣으신다.

숟가락으로 밥을 풀 때 아빠는 푹 쑤시지 않고 겹겹이 걷어내듯이 밥을 푸셨다.

숟가락 가득 동산처럼 부풀어 오른 하얀 밥 위에 김치를 한점 척 걸쳐서 맛있게도 드셨다.

늦게 들어오신 아빠가 밥을 먹을 때 나는 곧잘 아빠 옆에 붙어 앉아서 아빠 입으로 들어가는 숟가락만 연신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저녁을 먹었지만, 찬 없이도 맛나게 먹는 모습에 자꾸 꼴깍꼴깍 침이 넘어간다.

그 모습이 귀여우신지 아빠는 밥을 작게 한 숟가락 퍼고 김치 한 조각을 찢어 올린다.

'아 저것은 내 것이구나.' 벌써부터 맘은 설레고 아빠의 숟가락은 나를 향한다.

입속에 쏙 넣어주는 그 한 숟갈이 얼마나 꿀맛 같았는지.

이제야 나는 원하는 바를 이룬 것처럼 밥상 앞에서 멀어져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이미 큰언니, 작은언니를 거쳐서 내게 온 몽당 크레파스를 꺼내 아빠가 달력을 잘라서 묶어준 달력뒷면 하얀 바닥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부모님은 그렇게 없는 살림에 시작해서 아끼고 아껴 우리 4남매를 키우고 입히셨다.

겨울에 내뱉는 말끝마다 허연 입김이 설어도 엄마, 아빠는 손님이 오거나 큰일이 있지 않고서야 보일러에 기름을 채우지 않았다.

나 또한 결혼 전에는 다른 집에도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전기장판을 깔아놓고 잤기 때문에 등은 따뜻했지만, 입에서는 입김이 나오는 채로 잠들었었다.


오랜만에 친정에 들렀다.

한겨울이었지만 역시 영자씨는 보일러를 틀지 않고 계셨고, 소파 위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자꾸 거긴 춥다며 여기 전기장판 위에 앉으라 하신다.

영자씨의 따순 밥상을 마주한 뒤, 설거지를 하려고 물을 틀었다.

그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한순간 당황스러움, 그다음은 걱정, 그다음은 짜증이 순차적으로 밀려온다.


삼키려다 끝내 내뱉고야 만다.

“엄마!! 하다못해 뜨신물은 좀 쓰고 살아~!! 아니 이렇게까지 아끼면서 불편하게 사는 이유가 뭔데…”

“아이고~~ 나는 괜찮다. 몸에 열이 많아가 엄마는 마 찬물이 낫다! 그래도 샤워할 때는 보일러 틀어놓고 샤워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절로 비키라. 엄마가 설거지할게. 고무장갑 안에 흰 장갑 한 개 더 끼고 하면 손하나도 안 시리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영자씨는 그렇게 억척스럽게 70년 세월을 살아내셨다.

결국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영자씨가 들고 선 고무장갑을 낚아채듯 가지고 왔다.

“이리 내라~ 니는 애들 단손에 키운다고 맨날 욕보는데 집에 왔을 때만이라도 좀 쉬다 가라.”

“아이다. 엄마.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엄마는 감 깎아도. 감 먹고 싶어서 사 왔다”

“아 그래 엄마가 감 깎아줄게.”

그제 서야 영자씨는 감을 4개 꺼내서 식탁에 앉아 조심조심 감을 깎기 시작한다.

영자씨는 감을 참 좋아한다.

제 입으로 들어가는 건 돈이 아까워 6000 원하는 감 한 줄도 쉬 사지 못한다.

그 마음을 알아서 엄마에게 갈 때는 늘 참외나 감 같은 영자씨가 좋아하는 걸 챙기게 된다.

영자 씨는 가난하지 않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돈을 쓸 줄 모른다. 아예 방법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늘 영자 씨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보면 사야 한다!라는 반응이 함께 인다.

그렇게 자식들이 챙겨 온 음식이라 반가움과 기특함까지 얹어서 맛있게 한입 베어 물고

“아~ 감 달다! 니도 어서 와서 묵어봐라.” 하며 연신 행복 가득한 미소를 띤 영자 씨를 볼 때면,

아까의 안타까움과 짜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음엔 더 맛있는 거 사다 줘야지 하는 마음만 커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순간온수기를 검색한다.

괜찮아 보이는 것도 20만 원 정도면 가능하다.

2주 후 집을 방문했을 때 주방옆에 설치된 순간온수기가 보인다.

멀쩡한 보일러 놔두고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엄마는 연신 즐거운 표정으로 “우리 딸 덕분에 이제 설거지할 때 손 하나도 안 시리다”하신다.

분명 자기는 열이 많아 찬물이 더 편하다 해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는 해맑은 영자 씨의 미소에 자꾸 눈물이 겹친다.


“어이구 영자씨야~~ 좀 쓰면서 살자. 자꾸 자식들 맘에 눈물 고이게 하지 말고”

라고 아무리 얘기해 봤자.

자기는 다 좋단다.

키울 때는 힘들었는데 키워놓고 보니 줄줄이 낳아놓은 자식들이 다 효자효녀라서 좋단다.

그래, 영자 씨의 끝없는 알뜰함과 자식들에게는 끝없는 베풂의 끝에 우리가 있으니까…


나도 좋다.

그런 영자 씨라서. 그런 영자 씨가 내 엄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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