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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Mar 23. 2022

현실적인 사랑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면 더욱 좋을 영화

"Forgive me for needing you to be strong forever. Forgive me for fearing your unhappiness. As you suffer, so I shall suffer. As you endure, so I shall endure. Hold my hands and walk the old walk one last time then let me go."

―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원제는 <Hope Gap>인 이 영화는 호평이 꽤 많았다. 최근 개봉한 또다른 영화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도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길래 두 영화를 두고 고민했으나, 요즘 들어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는 날들이 부쩍 많아졌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을 보고 싶었다. 노부부가 등장하는 현실적인 로맨스 영화라고 들었고, 내 고민들에 대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싶은 기대가 있었다.




 영화는 29년간 결혼생활을 이어온 부부 그레이스와 에드워드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그레이스에게 에드워드는 형식적인 최소한의 대응만 할 뿐이다. 그는 그 관계에 머물러있지 않다. 그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그레이스는 에드워드를 계속해서 몰아붙이고, 그럴수록 에드워드는 회피한다. 그레이스는 출가한 아들 제이미를 그리워하는데, 이에 에드워드는 다음날 제이미에게 전화를 걸어 주말에 집에 오도록 설득한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에드워드가 그레이스 뒤에서 그레이스를 위해주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것이 그들의 결혼생활의 비법인 것 같지만, 실은 에드워드는 그레이스를 떠나 애인에게 가겠다는 통보를 할 요량으로 그때 그레이스 곁에 있어줄 아들을 불러들였던 것이었다. 남편이 1년간 외도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레이스는 큰 충격을 받고, 이는 제이미 역시 마찬가지다. 그레이스에게 결혼은 깰 수 없는 것이므로 그는 지치지 않고 에드워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관전 포인트는 이것이다. 그레이스는 에드워드가 떠나간 것을 받아들이고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 결혼의 파경은 그레스와 에드워드, 그리고 제이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들의 삶은 각자 어떻게 달라질까…?





 영화를 보는 내내 딱 이 시기에 내가 볼 수 있어서, 그것도 영화관에서 보아서 다행이라고 계속 생각했다. 그래도 VOD로 출시되면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적어놓고 간직하고 싶은 대사들이 많기 때문인데, 아내는 시를 엮어 책을 만드려는 사람이고, 남편은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이므로 더욱 그렇다. 그들의 나래이션이 그렇지 않아도 좋은―영화음악, 대본, 연기, 영상미, 배우 그 모든 구성요소가 훌륭한― 영화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처음 몇 분간은 그저 '문제가 많은 가정'일 뿐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영화로 확장해서 보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아네트 베닝이 맡은 그레이스 역은 지나치게 말이 많은데다가 자기의 의견만이 정답이라고 믿고는 늘상 누구에게나 강요하는 유형의 인물이며, 빌 나이가 맡은 에드워드 역은 그런 아내에게 지친 나머지 대화를 거부하는 데다―물론 그런 그를 그레이스가 가만둘 리 없다―, 설상가상으로 이 사이에는 아들 제이미가 끼어있다. 나는 단번에 결론을 내려버렸다. 이건 문제적인 가정의 모습이며, 아들은 부모님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그만 해야 하고, 불행한 어머니를 그만 찾아가야 하고 자기 삶에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고.





 그런데 영화가 전개될수록 어느 가정이나, 어느 사람이나 그렇겠지만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점차 들었다. 그들의 어려움이 어느 가정에나 있는 보편적인 문제로 보였다는 말이다. 나는 그들의 29년을 통째로 보고 싶었다. 맞지 않는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한 것이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었을까? 그들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까? 아니면 함께한 세월이 너무 길어서―그 세월을 견디는 동안 그들은 처음 시작했던 그들 자신과, 서로의 관계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나온 것일까? 에드워드가 처음부터 앤젤라를 만났더라면 그들은 이 긴 세월동안 내내 훨씬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을 했을까.





