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로열 오페라 하우스 60주년을 기념하는 눈부신 쇼케이스
오늘은 설 당일, 기념으로 메가박스에서 인터미션 없는 160분 동안 영국 로열 발레단의 다이아몬드 기념 공연을 보고 왔다. 2시간 40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오늘은 설인 만큼 아침 일찍 요가 원데이 클래스를 들었다. 그리고는 너무 좋은 수련시간을 만들어준 선생님께 감사 인사도 드리지 못한 채로 우당탕탕 뛰쳐나와서 발레를 보러 봉은사로 향했다. 간단하게 요기할 거리를 얼른 씹어먹고는 자리에 앉았다. 우려한 대로 160분은 나에게도 그렇지만 다른 관객들에게도 결코 만만한 시간이 아니었고, 아마도 영화관에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은 분들의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앞자리 인간의 머리통, 요기를 미처 하지 못하여 심하게 부스럭거리며 배를 채우는 분 등등. 관객 매너는 안타까웠으나 무대는 너무나 훌륭했다. 보게 된 게 감사할 정도로. 내가 몹시 감격해하며 본 영화 <댄서>가 생각났고, 사랑해마지않는 세르게이 폴루닌만큼 출중했던 발레리노는 없었지만, 무슨 말이 필요할까. 너무나 훌륭했다.
우선 마음에 들었던 것 첫 번째로, 메가박스 부티크관의 상영 환경을 꼽아야겠다. 내가 다른 영화관보다 메가박스를 찾는 이유이기도 한데, 음향시설이 가장 뛰어나고, 화질과 상영관의 밝기도 적절하며 무엇보다 쾌적하다. 물론, 다른 부티크관을 모두 섭렵해본 것은 아니라 내가 주로 찾는 코엑스 기준이다.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성수점도 상영환경이 매우 뛰어나다고 들었다. 두 번째로, 이 공연의 두 사회자였다. 그 탁월한 진행능력이라니. 특히 여성 사회자는 수석 무용수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아주 도움이 되는 진행자로서 활약했다. 이 프로그램은 총 3막으로 이루어지는데, 3막인 다이아몬드에 이르기까지 아주 완벽한 구성을 띄고 있으며, 막의 시작 전후에 각 무대를 구성한 안무가 등을 인터뷰하며 기획 배경과 과정을 관객에게 도움이 될 만큼 풀어준다. 따라서 무대마다 어떤 점에 주목해서 봐야할지, 어떤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졌을지 상상하며 보는 재미가 있었다.
프로그램의 구성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코벤트가든의 과거와 현재라는 컨셉에 맞게 현대무용과 힙합 등을 접목시킨 구성, 발레리노와 발레리나 각각 4인으로 구성된 무대 등등. 아, 더할 나위가 없었다. 이 무대의 꽃인 3막인 다이아몬드뿐 아니라, 1막 중 감각질과 동양인 무용수가 나온 마농부터 나는 전율했다. 그렇게 관능적일 줄이야. 예전에 강수진 감독의 강연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진행자가 베드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길래 발레로 베드신을 어떻게 표현할까 짐작이 잘 가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 이 프로그램을 봤으니, 내가 지금까지 접한 어떤 매체보다 관능적이로 직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감각질에서 사용된 음악은 때떄로 찾아 듣고 싶을 정도다.
3막에 이르기 전까지는 발레리나가 압도적이었다. 물론 발레리노와 발레리나가 함께 무대를 만들 때, 둘 모두 아름다웠지만 발레리나의 활약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4인으로 구성된 발레리노, 발레리나 무대 각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웃겼던 건, 발레리나 4인의 무대에 대해 인터뷰할 때 수석 발레리나 4명으로 구성된 무대를 구성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수석 발레리나 출신인 진행자가 계속 발레리노 출신의 안무가에게 캐물어 곤란하게 했던 점이다. 그들 모두가 무대에서 가장 빛나고 싶어하는 존재들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는 진행자의 질문에 안무가는 최대한 공평하게 무대를 분배하고, 그들 각자의 탤런트를 빛낼 수 있도록 안무를 기획했다고 에둘러 대답했다. 위기를 잘 모면한 셈이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프로그램의 꽃인 3막에 이르렀을 때, 발레리노가 "찢었다". 그의 이름은 리스 클라크.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발레리나도 몹시 훌륭했지만, 아주 찰떡같이 그 역할에 들어맞았지만, 발레리노는 아주 무대를 날라다녔다. 내가 그라면 참 세상 사는 게 행복할 것 같다. 꼭 신데렐라의 왕자님같이 생겼다.
몸을 잘 쓰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간 얼마나 매일매일 고생하며 수십년을 보냈을지 탄복하며 보았다. 이런 예술을 볼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대를 마친 후 환하게 웃는 무용수들의 표정이다. 그때 그들의 얼굴은 뿌듯함과 자랑스러움, 이 순간을 잘 나누었다는 행복감으로 벅차오른다. 그 얼굴을 보고있자면 나도 그들만큼 행복해진다. 이런 순수한 열정으로 빛나는 이들과 함께 이 별에 살고 있다는 게 너무나 경이롭다. 또 느낀 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동양인 발레리나들에게도 시선이 한번씩 더 간다는 점이다. 확실히 동양인들이 체구가 작고, 선이 가늘었다. 다른 표현을 쓰고 싶은데, 낭창낭창한, 유연한 바늘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국의 땅에서 쉽지 않았을 고생을 견뎌낸 그들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뭐라고! 하여간, 괜히 그런 동질감이 들었다.
또 느낀 점이 있다면, 역시 발레는 타고난 신체,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외모까지도 아주 중요하다는 거였다. 길쭉길쭉하고 선이 고운 몸이 확실히 보기 아름다웠다. 공연예술이니까, 그중에서도 발레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현대무용가가 연출한 현대무용과 발레의 결합은 끝내줬다(무용복이 다소 우리 국기같기는 했다). 그러나 힙합은, 앞으로 그런 시도는 자제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아무 감흥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텐데, 내가 발레를 보러 간 이유는 그런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분명 아니고, 다른 어떤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까 감히 속단해본다. 박수소리가 큰 게 놀라우면서도 다행일 정도였다. 또 아쉬웠던 무대 하나는 베노이트 스완 부페가 연출한 무대였는데, 영 내 눈에 미치지 않는 발레리노 때문이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두 사람이 꽤 원로 발레리노, 발레리나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선과 합은 무척 아름다웠고, 음악도 죽여줬다.
총 87개국의 영화관에서 이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다고 사회자가 언급한 것 같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이렇게 좋은 공연을 손쉽게 볼 수 있다니, 나는 아주 행운아다. 메가박스에게 감사할 지경이다. 목표가 생겼다. 내년 1월 1일에는 반드시 메가박스에서 새해 기념으로 상영하는 오케스트라를 보겠다고. 저녁이 되면 에너지가 빠르게 방전되는 새벽형 인간이라 악수 끝에 포기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자, 이렇게 내년까지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늘 생각하지만, 기다림은 눈부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