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This is us의 세계

김민정의 일상다반사(27)

by 김민정

말하자면 나는 미드와 함께 자란 세대다. 미드라고 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서구권 드라마일 것이다.

나의 첫 서구권 드라마는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본 ‘말괄량이 삐삐’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주근깨와 주황색으로 대표되는 패션 스타일까지 상큼발랄한 소녀를 보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스토리는 기억이 나지 않고 웃었는지 울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작고 어린 소녀가 있어서 나의 하루가 행복했던 것은 틀림없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천재소년 두기’와 ‘케빈은 12살’이 방영되었다. 특히 ‘케빈은 12살’은 사춘기 감성과 맞물려 나를 푹 빠져들게 했다. KBS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중학교 신입생 케빈이란 소년과 절친 폴, 그리고 위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60년대 말기부터 70년대 초반 한 소년의 중고시절을 담은 이 드라마는 80년대에 미국에서 제작되었다. 6070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한국에서는 ‘비버리힐즈의 아이들’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의 고교생들은 자유롭게 연애를 해서 마치 대학생들을 보는 것 같았지만 성적 때문에 고민하고, 인간관계 때문에 한숨을 내쉬고, 미래 때문에 걱정이 많은 소년소녀들의 모습은 공감이 절로 갔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이들이 대학생이 된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대학생이 된 이들은 이제 사회문제와 맞딱뜨리게 된다. 예를 들어 어느날 대학교에 가상의 나라의 대통령이 방문해 강연을 하게 되는데, 이 대통령이 가상의 나라를 발전시켰지만 한편으론 독재자였던 까닭에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 주인공이자 대학교 학생회장인 브랜든은 대통령과 학생들 사이에서 고민한다. 주로 연애담이었지만 인종차별, 여성차별 문제 등도 시사된 드라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을 때, 일본 NHK를 통해 ‘어글리 베티’를 알게 되었다. ‘어글리 베티’는 남미계 미국인 베티가 패션지 편집장의 어시트턴트로 입사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단호하게, 현명하게 대처하는 베티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가 결혼을 했을 때는 ‘위기의 주부들’이 방영되었다. 아 이 얼마나 굿타이밍인가. 모든 주부들이 하나쯤은 가슴에 비밀을 안고 산다. 행복해 보이려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으려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밀을 잘 숨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 탄로가 나면 끝장이다. 하지만 궁지에 몰렸을 땐 여자들끼리 단합해야 한다. 연애보다 우정이 먼저인 주부들의 이야기는 팬터지임에도 불구하고, 든든했다.


육아를 할 때는 ‘프린지’를 봤다. 엑스파일과 비슷한 구조지만, 엑스파일의 스컬리 이상으로 큰 활약을 하는 올리비아 형사의 멋진 모습에 푹 빠졌다.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이다. 대부분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이 원인이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태어나자마자 어른이 되는 인간만들기 프로젝트를 제안받아 연구를 하다가 연구가 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연구를 계속해서 그런 인간을 만들어낸다. 인간과 동물의 하이브리드까지 만들어내며,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도 만들어 낸다. 수유를 하면서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사는 세상이 무의미해지고, 일상의 힘겨움을 고스란히 잊을 수가 있었다.


한국에도 일본에도 재밌는 드라마가 많다. 하지만 일본드라마에는 여성혐오적인 표현들이 적지 않으며 교사와 학생이 연애를 하거나, 아빠와 딸의 영혼이 뒤바뀌거나 하는 스토리도 적지 않다. 동양의 유교걸인 나에게는 껄끄럽고 떨떠름한 이런 드라마는 조금 멀리 하게 된다. 최근 에는 일본정부가 방위예산을 증강하면서 자위대를 소재로 한 드라마도 종종 볼 수 있다. 한국드라마도 훌륭하다. 극적이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니 정신줄을 놓고 편하게 볼 수가 없다. 툭하면 사람이 죽는다. 툭하면 차선이나 신호위반을 해댄다. 꼭 그래야만 할까 싶은 장면들이 들어있다. 미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일본어로 번역이 되어서 나오는 미드는, 이미 호평난 작품에 검열까지 거쳤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당연히 양질의 드라마만이 방송된다. This is us도 그렇다. NHK에서 딱 15분을 보고 나는 이 드라마에 빠졌다.


(스포가 있습니다)

This is us는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이야기가 동시에 전개되는 독특한 짜임새를 가진 드라마다. 베트남 전쟁에서 갓 돌아온 잭은 어느 바에서 노래를 하는 레베카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레베카가 LA에 가서 가수 오디션을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잭은 레베카를 차에 태우고 동행한다. 그렇게 둘은 연애를 시작한다. 레베카는 연애에는 관심이 있지만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며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이 많은 친구를 보며 “대체 아이는 왜 낳아?”라고 반문한다.


