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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Jun 19. 2016

‘신주쿠 타이거’의 40년 신문 배달 인생

理想한 사람들_일본 편

-이 기사는 레이디경향 2012년 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ㆍ"어두운 뉴스 대신 꿈과 희망과 사랑을 배달합니다"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理想한 사람들' 시리즈가 일본 편으로 부활했다. 본지 일본 통신원 김민정씨가 직접 발품을 팔아 한국 못지않은 일본의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남다른 속 얘기를 들어볼 예정이다. 첫 번째 주인공은 가뜩이나 '이상한' 사람이 많기로 소문난 도쿄 신주쿠에서도 명물로 통하는 '신주쿠 타이거' 하라다 요시로씨이다. (편집자 주)

울긋불긋한 천조각을 걸치고 자전거로 신주쿠를 질주하는 사나이. 처음 봤을 때 필자에겐 공포의 대상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정체가 궁금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파란 셔츠를 입은 요상한 토끼에게 홀딱 반해버린 것처럼…. 마침 '신주쿠 타이거'를 만나기로 한 날 신주쿠에서는 연말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60세가 넘어서도 타이거 가면을 쓰고 거리를 누비는 하라다 요시로씨(64)를 만났다.



일본이야말로 '이상(理想)한 사람들'의 보고가 아닐까? 이그노벨상(노벨상을 풍자해 미국 하버드대학이 매년 기이한 과학 연구를 한 이들에게 수여하는 상) 수상자를 연이어 배출한 나라이고, 아키하바라엔 탈색된 청바지 차림을 한 오타쿠(만화, 애니메이션, 아이돌 마니아)가 가득하며, 하라주쿠엔 코스튬 플레이를 한 소녀들이 한가득이다. 개성을 철저히 누르는 사회인 반면, 독특한 개성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게다가 요즘 일본엔 변신 붐이 불고 있다.

성형수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역할을 도맡는 직업까지 증가하고 있다. 메이드 카페, 집사 카페에 이어 아들 딸이 되어주거나, 형제가 되어주는 가족 렌털 서비스까지 있다. 누구나 변신을 꿈꾼다. 그렇지만 환경과 능력이 받쳐주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일본인들은 메이드 옷을 입고 '고슈징사마(주인님)'를 연발하거나, 내 맘에 쏙 드는 집사가 차를 따라주는 곳에서 '아가씨' 폼을 잡는 걸 그리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이런 젊은이들의 일상은 그야말로 가상현실이다. 그런데 이 가상현실을 실제로 살아가는 사나이가 신주쿠에 있다.


참고로 신주쿠가 어떤 곳이냐? 일본 최대의 환락가에 게이마을, 한인타운까지 끼고 있으며 최대 쇼핑가에 도쿄도청, 은행 본점들까지 있는 한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 다문화 도시다. 신주쿠역 하루 이용자는 400만 명에 육박하며 세계 최대 이용객 수를 자랑한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만큼 일본의 특별함 혹은 이상(理想)과 이상(異常)함이 집결된 곳이기도 하다. 하루엔 다 볼 수 없는, 10년쯤 살아봐야 그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도시다.

그렇다면 이 신주쿠의 최고 유명인사는 누구일까? 망언을 하고도 4선에 성공해 도청에서 신주쿠를 내려다보는 이시하라 도지사? 아니다. 일본인들은 이 거리 최고의 유명인사로 '신주쿠 타이거'를 꼽는다. 도쿄를 여행한 경험이 있다면 한 번쯤 이 사나이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사자, 축구공, 딱따구리, 니모 인형까지 달린 알록달록 낡은 코스튬에 타이거 가면을 쓰고 신주쿠를 질주하며 시선을 집중시키는 이 사나이는 일명 '신주쿠 타이거'로 불린다. 혹자는 도쿄 7대 불가사의라고도 하는데, 그 이름에 손색이 없는 옷차림이다. 인터뷰 내내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곤니치와"라고 인사하는 사람, 사진을 찍겠다는 사람 등 대부분이 그에게 친근감을 표현했다. 잇따른 영화 출연과 타워레코드 포스터의 모델 발탁에 만화의 캐릭터까지 된 도쿄 도시 전설 속의 인물 '신주쿠 타이거'. 그는 가면 밑에 과연 어떤 얼굴을 감추고 있을까?


