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핵 잇_다 6]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위원회 홍보실장 이옥분
삼척블루파워 석탄발전소 석탄 운송 시작한 오늘 우울하고 화가 치밉니다.
삼척블루파워 석탄화력발전소(이하 삼척블루파워) 시범 운전을 위한 석탄 육로 운송이 시작된 7월 18일 '삼척평화' 이옥분씨는 자신의 SNS에 속울음을 삼키며 이렇게 썼다. '2050 탄소 중립'이 기업 광고에까지 쓰이는 마당에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과 석탄 육로 운송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러나 삼척시 적노동 맹방해변에서는 114만㎡ 부지에 삼척화력 1·2호기(각 1050㎿급, 총 2100㎿) 석탄발전소가 각각 2023년 10월, 2024년 4월 완공을 목표로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유엔 IPCC(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는 지난 3월 6차 평가보고서에서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 이내로 지키기 위해 인류가 쓸 수 있는 탄소량은 5천억 톤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경고하며 2030년까지 온실가스 50% 감축을 주문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살기 좋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의 창은 빠르게 닫히고 있다. 이번 10년 동안 내려진 결정과 취한 조치는 수천 년 동안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것이 이번 6차 평가보고서의 핵심이다. 삼척블루파워는 '빠르게 닫히는 창'을 재촉하고 있다.
곱고 부드러운 백사장이 10리에 걸쳐 있어 이름 붙은 '명사십리' 강원도 삼척 맹방해변 또한 사라지고 있다. 2021년 환경부 사후 환경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9월 맹방해변의 면적은 2005년 이래 최저 수준이었다. 기후변화 등으로 해안 침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삼척블루파워 항만 건설이 더해지며 가속화됐다. 조사 결과 2018년 삼척 화력 1·2호기 건설과 함께 시작된 석탄 운반용 대규모 접안 시설 공사가 원인으로 꼽혔다.
삼척블루파워는 당초 연료로 쓰이는 유연탄을 맹방 항만에 하역한 뒤 바로 석탄 운송 터널을 통해 발전소로 이송할 계획이었으나, 지난 2020년 공사로 인한 침식 저감 시설 미흡으로 항만 공사 중지 명령을 받았다.
이후 8개월 동안 공사가 중단되면서 항만 공사 일정에 차질을 빚자 7월 18일, 석탄 88.6만 톤의 육로 운송을 시작했다. 석탄을 실은 25t 트럭이 하루 480회, 22시간 동안 동해와 삼척시 시민들의 주거지를 가로지르며 1년여 동안 달린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트럭의 매연과 소음, 석탄 먼지 등이 근처 맹방초등학교, 근덕중학교, 삼척에너지마이스터고등학교로 넘어와 주민들은 물론 학생들의 안전까지 위협한다.
지난 6월 23일과 24일, 양일간 동해시에 거주하는 주민 500명을 대상으로 '석탄 육상운송 추진' 관련 여론조사를 진행한 결과 석탄 육상 운송 추진에 반대한다는 답변이 84.7%, 석탄 육상 운송으로 인한 동해 시민의 건강 및 경제 영향에 피해가 있다는 답변이 90.7%에 달했다.
동해시, 삼척시 대다수 주민이 반대하는데도 삼척블루파워는 이윤을 위해 석탄 육로 운송을 한다. BTS(방탄소년단) 노래 '버터'의 뮤직비디오 배경이기도 했던 맹방해변의 풍광을 해치며 기세등등 올라간 석탄발전소 굴뚝에서 7월 21일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삼척블루파워의 시험 운전이 시작된 것이다.
석탄발전소 굴뚝은 삼척 시내에서 한눈에 보인다. 강원도에는 삼척 화력 1·2호기뿐 아니라 강릉 안인 화력 1·2호기가 2022~2023년 신규 건설되어 상업 발전 중이다. 삼척석탄화력발전소까지 완공되면 석탄화력발전소 7기가 늘어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제출된 환경영향평가서에 따르면 이들 화력발전소 총 7기에서 나오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2024년부터 2050년까지 5018만 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1인당 탄소배출 4위로 국제 사회에서 '기후 악당'으로 불리는 대한민국의 '악당 국가' 위상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2013년 7월 발전사업을 허가 받고 보류되었던 삼척석탄화력발전소를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는 삼척블루파워측이 내세운 이유는 '지역경제 활성화'였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강조되고 석탄발전업에 대한 투자 회피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는데 여전히 석탄발전소가 '지역'의 '경제'를 '활성화'할 것이라는 쌍팔년도식 경제 인식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실제로 삼척블루파워는 2250억 원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진행한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총 80억 원의 주문을 받는 데 그쳐 2170억 원 미달이 발생했다. 게다가 상업발전이 늦춰지면 이익이 줄어드니 어떻게든 공사 기간을 맞춰야 했고 그 무리수가 '석탄 육로 수송'이다.
