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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Dec 19. 2020

아니 에르노의 <사건>을 읽고

기록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책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 <사건>, 아니 에르노 저



 아니 에르노의 저서들을 하나씩 도장깨기 하고 있다. <사건> 다음으로 가장 읽고 싶은 책은 <칼 같은 글쓰기>지만, 절판된 관계로 구하기가 어려워서 <부끄러움>을 읽게 될 것 같다. 




 <사건>은 아니 에르노가 임신중절 수술을 한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여 기록한 책이다.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도 이 책을 읽으며 충격을 받았던 것은 나의 무지함에 대해서였다. 내가 이 수술의 위험성이나 수술 전후로 여성이 어떤 겪었을 심경들에 대하여 얼마나 새하얗게 몰랐는지. 지난 역사(특히 낙태가 불법이던 시기와 장소에서는 더더욱)에서 여성들이 이제껏 목숨을 걸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해왔을 이 수술을 내가 얼마나 가볍게 생각했었는지를 말이다.




 책을 집어들 때만 해도 낙태가 불법이던 시기에 대학생이던 아니 에르노가 임신했음을 알게 되고, 의원을 전전하다가 불법으로 임신중절술을 할 수 있는 노인의 주소를 알아내어 방문하고, 실패해서 다시 방문하여 태아를 몸 밖으로 꺼내고, 너무 출혈을 많이 해서 결국은 병원에 가서 닷새간 입원을 하는… 이 일련의 일들을 기록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그의 기록 덕분에 나는 책을 읽으며 학생이던 그가 되어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혼란과 충격, 임신중절술을 간접적으로 요청하고 거부당했을 때의 좌절과 절망, 알지도 못하는 여성으로부터 시술을 받으며 느꼈을 무력감을 고스란히 내 것인양 체험했다. 낙태는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선택을 할 권리 중 하나라는 말의 의미를, 책을 읽기 전에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그렇다면 그로 하여금 이 세간에 충격적인 반향을 일으킬 이 책을 끝까지 쓰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에르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성한 무엇처럼 1월 20일과 21일 밤의 비밀을 내 몸속에 간직한 채 거리를 걸었다. 내가 공포의 끝에 있었는지, 아름다움의 끝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자긍심을 느꼈다. 어쩌면 고독한 항해자들, 약물 중독자들과 도둑들, 혹은 다른 이들이 결코 가려고 하지 않는 곳까지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자긍심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감정의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쓰게끔 만들었다.

 - <사건>, 아니 에르노 저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뿐 아니라 다른 여성들―동시대 여성들을 포함하여 오래 전 이 땅을 살았을 여성들, 내 뒤에 올 여성들―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여성으로서 여성만이 겪을 수 있는 기쁘고 경사스로운 일들을 체험할 때는 아니다. 나 이전의 여성들이 어떻게 이런 일들을 거쳐갔을지, 그때 나처럼 좌절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지는 않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서 다른 남성들과 같이 멀쩡한 척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지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궁금하다. 그리고 늘 더 듣고 싶고, 읽고 싶다. 다른 무언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내가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의 경험을 참고삼아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더 많기에, 나는 더 많은 여성들이 크게 말하고 쓰고 연대했으면 좋겠다. 각자가 가진 무기는 경험이며, 그 경험이 힘이 되기 위해서는 기록되어야 한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세대를 거듭하며 여성들이 거쳐 간 사슬에 엮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겨울의 잿빛 하늘이 보였다. 나는 세상 한 가운데서 불빛 속을 떠다녔다. 

  - <사건>, 아니 에르노 저





 낙태를 합법화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고,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확고하고 신념 강한 사람들이 꼭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그들의 신념이 이 책으로 바뀔 것이길 기대해서가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상상력의 폭을 넓혀서 임신한 대학생의 신발을 신어보는 경험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빈곤한 상상력은 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안 그래도 어려운 삶을 더 각박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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