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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Jan 19. 2022

다시 시작하는 중입니다 #6화

출산까지는 아직 두 개의 관문이 남았습니다.

산모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임신 중후반부로 갈수록 아기가 커지면서 골반에 무리를 준 탓에 치골이 쩍 하고 갈라질 것 같은 통증이 생겼다. 아래쪽으로는 더 이상 공간이 없어서 위쪽으로도 불러오기 시작한 배는 갈비뼈 밑이 얼얼하게 아파오기도 했다.

주수가 찰수록 눕는 것도 부대끼고, 앉아있어도 힘들고, 엎드려있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편한 자세가 없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그 괴로움은 출산을 해야 끝이 나는 법이기에 어서 아기 낳을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아 물론 극강의 입덧도 여전히 그 기다림의 이유이기도 했다.


출산예정일은 10월 3일이었다. 그러려면 임신기간 중 가장 혹독하고 치열한 8월을 견뎌내야만 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나에게 닥친 시련은 8월의 무더위나 불어닥치는 태풍 따위가 아니었다.




퀘스트 2: 당신은 완전 전치태반입니다.

30주 차를 지나며 진료를 받으니 태반이 아래에 있어서 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 같다는 소견이 있었다. 위치가 변할 수도 있다는 희망과는 달리 나는 결국 완전 전치태반 판정을 받게 되었다. 싱글이던 시절 동료에게서 출산 경험담을 들으며 접했던 무시무시한 단어를 내가 듣게 되다니.


"네? 완전 전치태반이요? 그거 제 기억에... 그거 진짜 위험한 거라 했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전치태반은 다소 위험요인이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자궁 위쪽에 자리 잡아서 탯줄을 통해 아기에게 산소와 수분, 각종 영양분을 공급해야 하는 태반이 자궁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렸기 때문에 자연분만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전치태반 설명도(출처: 서울아산병원)


"네? 수술해야 한다고요? 애 둘은 자연 분만했는데 이제 와서.... 배를 째얀다고요?"


 자궁이 열리면 태반이 먼저 떨어져 나와 아기에게 산소공급이 불가하고, 출혈이 커서 산모인 나와 아기 모두 위험에 빠지기에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수혈이 필요한 상황에 대비해야 하므로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마주했다. 담당의사(이 지역에서 예수님으로 불리는 분)는 역시나 인자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실력도 인품도 좋으신 선생님이 계시니 수술 잘 받으면 괜찮을 거라 다독여 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멍한 상태에 이미 내 손엔 소견서가 들려있었다.


하필 그 시점에 전공의 파업과 여름휴가철이 겹쳤다. 코로나는 여전히 일상을 흔들어대고 있었고 의료공백 등으로 인해 진료예약도 겨우 이루어져서 1달 후에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사이 나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걱정들 사이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초록창에 완전 전치태반을 검색했던 것이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전치태반이 예후가 좋지 않아서 결국 자궁을 적출하는 사례도 있다던데 나도 그러면 어떡하나. 병원에 인력이 없어서 진료를 못 받는 경우들이 뉴스에 보도되는데 이러다 재수 없이 나도 거부당하는 건 아닐까? 아기랑 나는 어쩌나 하며 전전긍긍했다.




퀘스트 3: 당신은 재무감사를 수감하셔야 합니다.

나의 직장은 매년 3년마다 재무감사를 받는다. 회계업무의 전반을 처리하는 나는 당연히 재무 감사의 중심에 있게 된다. 감사를 받기 전 전반적인 수감자료를 준비하여 공문을 발송하고, 미비된 부분들은 없는지 확인해 보완하고, 감사장을 준비하고, 감사기간 동안 감사관들의 자료 요구와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다.


임신한 몸으로 야근하며 자료를 준비하고 3일간 감사를 받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지인들은 출산휴가를 좀 더 일찍 들어가는 것을 권하기도 했지만 내가 했던 일을 남(후임자)이 수감받게 하는 것은 여러모로 내키지 않았다. 칭찬받는 것은 고사하고 매를 맞더라도 스스로 맞는 게 더 낫지 싶어 최대한 버티기로 했다.


감사일이 되었다. 몸이 한층 묵직해지고 발목까지 시큰거리는 상태로 뒤뚱뒤뚱 걸으며 감사장을 오갔다. 긴장한 탓에 배가 뭉쳐 배를 쓰다듬으며 일을 하기를 반복했다.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 하는 마음으로 대기하는 것은 참 쉽지 않았다. 그래도 신규 때 혼나듯이 감사받던 시절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할만하네 하는 여유까지 떨었다. 이런 걸 오두방정이라고 하나.


변수는 언제고 발생한다. 일들을 참 잘 처리했다는 칭찬을 받고 얼떨떨했던 감사 마지막 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잘못 처리한 것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내가 맡다가 몇 달 전부터 다른 직원(신규직원)에게 넘긴 업무였기에 굉장히 상황이 난처하게 되었다. 관련된 중간관리자는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발뺌하였다. 감사장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식어갔다. 관련자들 안색도 역시 그러했다.


주장과 변명, 책임과 회피 사이를 오가는 말들 속에서 결국은 그 건은 지적사항이 되었고 사무실은 담당 신규직원이 억울하게 되었다는 분위기에 에워싸였다. 전반의 회계 업무를 하고도 지적사항 없이 칭찬만 받은 나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안 좋은 시선이 있었고....

결국 '쟤가 하나도 안 걸린 건 좀 그렇지 않아?'라는 말을 들어버린 그날 이러려고 감사를 받고 출산휴가 들어가려 한 게 아니었는데 하는 괜한 회의가 들었다. 함께 한 직원들과 이심전심으로 힘든 시기를 잘 버텨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나 싶고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누군가의 평가와 상관없이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업무를 해왔고, 내 자리에 있는 목적을 충실히 이행해 왔는데 돌연 그 모든 것을 부정당한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겉으로는 괜찮은 듯 웃으며 지내다 나는 출산휴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요즘 표현으로 '마상'을 입은 채로.


8월의 퀘스트는 내게 너무 빡쎘다.

자., 그럼 이제 출산만 남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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