 그레이스와 에드워드는 확실히 함께하기에는 너무도 결이 다른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결혼관―그레이스는 결혼이란 어떤 시련이나 감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깰 수 없는 것이라고 강하게 믿었다―이 가장 달랐으며, 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정도도 달랐다. 그러나 둘의 결혼생활이 파토가 난 근본적인 원인은 에드워드가 그들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레이스를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레이스가 그를 더이상 노력할 수 없게끔 끌고 갔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에드워드가 떠나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곁에 있으나 실제로 곁에 있지 않음, 가장 내밀하게 의사표현을 해야 할 사랑하는 사람이 소통을 포기했을 때의 괴로움, 그 소통불가함으로부터 오는 갑갑함…. 그것은 원하는 만큼의 관심을 받지 못한, 한 쪽에서만 붙잡고 있는 관계를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이다. 게다가 그레이스는 사람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으면서 잠자코 있을 수 있는 성향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역시 그 나름대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수 있다. 다만 이제는 너무 지쳐버린 것이다. 1년을 외도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만큼. 나는 그 말할 수 없는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그레이스 앞에서 늘 그 자신이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왔다. 그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레이스에게 늘 정답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으로 정해져있었다. 나는 잘잘못을 가릴 수가 없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럴 때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 모두에게 큰 상처를 주는 잘못을 쉽게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잘잘못을 가리는 게 이 모든 세월이 지난 후에 무슨 의미와 효용이 있단 말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레이스를 얼마간, 또 에드워드를 얼마간 닮았을 것이다. 혹은 어떤 관계에서는 그레이스를, 다른 관계에서는 에드워드를 좀더 닮아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끝까지 관계에 남아있는 쪽이 떠나버리는 쪽보다 더 사랑했을 것이라고. 그러나 떠나버린 쪽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닐테다. 남아있는 사람이 떠날 수밖에 종용했었다고, 적어도 원인 제공을 했다고도 할 수 있겠고…. 그렇다면 왜 남아있는 사람은 떠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는가? 그의 성향 탓인가? 그가 너무 애정을 강요했나? 그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는 그저 사랑했고 사랑한 만큼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제이미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저 갈라져버린 부모의 사이를 잇는 메신저 역할만이 아니라, 부부 못지 않게 이 가족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으로서. 제이미는 한때 분명 사랑했던, 흑백 사진에서 행복해보였던 부모님의 관계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분명 진실이었을 그 감정이 지금은 변질된 것과, 본인이 깨져버린 가정 안에 남겨진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에게는 이 이혼이 부모님의 상황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이며, 개인적인 아픔이다. 그는 이 이별을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겪는다. 둘이 만나 둘 이상이 되는 것, 그것이 결혼이므로.





 제이미가 엄마와 아빠로부터 어떤 특질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 발견하는 것도 영화의 쏠쏠한 재미다. 제이미는 아빠 쪽을 더 닮았고, 그래서 엄마와 애착 관계를 형성하기 더 쉬운 것 같다. 애정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제이미에게 그의 동료는 중요한 지적을 한다. 넌 가끔 멀리 떠나있는 것 같다고. 어쩌면 애인에게도 충분히 곁을 주지 않았던 것 아니냐고. 꼭 에드워드를 닮은 지점이며, 그가 매번 닿으려고 하지만 끝끝내 잘 되지 않은 애인과 잘 되지 않은 이유일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동시에 제이미는 영화가 전개될수록 드러나는 그레이스의 진가, 곧 솔직함과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 그 둘을 쏙 빼닮아 사랑스러운 면모를 드러낸다. 그래서 난 제이미의 미래에 관해 꽤 긍정적이다. 그는 마음을 열지 않는 에드워드의 특성을 쏙 빼닮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한때 사랑이 가득한 가정에 속한 경험이 있다는 것도 내 낙관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는 애정관계 안에 소속된 경험이 있고, 그것을 찾고자 애쓰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도 또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몇 있다. 바로 그레이스와 제이미의 고통, 그리고 그 고통에 이르게 하는 생각이다. 내가 29년간의 결혼생활이 파국에 이른 경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아직 29년도 살지 못한데다 그레이스만큼 누군가를 절절하게 사랑한 경험이 없기에 쉽게 생각하는 탓일지도 모르겠지만―내가 생각하기에 사랑이 끝나는 것은 슬플 수는 있어도 불행한 사건이라기보다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 내가 보기엔,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파도, 관계가 변하는 것은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레이스는 처음부터 에드워드를 만나지 말고, 사랑하지 말았을 걸 후회를 하고, 29년의 결혼생활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고 에드워드를 비난하지만, 결혼생활이 끝이 났다고 해서 지난 세월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둘을 똑 닮은 제이미, 그 시절 행복했던 순간들, 상호 간 오해를 기반으로 시작했더라도 각자에게는 진심이었을 사랑. 그것들은 고스란히 그들 셋 모두에게 속한 것이다. 그건 어디 가지 않는다. 



 


 껍데기뿐인 관계를 이어나가느니―얼마 지나지않아 밑바닥이 드러나겠지만― 혼자서 진실된 삶을 사는 편이 낫다. 그 편이 덜 외롭고, 더 건강하다. 나는 에드워드와의 이별을 받아들인 그레이스가 마음 없이 몸만 집에 있는, 소통되지 않는 에드워드에게 끝없이 물리적·언어적 폭력을 남발하며 자기가 응당 받아야 할 애정을 요구하는 그레이스보다 훨씬 건강해보였다. 그레이스는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레이스는 언제나 진실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므로, 자기가 가야할 길과 그 위에 놓여있는 행복을 찾을 것이다. 인생은 본디 예측불가한 것이지만,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앤젤라가 한 말, 불행한 세 명이 있었는데 이제는 딱 한 명이 남았다는 말에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남의 남편을 빼앗느냐고 물은 그레이스는 그저 돌아선다. 나는 수많은 비난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앤젤라와 에드워드가 이상적인 사랑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드워드는 앤젤라가 그의 팔을 처음 만졌을 때, 어떤 기대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충분한 느낌을 받고, 그것이 사랑임을 깨닫는다. 사랑이란 실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서 이해받으며, 그것으로 충분한 것. 그러나 그 사랑이 부재한 관계에서는 모든 것이 삐걱대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그레이스와 에드워드, 제이미 셋 모두 그 어려운 상황을 그 긴 세월동안 무수히 견뎌왔다. 그렇기 때문에 안쓰럽고,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만도 없기에 마음이 아리다. 현실적인 결혼과 관계에 대한 영화를 보고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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