비록 석탄 육로 수송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지만, 삼척석탄화력반대투쟁위원회(이하 석탄반투위) 주민들과 옥분씨는 분루를 삼키고 다시 다짐한다.
끝까지 싸워 반드시 막아낼 겁니다.
삼척 시민들이 누구던가? 1980년대부터 핵발전소, 핵폐기장을 3번이나 막아낸 탈핵 운동의 전설들이 아닌가?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을 기록하고 '삼척평화'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삼척 시민들의 투쟁을 알려온 옥분씨의 이번 다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열차 타고 동해항에서 내려서 삼척 오는 버스 타고 삼척우체국 앞에서 내리면 돼요. 참 왼편에 앉아서 정동진 바다를 보면서 오다 보면 다음이 동해역이에요.
전화 너머 들려오는 옥분씨 목소리에 작고 예쁜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를 품은 옥분씨 집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어느 해던가?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 훌쩍 서울을 떠나 도착한 옥분씨 집에서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바닷소리를 들었다. '바다멍'이었다.
옥분씨가 해주는 밥이며, 안주에 막걸리를 홀짝거리며 온몸과 마음을 녹여냈던 기억은 수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바닷가 옥분씨 집은 수없이 오갔을 탈핵하는 사람들의 쉼표이고 상징이었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마을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후쿠시마 바다가 생각나서 미치겠더라고요.
옥분씨는 핵발전소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삼척 상황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고민하느라 잠이 오지 않았다. 핵발전소가 들어오면 일자리가 생긴다는 거짓말을 삼척 젊은이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알리고 싶었다. 불면의 밤을 뒤척이다 새벽 3시쯤 이제 막 시작한 SNS 페이스북이 떠오른 옥분씨는 당장 '삼척평화' 계정을 하나 더 만들었다.
핵발전소로 삼척의 평화가 깨지고 있으니 다시 평화가 찾아올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담았죠.
2019년 삼척핵발전소 백지화로 세 번째 승리를 일군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위원회(이하 핵반투위) 사람들은 또다시 피켓과 깃발을 챙겨 석탄발전소 반대 운동을 이어간다.
핵시설을 막아 낸 힘을 다시 그러모아 석탄화력발전소를 막기 위한 조직을 어렵사리 꾸려야 하는 상황에서 옥분씨는 2021년 초 큰 수술까지 받았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온통 신경은 '삼척 석탄화력발전소 반대' 운동에 가 있었다.
하루는 담당 의사를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나 이때다 싶어 페이스북 '삼척평화' 계정을 알려주며 탈핵과 탈석탄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죠.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다음날 회진 온 담당 의사는 "이옥분씨가 우리 사회를 위해 애쓰는 동안 나는 병원에서 일만 했으니 옥분씨가 잘 치료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라고 답했단다.누구든, 어디든 탈핵과 탈석탄에 대해 이해시키는 친화력과 대중성은 옥분씨 힘의 원천이다.
정동진 바다를 보고 동해역에 내려 21-1번 버스를 타고 삼척우체국 앞에서 내려 5년 만에 옥분씨를 만났다. 걱정했던 것보다 씩씩하고 여전히 살가웠다.
이명박 정권 시절 2010년 12월 당시 김대수 삼척시장은 주민투표를 통한 주민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삼척핵발전소 유치를 신청했다. 삼척은 1982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핵발전소 예정 구역으로 일방적으로 지정되었다. 1992년 핵발전소 예정지였던 근덕면에 핵발전소를 건설하겠다고 정부가 발표하자 아기와 병석에 누운 노인들만 빼고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와 6년 동안 끈질긴 투쟁을 이어갔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1998년 12월 30일 '삼척핵발전소 예정 구역 고시 해제'를 발표했고 삼척 반핵 운동사의 첫 번째 승리로 기록되었다. 그 당시 조성한 근덕면 덕산리 8.29 기념공원에는 우람한 '원전 백지화 기념탑'이 삼척 반핵운동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2005년 핵반투위는 핵폐기장 후보지로 삼척이 오르내리자 시의회를 압박하여 유치동의안을 부결시킨다. 두 번째 승리였다. '핵발전소 말고 대안 에너지가 있다'라고 그래프와 근거를 들어 설명해도 도통 들으려고 하지 않고 빨갱이로 몰아가는 사람들에게 핵발전은 보릿고개를 넘어서게 한 경제 개발과 성장 신화의 심장과 같다.
