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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명

김민정의 일상다반사(1)

by 김민정

20대 시절, 6년을 사귄 남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옆집에 사는 여자다”라고 했을 때,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 살다 보면 그렇게 황당한 일이 생기는 법이다. 나의 중학교 동창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복병이 있었구나.”


복병 (명사)

(1) ‘군사’ 적을 기습하기 위하여 적이 지날 만한 길목에 군사를 숨김. 또는 그 군사.

(2)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경쟁 상대.


적을 기습하기 위해 숲에 엎드려 숨죽이고 숨어있던 병사가 내 앞에 나타나 나의 연인을 빼앗아 가리라고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탐낼 만한 재목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그 복병에게 당한 것은 나였을까? 꼭 그렇지 만도 않다. 결국 그는 옆집 여자와 헤어졌고 옆집 여자는 그의 사촌동생과 결혼했다. 믿거나 말거나.

여하튼 삶에는 타인이 나를 해치기 위해 보낸 복병이 있는가 하면, 내가 숨겨두었거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숨겨둔 복병도 있는 법이다.


2021년이 막을 내리려던 날, 나는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김ㄷㄱ 씨를 아시나요? 혹시 그를 아신다면 제가 전화를 걸어도 될까요? OO병원의 간호사입니다.”


내 마음 속에는 여러가지 불안한 감정들이 숨어있고, 누군가 우리의 불안감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서 비롯한다고 했는데, 나는 병원에서 이런 전화가 오는 것을 항상 두려워했다.

동생은 착하다는 소리를 평생 듣고 컸다. 착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세뇌가 되었는지 항상 착하려고, 더 착하려고,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착하려고 했다. 동생은 붙임성이 있고, 성실한 편이다. 하지만 그의 착함은 그가 나이가 들수록 불리하게 작용했다. 성실히 일하면 일할수록 돈을 적게 주고 더 힘든 일을 시키려고 했고, 착하게 굴면 굴수록 언어 폭력을 행하는 일본인 상사들이 많아졌다.


‘착하면 남들이 알아주는 세상’은 귀족들에게나 통하는 게 아닐까? 돈이 많거나 뒷받침해주는 가족이 있다면 착함이 미덕이 될 테지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착하기까지 하면 등쳐먹으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꼬꼬무>나 <그것이 알고싶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없는 사람에게 선량함은 사치다.

동생은 공장에서 일했다. 칼을 쓰는 사람들은 동생에게 야박했다. 미대를 나온 동생에게 그곳은 생각보다 일하기 힘든 곳이었다.


나중에 동생은 일 때문이 아니라 한국인이란 이유로 매일 욕을 먹었다. “조센징은 일본에서 떠나. 나는 세상에서 조센징이 제일 꼴보기 싫다”는 그나마 참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들은 동생을 더이상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동물로 지칭했다.

아직도 그런 식으로 한국인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편으론 그런 욕들을 녹음도 안 하고, 소송준비도 하지 않는 동생이 나에겐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회사에서 시달리다 우울증을 앓게 된 동생은 2년을 우리집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어느날 문득 자취를 감췄다. 동생은 그렇게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나에게.


사라진 동생이 나타났다.

“김ㄷㄱ 씨가 쓰러졌어요. 혼자 호텔에 살고 있었던 건 아시나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가 내 동생인 건 맞지만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말이다. 코로나 19가 확산되면서 호텔비가 바닥을 치자 동생은 우리집은 나가 허드렛일을 하며 작은 호텔들을 전전긍긍했던 것 같다. 1년 동안 제대로 먹지 않고, 매일 술을 마셨다. 어디를 가도 동생이 마음 둘 곳은 없었다. 공장장들은 동생의 상황을 단 번에 알아봤고 동정이나 연민을 품기보다 학대하고 부려먹었다. 동생은 무너졌다. 이번엔 마음이 아니라 몸도 동시였다.


‘간성뇌증’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한 번 망가진 간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아요.”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나를 위로하지도 않았다. 한숨을 안 쉰 걸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살아서 만난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라고 간호사가 대신 나를 위로했다.


