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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 정말 미쳤어

한 달 유럽 여행기 1화, 딸네 집 간다더니, 그 뙤약볕에


“여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미쳤었나 봐. 그 뙤약볕에 매일 2만여 보를 걷다니, 그러고도 안 아프길 바랐다니.”



지난 한여름 한 달간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후유증은 심했다. 근육통에 여기저기 아프고 병원을 한 달여 다녔다.  

   

딸이 코로나 절정의 시기에 결혼했다. 혼자 트렁크를 질질 끌며  벨기에로 날아가서 단둘이 시청에서 치른 결혼식이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사위의 부모님도 펜데믹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4년 만에 딸부부를 만나러 가는 여행이다. 


유럽 가는 길에 사돈과도 만나고, 여행도 하자했다. 나는 더우니까 북유럽을 가보면 어떻겠냐고 했고, 남편은 회사 재직시절 수많은 나라들을 출장 다녔지만 이탈리아는 가볼 기회가 없었다며, 이탈리아에 가고 싶어 했다. 딸이 모든 스케줄을 짜서 준비를 했다. 

우리 부부는 요즘 유행하는 숏 영상의 ‘부모 모시고 해외 여행하기 에피소드’의 한국 부모답게 아무 준비 없이 비행기를 탔다.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에 내리자 놀라울 정도로 날씨가 매우 시원했다. 푹푹 찌는 한국에서 선선한 가을로 이동한 기분에 세상 살 것 같았다.

딸 부부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마중을 나왔는데, 온 김에 바로 네덜란드 여행을 하고 벨기에 집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14시간을 불편하게 날아온 터라 좀 쉬고 싶었지만,  2박 동안 네덜란드 소도시를 구경했다. 치즈마을과 풍차마을은 테마화된 관광지로 텔레비전에서 본 치즈 경매시장과 풍차마을은 네덜란드만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벨기에 딸네 집에 도착해서 사는 모습을 보니 대견스러웠다.

딸 부부는 부부방을 엄마 아빠에게 양보하고 그들은 이층 게스트룸을 쓰겠다고 했다. 미안하기도 하고, 부모가 이층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도록 배려한 사위가 고마웠다. 

    

사위는 아침이면 일어나 모닝커피를 내려주고 딸과 함께 식사 준비를 하고 식탁 뒤처리까지 둘이 모두 했기에, 우리 부부는 편히 앉아서 호사를 누렸다.      

남편이 특히 행복해했다. 매일 강의다, 수업이다, 뭐다 하며 나가는 아내에게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한을 여기서 푼다며, 엄살을 떨어 눈을 한 번 흘겨주었다.

‘아니, 여보세요, 지금 어느 시댄데 아직도 아내가 차려주는 밥만 먹으려 하슈? 당신 회사 다닐 때는 꼬박 차려 줬수.‘  


여기까지 우리의 일상은 평범했다.

   

딸네 집에서 며칠 묵고는 바로 남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드디어 매일 2만 여 보의 한증막 속 극기 도보 강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남부 프랑스와 모나코까지는 사위도 함께 하기로 하고, 심하게 더위를 타는 사위는 이탈리아가 너무 더워서 못 가겠다고 하여 우리 셋만 다니기로 했다.

(사위야, 너의 결정은 옳았다.)  

   

딸이 프랑스 남부에서 대학교를 졸업했고 니스와 칸느에서 인턴십을 했기에 남부 프랑스의 소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누누이 들었다. 오랜만에 니스를 다시 찾은 딸은 감회가 깊은 듯했다.

 



니스의 거리는 세상 더위, 덥다, 더워!

네덜란드나 벨기에와 영 딴판인 날씨, 한국보다 더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으로 보던 눈부신 바다와 햇살이 부서지는 듯, 화사하게 빛나는 공기와 도로의 이국적인 풍경은 더위를 충분히 참아내게 했다. 

해변의 피서객들, 도로의 자전거 행렬, 어머, 이 더위에 조깅하는 사람들, 도로변의 아름다운 호텔들, 레스토랑, 한가히 걷는 관광객들, 그래, 이 모습이야, 상상하던 장면. 

    

그러나,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달려간 바다에서 검정 자갈돌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어 놓을 때마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자갈과 함께 지르밟아야 했다.

나만 그렇게 아팠을까? 좌우를 둘러보아도 고통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서양인들은 가파른 자갈 해안을 가볍게 뛰어 내려가고 올라오는데, 난 바다로 내려가는 자갈을 밟을 때마다 으윽 거렸고, 바다에서 해안으로 올라올 때는, 경사는 또 왜 이리 심한 건가? 

한 발짝을 떼면 한 다리가 자갈에 스르륵 파묻히고, 간신히 한쪽 발을 빼어내면 반대쪽 발이 자갈 속으로 다시 빠져들어 가는 악순환과 함께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고통은 발바닥뼈가 시리고 아리고 허리까지 아팠다. 그때 내 모습은 정말 목불인견이었으리라. 

세상 예쁜 자갈

그려, 니스 해안은 500미터 멀리에서 보아야 했어. 



    

니스를 시작으로 칸느, 모나코, 이탈리아로 뙤약볕 아래서 매일 2만 여 보의 행진이 이어졌다.

     




여행 출발 당일 새벽까지 귀국 후 바로 있을 수업 준비해 놓고 비행기를 탔고, 역시 한국 도착 당일은 밤을 새우며 짐 정리를 했다. 이거 병인 거 나도 안다.

그리고 진짜 병이 났다. 당연한 수순인 것을, 내 나이를 잊고 나를 몰아붙인 값이다. 한 달간 약을 먹으면서 끙끙거리면서도 일정을 소화했다.


그런데 말이유, 우리 딸네집 간다고 한 거 아니었수? 여행하러 간거유? 
여행도 여행 나름이지. 
아침에 눈뜨면 나가서 뙤약볕에 오밤중까지 걸어다니고, 우리가 몇살이유?
일흔에 예순일곱이유.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다음 여행기 2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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