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은 Mar 26. 2022

영화 <어거스트 버진>을 본 하루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시간에 관한 영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길 원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 아구스틴 가르시아 칼보의 마드리드 찬가 



 오늘은 연차를 내고 영화 <어거스트 버진>을 봤다. 영화도 보고 서점도 가고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식당―고든램지 버거―을 갔다가 마침내 집에 돌아오니, 내가 오늘 하루 내내 집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더 울적했을지, 그리고 얼마나 더 먹기만 했을지 뻔하다는 생각. 





  찌는 무더위가 계속되는 마드리드의 8월, 축제가 열리고 주민들은 대부분 빠져나간 도시에 33살의 여성 에바는 남아있는다. 다른 사람의 집을 빌려 북적이는 도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집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며 수박을 먹으면서 책을 읽기도, 일기를 쓰기도, 길거리에서 열리는 연극을 관람하기도, 집 문을 열지 못해서 오래 연락하지 않던 친구 집에 찾아가기도…. 그러면서 그가 간절히 찾는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이다. 그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또 사색 속에서 그 답을, 그리고 그 답을 마주할 용기를 점차 찾아간다.   





 명상같은 이 영화를 보며 늘 하고 싶었던 세 가지를 내 삶 속에 들여놓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일기 쓰기와 명상, 그리고 여행. 이 세 가지는 모두 마음의 근육을 키우게 해주는 핵심적인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는 여정을 돕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나는 그동안 아침과 자기 전에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일기 쓰기에 소홀했다. 명상은 나랑 맞지 않는 것 같고, 여행은 멀리 갈 기력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의 정원도 방치했던 것 같다. 나는 작은 일에도 심하게 흔들리는, 뿌리가 얕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난 휴식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몇 가지 인상적인 대사들이 있어서 다시 보고 싶다. 요즘은 노트와 펜을 쥐고 영화를 봐야 하나 싶을 정도다. 예컨대 이런 대사가 있었다. 에바는 단 한번도 여름의 살인적인 더위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여름은 완벽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너무 덥기 때문에, 오히려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던 것들, 미뤄왔던 일들을 약간은 힘을 빼고 시도하기에 적절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에바는 미뤄왔던 일―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시도한다. 물에서 편안히 떠다니는 에바, 편히 늘어져 책을 읽는 에바를 보면서 저렇게 마음 편히 쉰 적이 얼마나 됐던가 자문해보았다. 초등학교 방학 이후로는 잘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에바가 무작정 혼자서 쉬는 것만은 아니다.





 에바가 혼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동시에 도시를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점도 흥미롭다. 우리는 내면의 가장 깊숙히 숨겨진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결국 밖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신에 대한 힌트를 얻고, 나만의 고유한 영혼을 대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 때로는 공감하기 어렵고 상처가 되는 말들도 때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에바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스로에게 숨기고 있었던 진실을 담담히 인정한다. 그에게 여행의 시간이 그만큼의 충분한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으므로 그 전까지는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조급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전혀 없다. 꽃은 제 때 피고야 말 것이다.





 이 영화는 여성 영화이면서 성장 영화이고, 보는 것만으로도 휴가를 떠난 것 같은 만족감과 휴식을 선사한다. 마침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서 찝찝함에도 불구하고 연차를 낸 날 이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실은 상영관이 많지 않아 조금 무리를 하면서까지 본 영화였는데, 찌는 여름날 영화관도 가기 힘들 때 VOD로 봐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여름을 미리 체험하는 기분으로, 이런 여름―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을 보내고야 말겠다고 마음 준비를 해놓을 수 있어 지금 이 영화를 만난 것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실적인 사랑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