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가을 여행 중의 카페 한 곳
가끔씩 철원을 찾는다.
터질 듯한 폭염이 이어지던 여름이 다 지났음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날이 서늘해졌다. 가을이면 가끔씩 찾는 곳이 철원이다. 몇 년 전에 처음 찾은 이후로 가을 꽃이 만발할 즈음이면 고석정 꽃밭을 볼 겸 해서 철원을 찾아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올해도 다녀왔다. 은하수교 너머에 새로 생긴 횃불 전망대에 올라 인근에 펼쳐진 가을 들판과 그 사이에 있는 깊은 협곡, 주상절리, 그리고 비가 많이 내린 덕분에 넉넉한 소리와 흐름을 선사하는 한탄강 물줄기 등을 바라보는 맛은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다만 고석정 꽃밭은 꽃의 종류가 예전같지 않고 한 종류의 꽃이 너무 넓게 펼쳐지는 느낌이어서 조금은 아쉬웠다.
인터넷에서 여전하다고 했다.
실상 이번에 철원을 찾은 중요 목적 중에 하나는 작은 카페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예전에 TV프로그램에서 소개되었던 그 곳이었다. 철원 지역에서 꽤나 맛있는 도넛을 만들어내는 한 아저씨가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멋진 카페의 주인장으로 재탄생하는 이야기였다. 우연히 보게된 그 프로그램은 그 에피소드가 마무리될 때까지 본방 사수를 하게 하였고 이내 그 카페의 도넛 맛과 커피 맛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했다. 이제 그 프로그램은 끝났고 다른 시즌으로 이어가고 있고 카페가 TV에 소개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인터넷에서는 커피와 도넛의 맛뿐만 아니라 아저씨의 친절함도 여전하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찾아가 보고 싶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TV의 영향력도 많이 줄어들어서 오픈 초기에 그 번잡함도 다 사라졌을 것이고 여유롭게 커피와 도넛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인터넷에선 여전히 손님들이 많다는 얘기가 있어 느즈막한 오후보다는 이른 점심 무렵에 가기로 했다. 다른 철원의 여행지들을 다 미뤄두고 이 카페를 먼저 가려고 한 것이다.
여전하기는 쉽지 않다.
TV프로그램이나 먹방 유튜브 등을 통해 유명세를 탄 식당이나 카페는 대개 일정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방송 초기의 그 맛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맛의 변화가 아니라 음식을 만드는 이의 마음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애정하던 나만의 맛집 하나를 잃는 것이다. 제주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다. 예전 제주시 외곽에 성게 미역국을 참 잘하던 식당이 있었다. 우리만 알던 맛집었고, 풍성한 성게의 양이 미역국 맛의 품격을 올렸다.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점점 유명해졌고, 줄을 서서 30분 이상을 기다려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식당은 손님으로 항상 붐비었고 주방도 홀도 정신없이 돌아갔다. 밀려드는 손님을 다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성게의 양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결국은 다른 보통의 식당 정도로 바뀌었다. 당연히 성게미역국의 맛도 딱 그정도가 되어 버렸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어느날 그렇게 손님이 밀어닥치기 시작한 식당은 처음의 그 마음과 맛을 유지하지 못했고 나의 발길도 그렇게 끊겼다.
대개 어떤 일을 할 때는 딱 자신의 능력만큼 발휘될 때 최고의 실력이 드러난다.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 또는 상황이 벌어질 때는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욕심이 능력을 초과하는 일을 방치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여전했다. 그래서 익숙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몇몇 후기에서 여전하다는 이 카페의 평을 믿고 가게를 찾아갔다. 예전에 TV에서 보던 그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고 매장 앞에 작게 꾸며놓은 연못을 향해 폴딩 도어가 시원하게 열려 있었다. 사장님은 부스에서 도넛을 만들고 있었다. 사람 자체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잠시 뒤 주문을 받기 위해 계산대로 나오셨다. 표정이나 몸짓, 말투에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 사장님은 방송에서 보던 모습에서 크게 변함이 없었다. 손님을 소중하게 대하는 진정성이 충분히 느껴졌다. 이내 그 장소와 풍경, 그리고 사장님까지 익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매장 안 긴 테이블에서 편안히 커피와 도넛을 즐길 수 있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던 이의 집에 와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생전 처음 와본 곳이었지만 이것은 TV로 보았던 그 모든 것이 여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그맘 그대로
손님은 계속해서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다정하게 연못 옆 야외테이블에서 풍경을 즐기는 사람들, SNS를 위한 작업을 하는 인플루언서, 어린 막둥이를 포함한 삼남매와 함께 카페를 찾은 부부, 홀로 찾아와 조용히 도넛과 커피를 음미하는 젋은 사람 등 카페에는 그리 번잡하지도 너무 조용하지도 않게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사장님과 직원 한 분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이었다. 우리가 있는 동안에도 사장님은 도넛 부스와 주문대를 오가며 부지런히 이 카페에 정성을 쏟고 있었다. 예전 TV에서 이 카페를 처음 만나 감격하며 다짐을 하던 그때 그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때 그맘 그대로 계속 유지해 가셨으면 좋겠다. 1년에 한 번 이상은 철원을 찾는 것 같은데 앞으로 이 카페는 나에게 편안히 쉬면서 즐길 수 있는 단골 카페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