40년 신문 배달 인생

신주쿠타이거(웃음) 어? 정말 오셨네, 이 양반.

레이디경향(이하 LADY)예, 안녕하세요? 언제부터 이런 복장을?

신주쿠 타이거40년 전부터. 40년 전엔 더 심플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풍성해졌죠.


보통 성인 남자의 세 배나 되는 부피를 자랑하는 신주쿠 타이거의 옷에는 천조각과 인형들이 달려 있다. 손때가 드문드문 묻어 있지만 별다른 냄새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가 지나가면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데, 행인들의 반응은 딱 두 가지다. 흥미진진 혹은 거북함. 전자의 경우엔 "와, 신주쿠 타이거다!"라며 카메라를 꺼내들거나 악수를 부탁하고, 후자의 경우엔 온몸을 뒤로 빼며 그를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압도적인 존재감에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LADY

어, 이건 아톰인가요?

신주쿠 타이거

아니, 남자는 달지 않아. 이건 아톰 동생 우란이야. 내가 미인을 좋아하거든. 이 속눈썹을 보세요. 아주 길쭉하게 예쁘잖아. 와하하하(가면을 벗는 신주쿠 타이거).

LADY

아니, 가면을 벗어도 돼요?

신주쿠 타이거

이걸 쓰고 있으면 말을 못하거든(웃음).(가면을 벗으니, 웃음기를 머금은 초로의 신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LADY

그런데 직업이 무엇인가요?

신주쿠 타이거

40년 전부터 신문 배달을 하고 있어요.

LADY

그럼 신문 배달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런 모습으로?

신주쿠 타이거

열일곱 살 때부터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신주쿠에 와서 신문 배달을 했는데 마침 기오 신사 마쓰리에서 타이거 가면을 팔고 있었죠. 무작정 저걸 쓰고 배달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30장이나 구입했지요.

LADY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요?

신주쿠 타이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신문 배달을 시작했을 때, 일본엔 살인사건이 많이 생겼거든요. 어두운 뉴스를 배달하는 게 영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그래서 타이거 가면을 쓰고 어두운 뉴스 대신 밝은 뉴스를 전해주고 싶었죠. 아니, 신문 내용은 어둡더라도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꿈과 희망을 갖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랐어요.

LADY

만화 '타이거 마스크'의 그 타이거인가요?

신주쿠 타이거

그 타이거이긴 한데, 신주쿠 가부기초는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상경한 사람들, 요즘은 타이,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인에다가 한국인, 중국인도 많아요. 다양한 사람들이 뭉쳐 사는 정글 같은 곳이에요. 정글의 왕이란 의미에서 타이거 가면을 골랐죠.

LADY

이런 복장은 직접 만드시나요?

신주쿠 타이거

바느질은 해본 적이 없어서 못하고요. 그냥 옷핀으로 고정시킨 거예요.

LADY

세탁은 하시나요?

신주쿠 타이거

비 맞고 그러면 하는데 정기적으로 하진 않아요. 대신 계절별로 새 옷으로 바꾸거나 더러워지면 버리고 다시 만들곤 하지요.

LADY

타이거 가면을 쓰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데 불편하진 않으세요?

신주쿠 타이거

아뇨, 불편하지도 창피하지도 않아요. 그렇다고 영웅 심리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가면을 쓰고 배달하기로 내 자신과 약속한 것뿐이죠. 사람들의 시선 따윈 견딜 수 있어요. 난 성격이 긍정적인 편이거든요. 이 가면을 쓰면 나는 타이거니까. 타이거답게 당당하게 신문을 돌리면 그뿐이죠.

LADY

근데, 신주쿠엔 사람이 많아서 나쁜 사람도 있을 텐데, 이런 복장 때문에 봉변을 당하신 적은 없는지 궁금한데요.