40여 년간 '깨끗하고 청정한 값싼 에너지'라는 전방위적인 홍보가 국민을 가스 라이팅 한 탓에 '핵발전소 없으면 당장이라도 호롱불을 켜야 한다'라고 믿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는데 정치적으로 보수색이 짙은 강원도 삼척은 어떻게 반핵운동의 성지가 되었을까?
핵발전소가 좋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잖아요. 상식이니까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요? 후쿠시마도 겪었고요.
옥분씨의 대답이다. 명쾌하고도 쉬운 답을 찾기까지 우린 너무나 오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삼척핵발전소를 유치하겠다고 신청한 김대수 삼척시장에게 핵발전소 유치에 대한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를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지속적으로 묵살 당한 핵반투위는 2012년 6월 삼척우체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척시장 주민소환운동 돌입을 선포했다.
1, 2차 삼척 핵반대 투쟁을 저는 잘 몰랐어요. 어촌 마을에서 아이들 키우고 사느라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몰랐죠. 그러다가 2010년 김대수 시장이 핵발전소 유치신청을 하면서 '큰일 났구나' 싶었죠. 다음 해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났어요.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걱정에 싸인 옥분씨는 삼척도계성당 주임신부인 박홍표 신부가 핵반투위 사무실에서 탈핵 미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사에 참례한다. 두 번째 탈핵 미사에 참여한 것이 2023년 오늘 삼척평화 이옥분을 여전히 현장에 있게 했다.
삼척우체국 앞에서 삼척시장 주민소환운동 기자회견을 한다는 거예요. 제가 엄청 소심하고 겁이 많아요. 기자회견을 가긴 가야겠는데 용기는 안 나더라고요.
집에만 있기가 더 어려워진 옥분씨는 멀찍이 떨어져 기자회견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딸이 사용하던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삼척평화의 반핵-탈핵운동의 기록과 홍보의 시작이었다.
그 당시 참 어렵게 살았어요. 남편이 친구들과 하던 공동어장 사업도 잘 안되고 살림이 곤란했는데, 디지털카메라를 꼭 사야겠더라고요. 삼척 시내에서 가장 큰 마트에 가서 진열된 카메라를 보는데 캐논과 삼성 카메라가 있었어요. 직원이 캐논 렌즈가 좋다고 권하는데 저는 삼성 카메라를 선택했어요. 신규 핵발전소 건설에 삼성중공업이 참여한다고 들었거든요. 오기가 났죠. 삼성 카메라로 반드시 핵마피아들을 이겨내야겠다는 다짐이기도 했어요.
카메라 사용법과 인터넷을 알긴 뭘 알아요. 하나도 몰랐죠.
새 디지털카메라를 손에 쥔 옥분씨는 삼척우체국에서 실시한 인터넷 교육 일주일을 수강하고 온라인 홍보 실전에 들어갔다. 카메라를 든 덕에 옥분씨는 핵발전소 유치 찬성 주민들과 경찰, 관공서 등의 표적이 되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이유로 유치위 활동하는 '깡패'들이 욕을 하면서 겁을 줬지만 옥분씨는 "당신 아이와 우리 아이가 같은 학교 친구일 수도 있어요. 당신 아이가 핵발전소 막아낼 때 아빠는 뭐 했냐고 물으면 정정당당히 답할 수 있어요?"라며 눈을 똑바로 바라봤더니 슬그머니 내빼더란다.
우리 집이 삼척 시내에서 25km정도 떨어져 있어요. 매주 수요일 탈핵 미사와 촛불집회까지 참석하고 버스 타고 마을 앞에 내리면 웬 차가 슬쩍 돌아서 나가곤 했어요. 감시받는다고 생각했죠.
2012년 10월 31일 삼척시장 주민소환 투표는 투표율 25.9%로 1/3을 넘지 못해 실패했지만 2년 후 2014년 김양호 탈핵 시장을 선출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삼척 탈핵운동의 상징인 삼척우체국 앞에서는 매일 오후 4시부터 탈탈탈(탈핵·탈석탄· 탈송전탑) 도보 순례와 5시 피케팅이 진행된다. '탈핵 희망 국토 도보 순례'가 탈석탄과 탈송전탑까지 담아내며 그릇을 키웠다. 배낭에 '탈탈탈' 깃발을 꽂고 삼척우체국에서 시청을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탈탈탈' 순례단에 우린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운 건 아닐까?
