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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잎싹은 나였다

너무 유명하고 알려진 책은 나도 읽었다고 착각하는 일이 있다.


아이들에게 옛 고전 제목을 물어보면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내용을 이야기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면 우물쭈물한다. 언제 읽었냐고 하면 어린이 집에서 혹은 유치원에서 들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요즘 아이들이 고전을 안 읽는다며, 어릴 때 그림책이나 요약본으로 읽고 그 고전은 다 안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에게 <마당을 나온 암탉> 이 그렇다.

너무 익숙한 제목에 심지어 애니메이션도 본 적이 없고, 요약본으로도 본 적이 없으면서 대강 아는 이야기겠지 했다. (아, 부끄러워.)


일주일에 한 번 어린이 책 모임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 황선미 작가의 책을 선정한 것이 바로 <마당을 나온 암탉>이다.


책을 들고 카페로 향했다. 

앉아 읽으며 페이지를 넘길수록 주인공 잎싹에 빠져들었다.

잎싹은 나였다.


잎싹은 양계장 뜬 장 철망 케이지 안에서 날개 한 번 푸덕거릴 수 없고 알도 품어 볼 수 없이, 매일 알을 낳아야 하는 난용종 암탉이다.

그리고 매일 철망 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밖을 보는 바람에 잎싹의 목덜미는 털이 듬성듬성 빠져 왜소해 보인다.

 양계장 문이 잘 맞지 않아서 생긴 문틈으로 내다본 어느 날, 마당에서 암탉이 작고 귀여운 병아리를 까서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날 이후 잎싹에게 소망이 생겼다.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


잎싹은 처음부터 잎싹이 아니었다. 스스로 지어 부른 이름이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아카시아 꽃을 피워내고 떨어진 뒤에는 거름이 되는 잎사귀. 잎사귀가 되고 싶은 잎싹.


잎싹의 소원은 마당 식구들의 일원이 되고 싶은 것.

 

관상용 토종닭인 늠름한 수탉과 그 곁에 암탉, 오리들, 그들을 지키는 늙은 개가 있는 그 마당으로 가, 그들의 구성원이 되고 싶은 잎싹.


잎싹이 마지막으로 낳은 알의 서사는 충격적이다.

농장주의 손에 닿자 알이 물렁하게 들어가며 잔주름이 잡힌다. 껍데기도 없이 나온 알이다. 농장주인이 마당으로 휙 집어던지자 땅바닥에 퍼진 알을 늙은 개가 얇은 막까지 핥아먹는다.


'잎싹은 울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뻣뻣해진다. 눈을 질끈 감는다. 눈물이 흘렀다. 처음 흘린 눈물이다. 진저리 치며 생각한다. 절대로 알을 낳지 않겠어. 절대로!' p18

책 속의 문장을 줄여 옮겼다. 이런 절절한 아픔이라니.


'언제나 알을 품고 싶었지. 꼭 한 번만이라도. 나만의 알, 내가 속삭이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아기. 절대로 너를 혼자 두지 않아.'p23



동물 복지, 케이지 안에서 평생 살며 알을 낳아야 하는 닭의 생존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가 하면 모성애, 아, 계속되는 유산으로 좌절 속에 있는 난임부부의 고통까지도 연결된다.

양계장에서 폐계가 되어 웅덩이 버려진 잎싹은 운명의 인연이 될 청둥오리의 도움으로 구출되고, 끈질긴 악연의 족제비로부터도 도망칠 수 있었다.

그토록 소원이었던 마당이었지만 마당 식구들의 철옹성 같은 텃세에 온갖 수모를 겪는다.

수탉은 잎싹에게 강하게 잘라 말한다.

"아무도 널 원하지 않아."-p44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무도 날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외롭고 추웠던 유년과 청소년 시절.





양계장 난용종에서 마당으로 다시 들로 나가는 잎싹의 삶은 파란만장하지만 주도적이고 강인하다.

간절히 원했던 마당을 떠나 들판으로 나온 잎싹은 족제비로부터 위험은 있으나 날개를 퍼덕일 수 있고, 싱싱한 먹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갑갑했다. 

'들판을 쏘다니고 싱싱한 먹이를 찾는 일밖에는 할 게 없는 생활이 철망 생활과 별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p56



일본에 가서 처음 몇 해 동안 난 할 일이 없었다. 언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동네 아줌마들과 취미 활동을 하고 손으로 만드는 것들에 새록새록 흥미를 느꼈다. 스포츠센터에 등록하고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바로 달려가서 오후 4시까지 종일 운동을 했다.  몸에 변화가 오고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에 만족했다. XL에서 M사이즈로 변했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차 마시고 행복했다. 

평온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허감에 마음이 스산했다. 무언가 마음 한 구석이 외로웠다.

난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난 만족을 모르는 사람인가?

딸에게 카톡 폰으로 내 마음을 털어놨다.

딸아이의 반응은 차가웠다.

세 아이를 기르는 육아 맘인 딸은 친정 엄마의 말이 배부른 응석 같았나 보다.

"엄마, 아이들 다 길러놓고 부부끼리만 살며 자기 취미 생활하고, 운동만 하고 사는 게 힘들다고 하면 어느 누가 그 말 곱게 들을까? 난 애들 밥 해 먹이고 라이딩하고 정신없어, 엄마."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육아에 정신없는 딸아이는 친정 엄마라는 사람이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전화 걸어 징징대며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느껴 거북했나 보다.

복에 겨운 철부지 엄마가 되었다.


난 복에 겨웠을까?

잎싹이 먹을 것이 풍성한 들판에서 먹이를 해결하자, 그 기쁨도 잠시, 먹이를 찾는 일 밖에는 할 게 없는 생활이 철망 안에서 알만 낳던 생활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잎싹이 원했던 것은 무얼까?

