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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다리 내 놔 전설의 고향

너와나의 소녀시대(13)

by 김민정

선풍기처럼 달콤하면서도 두려웠던 존재가 하나 더 있었는데 이는 바로 <전설의 고향>이다. 너무나 보고 싶지만 너무 무서워서 도중에 눈을 감아야 했고, 대부분은 졸음이 몰려와 끝까지 보지 못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1977년 <마니산 효녀>로 시작한 전설의 고향은 호러가 많기는 했지만, 전국 각지의 다양한 전설들을 소개하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1979년에 방영된 <이어도>는 제주도에 사는 한 여인이 이어도에 갔다가 돌아왔더니 이미 여러 해가 흘러버린 스토리이다. 1981년에 방영된 <저승화>는 영혼을 호리병에 담아가는 저승사자가 나타나 죽음을 예고한다는 줄거리다. 무더위 속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전설의 고향>을 보던 아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다음날 곧장 유행어가 된 “내 다리 내 놔”, <덕대골> 편. 스토리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인공을 좀비처럼 쫓아다니며 가져간 다리를 내 놓으라는 절규는 무시무시했다. 다 커서 알아본 <덕대골> 스토리는 이러하다. 병에 걸린 남편을 위해 매일 기도를 하는 아내, 남편이 낫지 않자 아내는 스님을 찾아가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스님은 “박달산 덕대골에 가서 죽은 지 사흘이 채 못 된 시체의 다리를 잘라 고아 먹이면 지아비의 병이 낳을지도 모른다”고 전한다. 아내는 고민에 빠지지만 결국 덕대골을 찾아간다. 덕대골은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들을 상도 치르지 않고 묻은 곳이다. 아내는 하필이면 천둥 번개가 치는 밤에 덕대골에 찾아가고, 아이들은 천둥 번개 소리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실눈을 뜨고 이 프로를 지켜봤을 게 분명하다. 아내는 어둠 속에서 다리 한 쪽을 얻는데, 다리를 자르자마자 시체가 “내 다리 내 놔”라고 소리를 치는데 아내와 시청자들은 이 순간 까무라치게 놀랐을 터이다. 아내는 그 상황에서 잘라낸 다리를 들고 이리저리 도망을 쳐서 간신히 집에 돌아온다. 물론 시체도 그녀를 따라 집까지 온 상황이다. 그 상황에서 다리를 달여서 남편 앞에 탕으로 대령한 아내. 남편은 그 탕을 마시고 씻은 듯이 나았다. 그리고 아내는 자신의 죄를 남편에게 고백하고, 남편은 아내의 잘못을 용서한다. 대체 왜 다리가 잘려나간 시체가 아니라 남편이 죄를 사하는 것일까? 이런 유교적인 사상들은 설화인만큼 매회 등장한다. 남편에게 진실을 말하고 죄를 용서받은 아내. 남편이 잘 찾아보니 아내가 끓여준 탕은 산삼탕이었다. 즉 아내가 자른 것은 시체의 다리가 아니었고 산삼이었던 것이고, 스님 또는 부처님은 아내의 지아비 사랑을 확인하고자 시험에 들게 한 것이었다. 즉 아내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남편을 구한 것이다. 인류애보다 남편을 존중하고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아내상을 구현한 것이다. 1989년에 방송된 <전설의 고향> 마지막 편은 <왜장녀>의 이야기이다. 김진사 댁 하녀인 왜장녀는 몸집이 크고 힘이 장사다. 웬만한 남자 셋쯤 거뜬히 이기고도 남는다. 왜장녀는 시집따위 가지 않고 평생 김진사댁 마나님을 모시고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부추김으로 인해, 주모의 소개로 좀도둑이자 회자수였던 남자와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된다. 회자수는 왜장녀를 보고 황소 같다며 잠자리를 피하고, 박대한다. 그리고 그녀가 김진사댁 마나님에게 받은 300냥을 들고 도망을 쳐 버린다. 얌전히 도망만 치면 그만일 텐데, 왜장녀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여우 귀신이 나오는 산에 왜장녀를 버리고 간다. 왜장녀는 여우 귀신을 만났으나 여우의 아들을 찾아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산 속에서 무사히 빠져나왔고, 원님이 연 씨름대회에 나가 황소를 타서, 그 황소를 산신령에게 바치고 여우 아들을 찾아주는데 성공하고, 고운 마음이 원님을 감동시켜, 원에서 일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도 개과천선하여 함께 아내의 일을 돕게 된다. 왜장녀는 그 시절 단어로 노처녀, 요즘 말로 자발적 비혼 선택인이다. 일을 잘하고 일하는데 보람을 느끼는 그녀는 왜 시집을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남편이 되기 전 회자수를 논에 꽂아버렸던 왜장녀는 회자수가 남편이 되자 온갖 구박에도 좀처럼 화를 내지 못한다. 게다가 산신령이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하니, 남편에게서 벗어나겠다고 말하기는커녕, 남편이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빈다. 요즘 시대였다면 왜장녀는 김진사댁에서 평생 일하며 살았을 것이다. 김진사댁 마님은 그녀를 존중하고 월급도 잘 챙겨주는 좋은 고용주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전설의 고향> 속 아내들은 지극정성이고, 그 지극정성으로 <덕대골>처럼 남편의 육체를 구하고, <왜장녀>처럼 남편의 인간성을 구한다. 신하는 임금을 섬기고 아내는 남편을 섬긴다는 가부장제의 가치관과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보편적인 권선징악의 가치관이 아직 남아있던 1989년을 끝으로 <전설의 고향>은 막을 내린다. 이 또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발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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