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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Jan 04. 2022

 맛있는 밥을 먹었습니다.

그 시절 나를 자라게 한 밥상과 친구

배가 고팠다.

친구는 장독대로 가 "으~" 하는 소리와 함께 장독에 수북이 쌓인 눈을 밀어냈다. 그리고 뚜껑을 들어 눈이 안 묻게 뒤집어 내려놓았다. 새하얀 세상 속에 감추어져 있던  맛난 주홍 빛이 드러났다. 깍두기다. 손이 시린 친구는 얼른 깍두기를 퍼 담고는 다시 뚜껑을 덮었다.


따스운 방바닥으로 향할 일 밖에 없어진 우리는 동작이 더 빨라졌다. 쌀쌀한 공기를 털어내려 다시 “으~”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집 안으로 종종걸음으로 들어갔다. 밥상 위에 다른 반찬은 없었다. 뜨끈한 흰쌀밥에 깍두기뿐이었다.

밥 한 숟갈에 커다란 깍두기를 크게 한입 베어 물고 아작아작 씹어 먹으면 새콤하고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환상이었다. 그렇게 한 입 두 입 먹다 보면 한 공기가 뭐야 두 공기는 뚝딱 해치웠다.


그해 겨울 나는 10센티가 넘게 키가 자랐다.

밥과 깍두기의 힘일까?    


나는 거의 매일 그 친구네 집에 갔다.

친구가 좋고, 친구가 내어놓는 밥이 맛있었다. 버스 타면 20분, 걸으면 50분 걸리는 먼 거리에 있었지만 해가 뜨고 아지랑이와 함께 추위가 덜해질 무렵이면 일과처럼 친구 집으로 향했다. 친구네 집은 2층에 있었는데 1층에서 올라가는 길이 흡사 미로 같은 것도 나는 좋았다.


한 번은 친구의 남동생이 왜 맨날 자기 집에 와서 컴퓨터를 하는 거냐 투덜거렸다. 컴퓨터는 몇 번 켜지 않았는데 꼭 내가 하고 있을 때마다 그 녀석이 집에 들어왔다. 실은 우리 집에 있는 컴퓨터가 더 사양이 좋았다. 그렇지만 주야장천 자기 집에 와서 놀고, 밥까지 축낸다는 걸 들키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 애써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에 “쟤네 집에도 컴퓨터 좋은 거 있거든?” 하고 친구가 한마디 해주었다.    




우리는 중학교 3학년의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1999년이 끝나고 2000년이 시작되는 그 시절에 티브이와 신문에서는 밀레니엄, 세기말, Y2K라는 단어들로 도배가 되었다. 앞이 2로 시작하는 시대가 온다는 건 사람들에게 흥분되는 일이었다. 갑자기 눈을 뜨면 당장 내일 다른 세상이 열릴 것 같은 걱정과 기대가 섞여있는 느낌이랄까. 다행히 그 숫자의 경계에서의 시간은 아무 문제없이 이어졌다. 내가 좋아하던 조성모 오빠는 가요대상에서 대상을 받았고 2000년 1월 1일 0시가 지나도 컴퓨터는 어떤 오류도 없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간 친구와 나는 새해가 되어 16살이 되었다. 우리의 16살도 새해만큼이나 특별해진 건 없었다. 비디오를 빌려다 보고, 교회에 가고, 팬시점 구경도 했다. 패션 잡지를 훑어보며 이 옷들 중에 골라서 입으라고 하면 너는 어떤 옷을 고를 거야? 난 이거. 너는 그거? 하는 무의미하지만 꽤 재미있는 양자택일을 즐겨했고, 길을 걷다가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같이 노래를 불러댔다. 황금 잉어빵이 붕어빵을 제치고 인기가 치솟을 때라 잉어빵 두 개씩 사서 조금씩 아껴먹으며 넓지도 않은 시골 읍내를 돌고 또 돌아다녔다. 그것도 재미없을 땐 그냥 방구석에 앉아서 우리 오빠, 친구네 언니를 신나게 험담을 하며 시시덕거렸다.     




나는 꽤나 까불거리는 아이였다. 웃음소리도 크고 남들 웃기는 재미로 떠들어대는 스타일이었다. 내 얘기를 듣고 웃는 사람들을 보는 게 큰 낙이었다. 예쁘다는 말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쟤 진짜 웃겨.”라는 말은 내게 가장 걸진 칭찬이었다.  

반대로 친구는 목소리를 크게 내는 법이 없었다. 나와는 달리 진중했다. 마음이 참 따뜻했고 함께 웃을 줄 아는 아이였다. 가끔은 재미를 더할 욕심으로 욕설을 섞는 내게 따끔하게 그러지 말라고 충고해주었다. 흰소리는 해도 쓴소리라고는 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나와는 참 다른 멋이 있었다.


내가 농담을 던지면 그걸 곧잘 이해하고 웃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나는 더 밝았던 것 같다. 아마 내 까붐에 반응해줄 그 친구가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나는 백아절현처럼 영영 까불지 않을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까. 우리는 갑자기 동시에 같은 소절의 노래를 불러 서로 통했다며 놀라기 일쑤였고 서로를 반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린 제법 달랐지만 잘 어울렸다. 흰밥과 깍두기처럼.

굳이 고르라면 우리 둘 중 누가 흰밥이고 누가 깍두기였을까?    

우리는 이성친구에 눈 뜰 때도, 수능을 볼 때도, 대학생이 되어 진로 고민을 늘어지게 할 때도 함께했다. 서로 자신의 세상을 찾아가는 길에 든든하고 따뜻한 응원군이 되어주었다. 우린 그렇게 함께 자라 갔다.  


이제는 마흔에 가까워진 나이를 하고서 사는 나의 삶에 그 친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친구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수도권에 사느라 나와의 왕래가 줄어들었고, 각자의 삶을 살아내며 깊어지느라 예전처럼 서로를 챙기기 힘들어진 탓이다.


김장철에 큼직큼직하게 썰어 담그는 무김치를 볼 때면 나는 다시 그 장독대 앞에 서있는 기분이 들곤 한다. 같이 밥을 먹는 것 아니 이제는 얼굴을 마주 보는 것조차 어려워진 그 친구는 우리의 시간을 추억할까? 설령 잊었다 해도 나는 추호도 섭섭하거나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의 우리와 깍두기’는 여전히 내 안에 있으니까.


그래도 언젠가 친구에게 쌀 한가마 꼭 갚아주어야지.

신세 많이 졌노라고 넌 참 좋은 아이였다 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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