신주쿠 타이거

사실 처음 타이거 가면을 쓰고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바보!" "멍청이"는 물론이고 이보다 더한 말들도 들었죠. 새벽에 조간신문을 돌리다가 맥주병에 맞고 얼굴이 부은 적도 있었어요. '루쿠루쿠 곤니치와'란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그날 촬영 중에 한 남자가 뛰어와서 자전거를 차는 바람에 달리다가 나뒹군 적도 있었죠.

LADY

그럼에도 타이거 가면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신주쿠 타이거

소년, 소녀에게 꿈과 희망과 사랑을!(웃음). 이게 내 인생의 목표니까. 요즘은 악수를 해달라는 사람도 있고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도 있어요. 40년을 해온 보람이죠. 신주쿠 오피스가의 여사원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기분 최고야!


청년 하라다 요시로는 대학 입학과 더불어 도쿄로 상경했다. 어떤 꿈을 안고 상경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대학 생활과 취업을 포기한 채 타이거 가면을 쓰기로 결정했다. 타이거 가면을 쓰고 온 세상에 밝은 희망을 전해주고 싶다는 일념하에…. 그는 "꿈과 희망과 사랑을 전해주는 것이 내 갈 길이고, 내 갈 길을 꿋꿋이 가는 사람만이 밀림의 왕자다"라고 덧붙였다.


영화를 사랑하는 로맨티시스트

LADY

신문 배달 이외의 시간엔 무엇을 하세요?

                                                                        


신주쿠 타이거

영화를 보러 가죠. 신주쿠엔 영화관이 많으니까. 배달 쉬는 날엔 내내 영화관에 있어요. 신주쿠 영화관엔 배우들이 무대 인사를 나오는 경우도 많아서 여배우가 올 때는 무조건 백장미 다발을 선물하죠.

LADY

여배우들 반응은 어때요?

신주쿠 타이거

얼마 전에 요시타카 유리코양(2009년 일본아카데미상 신인배우상을 수상한 인기 여배우)한테 꽃다발을 보냈어요. 그랬더니 무대 인사 중에 "꽃다발을 보내주신 타이거님"이라며 내 이름을 불러줬어요. 그런 작은 묘미들이 있어서 삶이 윤택해지죠.

LADY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은요?

신주쿠 타이거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마를린 먼로, 잉그리드 버그만, 미야자와 리에, 후지와라 노리카, 미소라 히바리, AKB48의 이타노 토모미, 레이디 가가랑 마돈나도. 도쿄에서 열린 라이브 콘서트에도 갔어요. 참, 한국 영화도 잘 보는데,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 최고예요(웃음).

LADY

실제로 영화에도 출연하셨죠?

신주쿠 타이거

영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서인지 영화감독들로부터 자주 출연 섭외가 와요. 대사는 없고 행인 역이 대부분이죠. 타이거 가면을 쓴 복장으로 영화의 배경이 되어달라는 건데,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출연한다는 게 매우 행복해요. NHK 드라마에도 출연했어요. 그리고 타워레코드의 포스터 모델도 했었죠. 나보다도 큰 포스터가 신주쿠역이며 도쿄 여기저기에 걸리기도 했는데, 그런 일들을 하는 게 즐거워요.

LADY

요즘 본 영화 중 인상 깊었던 영화는?

신주쿠 타이거

영화는 다 좋아요. 안 좋은 영화가 없어요. 한국 영화 중에 '아저씨'를 봤는데, 원빈 아주 멋있었어요(웃음). 한국은 국가 주도로 영화를 만든다는데, 뭘 봐도 재밌고 연출력이 뛰어나요. 할리우드가 한국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게 이해돼요.

LADY

영화를 정말 많이 보시나 봐요. 특히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가 있다면?

신주쿠 타이거

두말 할 나위 없이 '슈퍼맨', 이소룡의 액션 영화, 그리고 '007 시리즈'. 타이거 마스크 가면을 쓰고 달리면 시야가 좁아져요. 그러면 사람들이랑 부딪치기 쉬운데, 이소룡의 '용쟁호투'를 보면서 날렵한 행동을 좀 배웠죠. 그뿐만이 아니에요. 영화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인데 이를 테면 '007 시리즈'는 사랑과 로망을 가르쳐준 영화예요. 내 인생은 영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거죠.

