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안돼서 나온 것 맞습니다
때는 2015년 가을. 서울의 모 대학 도서관에서 열심히 싸트 책을 풀던 나는 그 날도 서류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한 번도 철학 전공이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고 전공 선택을 후회한 적도 없었지만 그 날 따라 영 마음도 착잡하고 철학과 졸업하면 입에 거미줄 친다더니 진짜인가 싶어 슬픈 마음이 들었다. 문득 이번 시즌에 남은 총알이 몇 개 없다는 것을 떠올리며 답답한 마음에 조용히 제주항공 홈페이지를 열어 도쿄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고 예상대로 총알이 다 떨어지고 (지원한 곳에 다 떨어졌다는 말이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쿄로 떠났다.
24년간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자문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그저 도쿄에서 한 달 동안 친구집에 머무르면서 마음이나 정화할 요량이었다. 도쿄는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워킹홀리데이로 일 년 가까이 지냈었고 그 기간동안 일본어가 많이 익숙해졌기 때문에 지내기도 편할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도쿄에서는 한국처럼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에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워홀 기간 동안 만났던 도쿄의 대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연애 아니면 부활동이었고 공부에는 큰 취미가 없는 것 같았다. 한국인 필터를 장착한 나는 처음에는 쟤네 공부도 안하고 정말 멍청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취업 준비에 닳고 닳다보니 오히려 젊은이 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그들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굳이 도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국인 DNA가 어디 가는가. 막상 도쿄에 와서도 뭐라도 해야될 것 같고 졸업할 시간이 이렇게 다가오는데 마음 놓고 놀아도 되는가 불안한 마음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쉬러 왔으면 그냥 쉬면 되는데 괜시리 노트북을 가지고 매일 카페로 나갔다. 독취사도 찾아보고 사람인도 찾아보고 뭐 공고 뜬 곳 없나 찾아보다가 딴 길로 샜던 나는 한국에 뭐 좀 사가지고 갈까 하며 일본 이커머스에서 물건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 이 회사는 사람 안뽑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채용 페이지에 가보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신졸 (신입사원) 공채 모집 공고가 있었다. 어차피 공고 뜬 곳도 없고 그냥 써봐? 했던 그 곳이 결국 내 첫 번째 직장이 되었다. 도서관에서 싸트 문제집 몇 권씩 풀면서 서류도 안붙는데 이걸 왜 해야되나 했었지만 그 짬밥으로 일본 SPI (싸트 같은 적성검사) 에 붙어 결국 입사한 것을 보면 이래서 사람은 준비를 해야되는구나, 하고 이후에 내심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본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성격 상 일본이 잘 맞지 않는다고 했는데 물론 외국인으로 살면서 외로운 시간들도 있었지만 이 곳에 안맞는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소소하게는 빵과 아이스크림이 맛있고, 화장실이 깨끗해서 좋다. 한국에 가면 항상 화장실은 상가의 가장 어두컴컴한 곳에 있는데 일본에서는 어딜 가든 잘 정리되어 있고 어둡지 않아서 좋았다.
무엇보다도 일본에 와서 비교할 대상이 많이 없는 것이 좋다. 한국에 있으면 같은 학교 동기들, 친구들, 옆집 누구, 엄마 친구 누구와 비교하면서 나는 왜 이 모양으로 사는가 하며 더 나은 것을 향해 달려가지만 일본은 사회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좀 덜하다고 느낀다. 아무래도 개인주의가 심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 같고, 또 학연도 지연도 없이 남의 나라 땅에서 지내면 비교할만한 아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사는 방법이 또 다른 삶의 방식이겠거니 하고 살았다. 때때로 한국인의 DNA가 회사 동기 선배들과 나를 비교하며 힘들게 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회사 이외의 것에서 사사건건 비교할 필요는 없었다. 결혼 언제 하냐고 묻는 친척들도 없었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나마 일본인들도 평가 잣대를 덜 들이댔던 것 같다. 이방인으로 사는 것은 외롭기도 하지만 자유롭기도 하다.
한편으로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직업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면도 있다. 한국에서 대학 졸업반 때 모 상사에 지원했다가 면접에서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버벅거려 완전히 말아먹고 왔던 내가 도쿄에서는 어찌저찌 영어로 밥을 벌어먹고 산다. 물론 그 동안 일하면서 영어 실력도 늘긴 했지만 한국이었으면 영어를 쓸 기회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나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 산처럼 많으니까! 하지만 이 곳에서는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희소한데 서울보다 외국계 회사들이 더 많이 진출해 있기 때문에 취업시장에서 내가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다.
또한 한국보다 휴일이 더 많은 것도 좋은 점이다. 산의 날, 바다의 날 등등 휴일도 있고 외국계로 이직한 이후로는 유급휴가도 매년 20일을 쓸 수 있다. 병가는 별도이다. 한국에서는 인턴 때 눈치보며 야근도 해봤지만 이 곳에서는 그냥 퇴근하기도 하고 아프면 휴가 꼬박꼬박 쓰면서 나와 주변을 더 잘 챙길 수 있는 환경이다.
일본에서 사는 한국인 친구들끼리 만나면 매번 토픽이 되는 질문이 있다. "왜 일본은 이렇게 거지같은가?" 21세기에 아날로그 감성을 가진 공무원들과 회사들을 겪고 나면 대체 왜 아직도 이렇게 쓸데없는 서류를 많이 내야 하는지, 왜 행정 시스템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인지, 사회 시스템은 이렇게 구멍이 많은 것인지, 그리고 이놈의 일본인들은 왜 이렇게 서로에게 책임을 떠 미루는지 울분을 터뜨리며 우리가 이 나라에 익숙해지기 전에, 그리하여 더 늦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서로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돌아가지 않고 이 답답한 나라에서 사는 이유는 이 나라가, 도시가 주는 이상한 안정감과 (그래도 사회가 이 모양이니 나도 이렇게 벌어먹고 산다) 이 도시의 다양한 구성원들에게서 오는 자극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 이 곳에서 계속 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쿄가 나의 제 2의 고향이 된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