매주 수요일 골롬반 선교회와 천주교 기후행동, 생태환경에 관심 있는 원주교구 신부님들이 주관하는 천주교 미사는 천주교 신자인 옥분씨와 성원기 교수에게 큰 힘이 된다. 옥분씨도 골롬반 선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니 예견된 인연인 듯하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여름·겨울 방학이면 '핵발전소 반대' 깃발을 배낭에 꽂고 전국의 핵발전소 지역을 순례했던 성원기 교수는 재직 중이던 강원대학교를 퇴임하자마자 삼척석탄발전소투쟁위 공동대표를 맡아 '탈석탄 삼척'을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성원기 교수의 선창에 따라 세 차례나 핵발전소를 막아낸 전설의 김옥선 삼척여고 전총동문회장과 삼척 주민들이 두 주먹 불끈 쥐고 외친다.
포스코는 삼척블루파워 석탄발전소 건설을 중단하라.
포스코는 석탄 육로 운송을 당장 중단하라.
안식년 동안 산티아고 등 성지 순례를 하고 우연히 반핵 집회에 참석한 성원기 교수가 2013년 6월 '탈핵 희망 국토 도보 순례'(이하 탈핵순례단)를 시작한다. 성지 순례자에서 탈핵 순례자로 변신하는 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성원기 교수가 부산 고리에서 시작해 삼척까지 탈핵 도보 순례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반갑고 설레서 가슴이 뛰는 거예요. 따라나설 수는 없으니 전화로 어디냐고 물었어요. 부산 고리에서 출발해서 걷고 있다고 해서 이 길은 성 교수 개인의 길이 아니니 가는 길목마다 사진과 영상을 찍어서 나에게 보내라고 했어요.
성 교수가 보낸 사진과 영상은 '삼척평화' 페이스북을 타고 전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며칠 후 경주 동국대 김익중 교수가 삼척평화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옥분씨에게 연락을 해왔다. 김익중 교수는 2011년 3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보고 충격을 받아 본격적인 탈핵 운동을 시작한 즈음이었다. 김익중 교수는 시민들의 모금으로 방사능 측정기를 사서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면 탈핵 순례단에 합류할 수 있느냐고 물어서 장소와 연락처를 알려줬어요. 며칠을 성원기·김익중 교수가 함께 걸으면서 핵발전소 폐쇄 의지를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된 거죠.
성 교수에게 전송받은 사진으로 탈핵 순례단이 어디를 지났고 누가 합류했고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려내던 옥분씨는 5일 후 탈핵 순례단에 참가한다. 옥분씨가 함께 걸으니 탈핵 순례단의 활동 사진과 영상은 풍성해졌고 일거수일투족이 상세히 세상에 전달되었다.
삼척에 들어와서 근덕면까지 마지막 코스를 걷는데 경찰이 따라붙길래 "제 덕에 힘 안 들이고 정보를 받을 수 있었죠?"라고 물으니 "네 덕분에 저희가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라고 웃었단다. 하루 네다섯 번의 포스팅을 올리고 나면 순례단이 후미진 곳을 걸을 때도 경찰차가 나타나곤 했다.
탈핵 희망 국토 도보 순례는 2013년 여름부터 2019년 8월까지 매년 여름과 겨울 한 달여 동안 진행되었고 탈핵을 염원하는 많은 사람이 그 길에 함께했다.
2017년 6월 문재인 정부의 탈핵 선언 2년 후인 2019년 6월 5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삼척핵발전소 예정구역 지정고시'를 철회했다. 삼척핵발전소 반대투쟁 세 번째 승리의 마침표였다.
'탈핵 희망 국토 도보 순례'는 삼척핵발전소가 백지화된 2019년 여름 순례를 마치고 8월 24일 공식 마무리했다. 그 중심에 성원기 교수가 있었고 '삼척평화 카메라'가 세상과의 소통을 틔웠다.
누군가는 길을 내고, 누군가는 그 길을 넓혀내고, 하루라도 그 길을 걷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배낭에는 '탈핵 희망 깃발'이 펄럭이며 번져나갔다.
저절로 이뤄지는 역사는 없다. 절실함이 만들어 낸 승리다.
탈핵 운동가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민-민 갈등이다. 한수원과 정부는 '핵발전소유치위원회(이하 유치위)'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민-민 갈등을 조장한다. 삼척은 지역 깡패들까지 엮이면서 반대편 주민들을 압박했다.