잭과 레베카는 부모의 반대를 뛰어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왜 낳냐고 묻던 레베카도 임신을 하게 된다. 세 쌍둥이를 출산했지만 막내아이가 사망, 마침 그날 동네 소방서에 한 흑인 아기가 버려졌으니, 잭은 운명적인 만남이란 생각에 아이를 거두기로 한다. 레베카의 출산을 담당한 의사는 막내아이를 잃은 잭을 위로하며 “아무리 신 레몬이라도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다” 고 말한다. 과장된 말로 바꾸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가 아닐까. 잭과 레베카는 세 아이에게 케빈, 케이트, 랜들이라 이름 지었다. 세 쌍둥이의 인생의 막이 오른 것이다.


세 쌍둥이는 서른 여섯, 성인이 되었다


드라마는 레베카의 출산일과 세 쌍둥이의 36살 생일부터 시작된다.

매년 생일에는 꼭 모이는 세 쌍둥이. 큰아들 케빈은 배우가 되었다. 연기파가 아니라 반짝스타다. 그는 그게 불만이다. 둘째 케이트는 가수의 꿈을 포기하고 뚱뚱한 몸으로 인해 자신감을 잃고 살고 있다. 게다가 엄마가 날씬한 미인이란 사실이 그녀를 더 우울하게 만든다. 막내 랜들은 날씨 트레이더가 되었다. 날씨를 보고 주가 시세 등을 파악해 투자를 유치하는 직업이다. 그는 성공한 직장인이고 첫사랑과 결혼에 성공해 두 딸을 키우고 있으나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드라마는 엄마 아빠 세대인 레베카와 잭, 그리고 세 쌍둥이가 성인이 된 현재를 크로스해서 보여준다. 엄마 아빠 세대가 세 쌍둥이를 키우며 밤잠을 설치고 고군분투할 때 서른 여섯이 된 자식들도 저마다의 인생에서 고군분투한다. 시대는 변해도 인간세상은 크게 변한 것이 없으며 가족관계도 그렇다.


엄마 아빠는 점점 나이를 먹는다. 나이가 든 레베카는 치매로 고생한다. 드라마는 레베카가 사망하기까지, 즉 세 쌍둥이의 미래의 시간들까지 고스란히 담았다.


배우로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반짝 스타로 부를 쌓은 케빈은 아버지가 꿈꾸던 집을 실제로 짓는데 성공한다. 그는 연애 때문에 평생을 고민한다. 멋진 외모와 부를 겸비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다. 간신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녀는 결혼을 거부하는 비혼주의자다. 때문에 결혼을 원하는 케빈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다른 여자를 만나 쌍둥이를 가지게 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결혼을 거부한다.


케이트는 아들을 낳고 딸을 입양한다. 케이트의 아들은 시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케이트는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음악적 재능을 키워 대스타로 만든다.

랜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시의원 선거에 나간다. 그는 한국계 미국인 비서를 고용해, 재미한국인들의 표를 모아 당선된다. 물론 흑인들도 그를 지지한다. 그는 이제 국회의원이 되었고, 앞으로는 대선을 바라볼 정도로 성장했다.


세 쌍둥이는 힘겨운 일이 생길 때마다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수영장에서의 기억이다. 어릴 적 수영장에서 케이트는 뚱뚱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고 그 기억이 그녀를 위축하게 만든다. 하지만 아빠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감싼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케빈은 수영도 못하면서 점프대에서 뛰어드는 멋진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런 케빈에게 아빠 잭은 수영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꾸준히 설득한다. 랜들은 YMCA 수영 레슨에 열심히 나가 세 쌍둥이 중 가장 먼저 수영하는 법을 배웠다. 백인가족 사이에서 위화감을 느끼며 크던 그에게 수영을 하면서 사귀게 된 흑인 가족은 큰 위안이 된다.


이 드라마에는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최악의 인물이라면 폭력적인 성향의 잭의 아버지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레베카의 아버지다. 그러나 그들은 스토리의 중축이 아니며, 그들의 폭력성이나 자본주의적 성향이 드라마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극적인 연출이나 반전 없이도 시즌 6까지 잔잔한 감동을 주는 드라마다. 한편 809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기억할 만한 소소한 소재들도 자주 등장한다. 엄마 레베카가 수영장에서 읽는 책은 ‘미저리’이다. 10대가 된 딸 케이트가 친구과 함께 보며 브래드 피트를 찬양할 때 보는 영화는 ‘델마와 루이스’이다.


어차피 사람은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났으면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당신의 발걸음을 발자취를 보고 아이들은 자란다. 그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또 다음 세대가 자란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하고 선의 선순환에 합류해야 한다. 시디 신 레몬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고 투덜대지 말고 당신만의 설탕을 추가해 레모네이드를 만들라.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인생은 짧다. 당신의 소소한 일상을 기억하라. 그리고 행복해하라. 행복은 어딘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발견하는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국보> 이상일 감독의 청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