LADY

요즘 젊은이 같으면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면 실제로 영화를 찍기도 하잖아요. 신주쿠 타이거는 영화 제작에는 관심이 없나요?

신주쿠 타이거

난 신주쿠 타이거니까. 내 일은 신문 배달을 통해서 'Love & Peace(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일이에요. 더 이상은 내 역할이 아니에요. 단 신주쿠 타이거이기 때문에 영화 섭외가 들어오고 예쁜 여배우들을 가끔 볼 수도 있고 여배우들도 나를 보면 반갑게 맞아주고, 그런 면에선 보람을 느끼죠. 신주쿠 타이거로 살 길 잘했다 싶어요.


그는 과거에 타이거 가면을 썼다는 이유로 맥주병에 얼굴을 맞아 부었던 일을 회상하며 '오이와상(일본 전설 '요쓰야 괴담'에 나오는 얼굴이 일그러진 여자 귀신)'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현재 삶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언행에 무게감 없이 작은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재빠르게 움직이는 요즘 젊은이들에 비하면 그의 무게감과 신중함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40년이나 신주쿠 타이거를 지켜왔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무대는 지구, 조명은 태양!


LADY

'신주쿠 타이거'란 궁극적으로 무얼 의미하나요?신주쿠 타이거내 무대는 지구, 스포트라이트는 태양!(웃음). 굳이 어떤 역할을 하거나 영화를 찍어야만 무대가 되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을 나답게 사는 것이 바로 신주쿠 타이거죠. 이제 앞으로 나이가 더 들어서 머리가 벗겨지고 얼굴에 주름이 생겨도 난 문제없어요. 타이거 가면을 쓰면 감춰지니까. 노 프라블럼(No Problem)! 꿈에 정년퇴직은 없습니다.

LADY

24시간 이 복장인가요?

신주쿠 타이거

물론이죠! 오브 코스(Of Course)! 5년 전인가 이렇게 입고 하와이에 갔어요. 일본에선 그래도 나름 유명하니까 나리타 공항에서 출국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하와이 공항에서 난리가 났죠. 총을 든 경비원 손에 이끌려 사무실까지 끌려갔어요. 입국관리사무소에서 취조를 받는데, 가방 안에 든 신문 생각이 났죠. 한 외국 신문에서 날 취재해 갔거든요. 그 신문을 보여주고 풀려났어요.

LADY

가장 행복한 순간은요?

신주쿠 타이거

거리에서 아주 예쁜 여자를 만났는데 나를 보고 살포시 웃어줬을 때!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좋아요. 승천하는 느낌이랄까?

LADY

그렇다면 걱정거리는?

신주쿠 타이거

지구가 자연 파괴로 점점 상황이 악화되어가는 거요. 환경 문제가 제일 걱정이거든요. 아이들의 미래와 큰 관련이 있으니까요. 신문을 매일 돌리니까 1면은 꼭 보게 되는데, 자연 파괴 뉴스가 실려 있으면 가슴이 아파요.

LADY

신주쿠 타이거에게 이곳 신주쿠는 어떤 의미인지요?

신주쿠 타이거

인간미 넘치는 곳이죠. 요즘은 전 세계 사람들이 와서 뿌리를 내리려고 애쓰고 있어요. 마치 뉴욕 같지 않아요? 신주쿠에 사는 사람은 모두 여기가 고향이 아닌 타지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정을 나누며 사는 동네예요. 일본의 한 시골에서 돈 벌러 온 남자와 동남아시아의 시골에서 역시나 돈 벌러 온 여자가 순수하게 사랑을 나눌 수도 있는 곳,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삶과 죽음이 있는 곳.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이 있는 곳, 그래서 인정이 생길 수밖에 없는 곳이죠.


인터뷰를 마치자 필자의 손에 분홍 사탕으로 코팅된 사과를 쥐어준 신주쿠 타이거는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인지도 모른다. "소년, 소녀의 눈물에만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말하는 그는, 오늘도 다문화 거리 신주쿠를 질주한다.


<■글 & 사진 / 김민정(「레이디경향」 일본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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