그래 의사라는 직업이 사람을 구하는 직업이지 위로하는 직업은 아니니까, 라고 침을 꿀꺽 삼켰다. 동생은 황달이 심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병색이 짙어서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간이 망가지면 뇌에 손상이 온다니. 그런 소리는 처음이다. 간이 부으면 성격도 변하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간호사는 덧붙였다. 지금 하는 소리를 너무 진지하게 듣지 마세요, 뇌에 이상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건강 신호는 그렇게 지난 3년간, 동생의 정신을 갉아 먹고 육체를 갉아 먹고 이렇게 큰 병으로 찾아왔다. 마음을 다친 사람은 쉽게 육체도 무너지니, 동생 탓을 하지 말라고 말해준 건 병원의 소셜 워커였다. “저는 동생 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요. 동생분을 괴롭힌 사람을 대신해 제가 사과를 하고 싶어요.” 빈 말이라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노력을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노력은 그렇게 쉽게 세상을 구원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할 때도 있다. 동생은 10년 전 엄마를 보낸 후, 혼자 열심히 살아왔다.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누구보다도 선했다. 하지만 동생에게 돌아온 것은 일본인 상사들의 차디찬 박대였다. 왜 그걸 견디고 거기에서 일했느냐고 나는 묻지만, 동생은 대답하지 않는다.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누나 내가 열심히 사는데, 세상에 희망이 없다.”가 동생이 내게 지난해 가을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병원에서 전화가 왔을 때, 쓰러졌다는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혹여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면 절대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강사로 일하면서 학생들에게 꾸준히 강조하는 것도 열심히 살아서 행복해지라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사는 것 이외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 안타까운 일이지만, 없이 사는 서민은 열심히 살지 않으면 기본적인 생활도 쉽지 않은 까닭이다.


병원에서 동생 얼굴을 보고 동생이 머물렀다던 호텔로 향했다. 담배 냄새에 찌든 방, 책상 위에는 족히 서른개가 넘는 동전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동생이 여기 머문 마지막 밤의 건강 상태를 가늠하게 한다. 그 동전들을 주워담을 틈도 없었을 것이다. 책상 위에는 동전들 저편에 짜파구리 컵라면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비닐을 뜯지 않은 컵라면 하나, 책상 옆 종이봉투에는 튤립햄 통조림이 들어 있었다.


나는 동생이 항상 죽음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누나 죽고 싶어.”

“누나 삶에 희망이 없어.”

“누나 왜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 문자를 읽을 때마다 나는 딱히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멍청하게도

“야, 다들 그렇게 살아.”

“마흔이 넘으면 인생에 동기부여는 스스로 해야지.”

“누나는 애 셋 키우고 사는데 너는 혼자 몸이고 남자인데 왜 못 살아?”

하고 쐐기를 박았다. 나는 친절하고 다정한 누나는 분명 아니다. 짜파구리 컵라면은 동생의 일 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컵라면을 챙기는데 눈물이 뚝 떨어진다.

아, 너는 살고 싶었던 거구나. 살고 싶어서 내게 부린 투정이었구나. 나는 너를 오해하고 있었구나.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구나.

복병, 네가 살아보려고 했던 그 마음이 내 마음을 녹이는 복병이 된 것 같다.


나는 모두가 살았으면 좋겠다. 크나큰 행복이 아니어도 좋다.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덜 힘들게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

조금 덜 지치고 조금 덜 치이면서 하루하루를 쌓아갔으면 좋겠다.

오늘 만난 사람이 아주 약간만 친절한 사람이기를 바라며

오늘 만날 사람에게 아주 약간만이라도 친절을 베풀 그런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게, 가난한 사람일수록 적을 것이다.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도 없는 법이다.


동생아, 일어나서 걸어라. 네 꿈을 펼쳐라. 누나는 덕분에 다시 글을 써 볼 용기를 얻었다. 이건 네가 나에게 보내준 나를 위한 복병일 것이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어차피 언젠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텐데, 그때까지는 열심히 가보자꾸나. 세상을 향해 발악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니. 어차피 부처님 손바닥 위의 인생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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