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아 몰라, 나는 하루 쉴래.
매번 격조한다.
어제부로 서울독립영화제부터, 지브이는 참석하지 못했던 대전 독립영화제까지 2019년의 영화제 행사를 모두 마쳤다. 알음알음으로 찾아와주셔서 축하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영화제를 마치고 나니, 써야 하는 장편 영화 시나리오들과, 4개월 전부터 “엄마, 나는?”하며 컴퓨터에서 깜박거리는 트리트먼트 두 편이 남았다.
공포스럽다.
나름 올 한 해 바쁘게 보낸 거 같은데 왜 한 게 없지...?
내가 가진 것은 너무 작고, 남은 시간은 너무 짧아서 겨우 온 이 기회가 잡아보기도 전에 떠날 것 같다. 이럴 때 내가 하는 것은 하루 쉬는 것. 하기 싫은 것은 모두 잠시 그만두는 것. 그리고 하나 남은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
그래서 오늘은 치팅 데이다.
다이어트 치팅 데이가 아니라, 혼자 있는 걸 제일 좋아하는 나에게 혼자 있는 자유를 하루 주기로 했다.
Q. 여러분은 다들 어떻게 힐링하세요?
나는 엄청난 집순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질이라는 침대 순이다.
집순이들이 집에서 뭐 그리 할 일이 많을까 싶지만, 혼자 할 일이 정말 많다. 일단 밀린 빨래를 해야 하고, 특히 시트를 빨아야 한다. 이주에는 한번 돌려줘야 하는데 맨날 머리 대면 자느라 요즘 밀렸다. 돌려놓고 커피를 내린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블루투스 스피커로 좋아하는 노래를 하나 튼다. 그럼 소음 플러스 소음 상태가 되는데, 후회하면서 끄고 커피 식을 때까지 샤워를 일단 한다. 안 씻으면 내내 잔다. 하루 쉬는데 이렇게 보내면 나중에 열 받으니까 씻는 건 빨리 씻어야 한다.
그리고 머리를 수건으로 말아놓고 영화랑은 전혀 상관없는 책이나 읽는다. 만화책도 좋아해서 읽었던 만화책을 또 보기도 한다. 오늘은 치팅 데이의 최고봉인 알라딘도 다녀왔다. 사람 많은 곳 중에 내내 있어도 재밌기만 한 곳은 놀이동산이랑 중고서점밖에 없는 것 같다. 한 세네 시간쯤 지나면 행복해진다. 뭔가 좀 채워져서 오늘 하루가 의미 없이 가버리는 것 같은 마음이 들면 또다시 밀린 일중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럴 땐 스물일곱이랑 정말 안 어울리는 유튜브 명상음악이나 틀어놓고 가만히 눈이나 감고 있는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오늘은.
넌 정 가마니야.
되뇌면서,
하루 정도는 아무 말도 안 듣고 아무 말도 안 해야 내일 또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재밌게 들을 수 있다, 세상에는 재밌는 것이 너무 가득한데 나는 그릇이 작은 사람이라 다 담다 보면 자주 넘치고 만다. 그럴 때 이렇게 하루 비워주고 나면 한 일주일은 다시 재밌어진다.
사람마다 에너지 게이지가 다른 것 같다.
누구는 그 에너지를 다른 사람에게서 채우고, 누구는 혼자 채워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므로 이렇게 자주 비워줘야 다시 또 달릴 수 있다. 정산, 시나리오 수정, 트리트먼트 등 이번 한 달 안에 끝내야 하는 일이 올해 중 가장 많은데, 무엇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 전 같으면 꾸역꾸역 맥주 하나 따고 욕이나 하면서 다 했을 것 같은데 요새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덜 찼을 때 자주 비워주면
넘치지는 않는다는 걸 배웠다.
다 차서 내가 넘어져 버리면
꽤 오래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도.
그래서 오늘은
그냥 하루 놀았다.
배달 온 탕짜면 계산할 때 빼곤 묵언수행도 좀 해보고.
너무 좋다.
오늘 하루 기분이라도 좋으면 내일은 열심히 하겠지.
생각보다 밀린 힐링이 많다.
구독 중인 ASMR 아티스트의 새 업로드 동영상도 봐야 하고, 랜선 집사가 되어서 남의 고양이들이 츄르 먹는 것도 봐야 한다. 잘 먹는 것 보고 있으면 괜히 내 고양이도 아닌데 뿌듯해진다. 진짜 고양이를 키워볼까 잠시 고민했다가, 내 생활 패턴에 무언가를 안 죽이고 키우려면 식물도 아니고 돌 정도를 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랜선 집사로 만족하기로 한다. 어른스러운 결정에 뿌듯하다. 몇 안 되는 취미로 꽃을 말리는데, 이번 영화제에서 받은 꽃과 편지들을 정리하고 작은 통에 잘 담았다.
혼자 하루를 다 보내고 나니까 조금 기분이 낫고,
편지들과 잘 말린꽃을 보고 나니 며칠 전까지의 일상들이 다시금 감사해진다.
다들 따뜻한 연말을 보내셨기를.
한 해의 정리가 막막하신 분들은 하루 잘 쉬면서 잘 비우고 다시 채우시기를.
27.9세의 끝에서 0.1을 앞두고 오늘도 잘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