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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Jan 06. 2022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2022년을 열기에 꽤 좋은 영화

 2022년 첫 영화로 <드라이브 마이 카>를 봤다. 장장 세 시간짜리 영화여서 내 딴에는 꽤 큰 맘을 먹은 거였는데, 적절한 선택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각색된 작품으로,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도 영화에서 큰 역할을 하며 극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영화를 보기 전 이 두 작품을 보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보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영화가 마음에 든 와중에도 세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있는 게 꽤나 고역이긴 했으나, 나는 이 영화가 통으로 좋았다. 지금의 호흡이 딱 좋아서, 어느 장면도 빠지길 원하지 않는다. 감독 인터뷰를 찾아보니, 영화의 러닝타임을 조절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물들의 행동원리를 존중'하다보면 그럴 수 없게 된다고 했다. 이 인터뷰를 읽고는 영화와 감독이 더 좋아졌다. 





 영화는 한 여성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짝사랑하는 남자 집에 숨어들어가는 여학생에 관한 내용이며, 독백같았던 여성의 이야기는 침대에 누워있는 남성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다음날이 되면 여자는 어제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해서, 남자가 고스란히 그 이야기를 다시 말해준다. 둘은 부부이며 여자는 드라마 작가, 남자는 연극 배우이자 연출자이다. 어느날 남편은 출장을 가려다가 비행 일정이 변경되어 다시 집으로 와서, 아내가 바람피는 현장을 목격한다. 조용히 다시 밖으로 나간 남편은 아내에게 이 일에 대해 묻지 않고, 얼마 후 아내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된 남자는 전속 드라이버인 젊은 여성을 만나게 되고, 둘은 한 시간에 달하는 긴 거리를 오가며 서로를 알아가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는 싸구려 위로가 없다. 그렇게 힘든 일을 겪어야했으니 이제 행복만이 남았다거나, 슬픈 과거에 너의 책임은 없다는 말, 너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가혹하다는 식으로 주인공을 피해자인 양 감싸안지도 않는다. 너와 나는 과거에 책임이 있다고 분명하게 짚고 넘어간다. 동시에,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뿐이라고도 말해준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각자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으며, 뼛속까지 악인인 사람도 없다. 이런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것은, 지친 발걸음을 옮기는 마라토너들에게 물컵을 건네는 딱 그 정도의 심심하면서 진실된 위로.





 두 개의 커다란 메세지를 던지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첫째로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가 하는 말이자 한때 집이었던 폐허를 응시하며 두 주인공이 다짐하는 말, 그러니까 기나긴 낮과 밤을 견디며 계속해서 살아가자고. 그리고 둘째로는, 아내와 불륜관계였던 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한 말,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으니 자신을 계속해서 주시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말. 가후쿠는 아내에게 불륜에 대해서 한 번도 제대로 묻지 않았고,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야만 하는 '바냐 아저씨' 역을 연기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달아나고 싶고, 용기가 없어서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등장하는 대사처럼 드러나지 않는 진실이 더 삶을 옥죄는 법이다.





 꼭 영화 전체가 <바냐 아저씨>를 흡수해서 우리 현대인들의 삶에 녹여내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 정도와 방식이 너무나 적절해서, 이 희곡을 언젠가 읽게 될 것만 같다.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연출하는 연극에는 한중일 배우가 모두 등장한다. 모든 한국인 배우의 연기가 좋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박유림 배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수어로만 연기를 하면서도 저런 감정을 전달할 수 있구나, 싶어 다른 작품에서도 꼭 보고 싶다. 같은 언어로 연기하지 않는 연극이 배우들에게나 관객들에게 무리한 시도는 아닐지, 감정과 내용 전달에 덜 효과적이지는 않을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수어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배우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연기해야 하므로 대사를 익히기 위해서 자리에 앉아서 읽고, 또 읽었다. 담담하게 천천히, 큰 소리로 읽는 대사만으로도 울림이 컸던 것을 보면 그만큼 체호프의 희곡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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