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구직 활동을 오래 했던 탓인지 어떤 행동이든 라벨을 붙이는 버릇이 생겼다. 이력서를 쓰는 행위는 가치 있는 행동. 노력하지 않고 놀고 있는 행동은 의미 없는 행동.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모든 행동과 경험을 가치와 평가에 연결시키는 냉정한 사회의 척도에 나를 맞추려 노력한 때문인지 매번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의 연속인 나날이었다.
다행히도 당분간 일할 곳을 찾은 나는 차츰 그런 라벨링을 잊어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여느 날과 같은 밤. 나는 잠들기 전 샤워를 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씻는다는 건 비우는 걸까? 채우는 걸까? 미처 잊지 못한 라벨링 습관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씻는다는 건 몸에 있던 더러움과 함께 그날의 피로를 물에 흘려내리는 것이니 비우는 것이겠지. 나는 그렇게 여러 행위에 비우거나 채운다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밥을 먹는 것은 몸에 영양소를 채우는 것이니 채우는 것. 운동을 하는 건 몸의 지방을 태우고 근육을 파열시키니 비우는 것이겠네. 그럼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장은? 일을 한다는 것은 비우는 걸까? 채우는 걸까?
처음 든 생각은 뜬금없지만 월급루팡이라는 단어였다. 월급루팡들에게 있어 일이란 비우는 것이겠지? 뇌를 빼고 다녀야 그들에겐 이득일테니까. 그럼 나에게 일은 무엇일까. 샤워기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물방울들이 자아내는 소리를 들으며 이리저리 고민을 이어갔다. 그러다 결국 나만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일은 채우는 것이다.
우선 일은 우리의 통장을 채워준다. 속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스스로를 지키기에도, 주변이나 가족을 지키기에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일은 우리로 하여금 지식이나 경험 등을 쌓아 경력을 채워준다. 그 경력이 얼마나 충실한 것일지는 여러 변수가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채워지는 것이다. 또 보람을 채워주기도 한다. 내가 하는 행동이 어딘가에 기여하고 있다는 체감은 스스로를 긍정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일은 피로와 스트레스를 채워준다. 꼭 긍정적인 게 더해질 때에만 채워진다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가 이렇게 샤워를 하며 흘려보내고 있는 피로와 스트레스 중 대부분은 직장에 일을 하러 가고, 열심히 일을 하고, 이후 집에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얻은 것이다. 우리는 마치 기분 좋기 위해 술을 마시고 다음날 숙취를 얻듯이 일을 통해 보람과 스트레스를 동시에 얻는다.
그럼 오늘도 출근하기 싫다고 중얼거리며 일터에서 하루를 보낸 나는 대체 보람과 스트레스 중 어떤 것을 더 내게 채웠을까. 질문할 거리도 아니다. 일은 채우는 것. 그리고 일로부터 어떤 것을 더 많이 채우게 될지에 따라 얻는 만족감이 달라지리라.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샤워기가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일'이라는 평생 짊어져야 할 숙제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생각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