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옛날에는 과학과 기술과 예술이 한몸뚱이였습니다. 과학이 먼저 분리되어 나가고, 기술이 분리되어 나가고, 예술이 “아름다움”을 형상화하는 창조활동으로 남았습니다. 문학은 문자를 통해 의미와 형상을 표현하는 창조활동입니다.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은 삶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추함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무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듯이. “관심”을 가질 때 “아름다움”이 깃듭니다. 관심은 관찰을 부르는데, 거기서 원리를 발견하여 이론을 구축하면 과학이 되고, 거기서 미적 형태를 발견하여 형상을 구축하면 예술이 됩니다. 삶을 그저 스쳐 보내기만 한다면, 거기에는 과학도 기술도 예술도 깃들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지는 삶을 사는 것이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면, 주체는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하며 세상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홀로 있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얽혀 있는 삶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도 관찰하고 나 자신도 관찰하는 것이 발견하는 삶입니다. 존재가 이 관계를 자각하면, 문학과 예술이 시작됩니다. 모든 개별 존재의 가치는 계량되지 않을 만큼 소중합니다. 인지되든 인지되지 않든.
문학과 예술은 누군가 간 길을 따라가는 활동이 아닙니다. 창작활동이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발견하는 활동입니다. 예술가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미적 형태를 발견하여 형상화하는 사람입니다. 그 길은 처음 가는 길이기에 사실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던 길을 스스로 만드는 활동입니다.
루쉰은 “고향”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 된 것이다.” 길은 본래 없던 것입니다. 본래 없던 길을 “길 없는 길”이라고 합니다.
대도무문 [大道無門]이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남송 때의 선승 무운혜개 스님이 선불교의 화두를 모아 엮은 <무문관>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본래 구절은 대도무문(大道無門) 천차유로(千差有路) 투득차관(透得此關) 건곤독보(乾坤獨步) 입니다. “큰 길에는 문이 없네. 수많은 길, 천 갈래 만 갈래 이 빗장을 뚫어내면 하늘과 땅 아래 홀로 설 수 있네.” 대도에는 정해진 길을 알려주는 문이 없고 오히려 수천 가지로 길이라 할 수 없는 길이 있습니다. 빗장을 뚫으려면, 저 천 가지 길 중에 어느 한 길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문과 같이 이미 정해진 방법을 알려줄 수 없으니, 스스로 길을 선택하여 빗장을 뚫으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런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처음 그 길을 가면, 다음에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길이 길이라 불리는 이유는 다음 사람 그리고 그 다음 사람이 계속 따르기 때문입니다. 서산대사는 이런 선시를 남겼습니다.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서산대사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남기는 이 발자국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이가 이정표로 따를 것이니
누구에게나 삶은 처음 살아보는 삶이고, 누구에게나 모든 순간이 처음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2017년 11월 8일 독서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