소망이 있는 사람, 꿈이 있는 사람은 들판을 쏘다니면서  싱싱한 먹이만 찾아다니는 삶에 가슴이 갑갑해지는 거다. 불안해지는 거다.


난 보람 있는 삶, 성장하는 삶을 꿈꾸었던 거다.




잎싹이 누구의 알인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원했던 알을 품게 되고, 자신의 주위를 맴돌며 잎싹에게 공포와 죽음을 예고하는 족제비, 그리고 자신을 족제비에게 내어주면서까지 알을 품고 있는 잎싹을 지켜주려 했던 청둥오리, 나그네의 비밀,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된다.


드디어 알에서 아기가 태어나고 잎싹은 자랑스레 마당으로 가지만, 마당 식구들에게 역시 외면당하고 차가운 멸시와 냉대만이 있다.

게다가 주인부부는 돌아온 잎싹을 끓여 먹고, 잎싹의 사랑스러운 아기가 날지 못하도록 날개 끝을 자르겠다고 한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어!" p104


잎싹과 어린 초록머리(아기 오리에게 입싹이 지어준 이름)에게 광야의 삶이 시작된다. 

늘 배고픈 족제비가 주위를 맴돌고 있다.

초록머리를 돌보고 지키며 살아가는 잎싹은 힘들지만 행복하다. 


시간이 흐르고 자기 정체성 혼란 속에 외로운 초록머리는, 어느 날 집오리 무리가 있는 마당으로 가겠다고 한다.

"마당에 간다고 해도 외로울 거야. 너는 특별하거든. 마당 식구들이 너를 받아 줄 리 없어."



자녀가 사춘기가 되어 엄마와 잦은 다툼과 갈등이 생길 때 엄마들은 무척 초조하고 서운하고 서럽다. 주변에서 사춘기 자녀를 둔 엄마들이 하소연한다. 

"아이가 저러지 않았어요. 사소한 말에도 충돌할 때 마음에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요."

"벌써? 그랬구나.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결혼시켜 봐 그땐 진짜 더 아파요."


자녀가 결혼할 때 또 그렇더라. 그런데  손주가 생기면 또 또 더 그렇더라.

물론 손주가 생기면 예쁘다. 그건 상상 이상이다. 그런데 말이다,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서운함이 문득문득 생긴다.

'할말하않'




드디어 초록머리의 족속들이 하늘을 덮으며 날아왔다.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이제 초록머리를 보내야 할 때이다. 입싹은 날개를 벌려서 초록머리를 꼭 안는다.

'소중한 것들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입싹은 모든 것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야만 했다. 간직할 것이라고는 기억밖에 없으니까.' p162




초록머리가 자기 족속의 일원으로 들어가 파수꾼으로 임무를 훌륭히 하고 있을 때도, 잎싹은 그 주위를 늘 맴돌며 살고 있다.

어느 날 초록머리를 사냥하려는 족제비를 발견한다. 긴박하다. 초록머리를 살리기 위해 족제비의 새끼가 있는 굴로 달려간다.

족제비의 새끼를 인질로 초록머리의 생명을 협상할 때 주고받는 대화가 마음에 남는다.


"나는 평생을 너한테 쫓기면서 살아온 기분이야. 지치고 슬픈 적이 많았어."

"믿을 수 없어. 너처럼 운 좋은 암탉이 또 있을까? 나는 번번이 너를 놓쳤고, 너는 그동안 많은 일을 했잖아. 나야말로 지쳤어.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따라다녔으니 오죽하겠어."p182



언젠가 후배가 한 말이 생각난다.

"언니는 원이 없을 것 같아.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고 있잖아."

타인의 눈에 내가 그렇게 보인다는 것에 한참 놀랐다.

'헉, 그렇게 생각해? 난 뭐든 저절로 되는 일이 없었어. 남들보다 백배는 발버둥을 쳐야 했고, 지지해 주는 사람 한 명 없는 내 인생이 참 외롭고 험하다고 생각하는데. 뭐든 내 땀 흘리지 않고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없어. 힘들고 지치고 문득문득 슬픈데. 나 정말 힘들었는데.'

마음이 아우성쳤다.



주위 사람들이 말한다.

"어쩜 그렇게 많은 일을 하세요?"

망설임 없이 답한다.

"내 에너지의 원동력은 외로움과 결핍이에요."




죽기 전 잎싹이 독백처럼 중얼거린다.

알을 품어 병아리를 품에 안아보고 싶은 소망, 그 한 가지 소망이 있었고 이루었다고. 고달프게 살았지만 행복하기도 했다고. 소망 때문에 지금까지 살았다고. 이제는 날아가고 싶다고. 미처 몰랐다고. 왜 한 번도 나는 연습을 하지 않았을까. 몸이 원하는 것, 바로 날고 싶은 것이었다고.


마지막 페이지는 마치 영화 엔딩 크레디트처럼 화면이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눈발이 흩어지고 잎싹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눈발은 아카시아 꽃이 되어 떨어진다. 


 잎싹의 영혼은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올라 족제비의 입에 물려있는 비쩍 말라 축 늘어져 있는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마음에 시린 멍울이 걸려 한참을 책을 노려보고 앉아 있었다.

눈이 따끔거리고 시려서 더 그렇게 앉아 있었다.



'장소가 바뀔 때마다 잎싹은 원하는 것을 얻고 , 더 자유로워지고, 더 강해집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죽음의 위협도 따라옵니다.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법이지요.
.
.
소망은 그렇게 혹독한 자리에서 싹트고 자라나 꽃 피울 때 더 아름다운 법이지요.'

-김서정 아동문학 평론가 추천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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