시장에서 장사하던 장애가 있는 시민에게 탈핵 미사, 촛불 집회에 가지 말라며 협박하고 치킨집 하는 사람에게도 찾아가서 장사 그만하고 싶냐고 행패를 부리는 등 정치 깡패들이 설치고 다녔어요. 삼척에서 가장 큰 문방구 하는 사람이 반대 투쟁에 함께하니 공무원들이 거래를 딱 끊으면서 압박을 했죠. 문방구 사장님은 처음엔 후원만 했는데 열받아서 집회도 나오고 끝까지 함께했어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주민수용성'이 강조되면서 주민 설명회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주요 일정이었다. 그러나 주민설명회는 내용과 상관없이 개최여부만으로 주민수용성에 가산점을 주는 요식 행위일 뿐이었다.
핵반투위는 주민설명회를 반드시 무산시켜야만 했다. 2012년 4월 27일 근덕면복지회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주민설명회가 삼척 핵발전소 반대투쟁위원회와 근덕면 원전 백지화 투쟁위원회 등 반대 단체 주민들의 봉쇄에 막혔다. 백여 명의 주민이 서로의 몸을 끈으로 묶어 정문을 막아선 것이다. 찬·반 주민들과의 밀고 밀리는 몸싸움과 고성이 오가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한 당시 지식경제부(이하 지경부) 공무원과 한수원 관계자들은 이날 주민설명회 철회를 선언했다. 작은 승리 하나가 추가됐다.
그러나 5월 25일 한수원과 지경부는 삼척문화예술회관에서 기습적으로 주민설명회를 연다. 1차 주민설명회 무산 투쟁 때와 같이 반대 대책위 주민들이 몸에 끈을 묶어 정문을 막아섰다. 경찰들도 깔렸고 유치 찬성 측은 젊은 여성들을 내세워 반대편에서 유치 찬성 피케팅을 했다.
반대 주민들이 정문을 막아섰는데 느낌이 이상하더라구요.
혼자서 카메라를 감추고 문화예술회관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정문 옆 작은 문으로 찬성 측 주민들을 입장시키고 있었어요. 잠시 고민을 하다가 할머니 한 분 손을 잡고 줄 서서 들어갔어요. 할머니 말이 전날 7000원짜리 식권을 나눠 줘서 뭔지도 모르고 밥 먹으러 왔다는 거예요.
핵반투위 사람들은 정문 앞에서 으쌰으쌰 하고 있는데 나는 행사장에 들어와 버린 거죠.
아침 8시 30분쯤 됐는데 이미 설명회가 시작됐어요.
한수원과 지경부는 예정 시각보다 빨리 시작해 속전속결로 끝내버리려는 속셈이었다. 무대 위 한수원 발표자는 근덕면에 병원이 들어서고 청정에너지로 지역 경제가 발전한다는 청사진을 발표하면서 근덕면을 '원전 유토피아'로 그려내고 있었다. 기가 막혔지만, 기둥 뒤에 몸을 감추고 카메라에 설명회장 풍경을 담았다. 주민설명회장을 채운 사람들은 핵발전소 예정지인 근덕면 주민들이 아닌 삼척 시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질문을 하라는데 한수원이 미리 나눠준 시나리오대로 질문을 하는 것 같았어요. 전기요금은 얼마나 감면해주냐?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이 뭐냐? 등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지요. 그렇게 몇 차례 질의응답이 오가더니 이제 질문 없으면 마치겠다고 하는 거예요.
옥분씨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마 진행자는 나도 시나리오 중 한 사람이라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야기하라고 하더라고요.
마이크를 넘겨받은 옥분씨가 "이건 주민설명회가 아니다. 근덕면 주민들은 지금 바깥에서 반대하며 싸우고 있는데 이게 무슨 주민설명회냐. 이런 주민설명회는 무효다"라고 소리치자 여기저기서 고성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깍두기 머리를 한 찬성 측 대표가 대뜸 저년이 어떻게 들어왔어. 왜 못 막았어. 빨리 끌어내 막 이러는 거예요. 여기저기서 마이크 빨리 뺏으라고 난리가 나고... 결국 마이크를 뺏더니 사회자가 주민설명회가 끝났다고 선언해 버렸어요.
무대 아래쪽에 깍두기 머리를 한 사람들이 쫙 깔려있던 상황에서 극소심형 옥분씨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 주민설명회는 무효입니다' 내가 이 말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끝나고 나오는데 그제야 두려움이 밀려오더라고요.
아이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4년 정도 삼척 시내에 나와 살 때였어요.
2012년 5월 정도 됐는데 한 차례 주민설명회를 무산시키고 언제 또 기습적으로 주민설명회를 할지 몰라 늘 걱정이 많았어요. 하루는 시장을 다녀오는데 우연히 본 벽보에 '법륜 스님의 희망찾기 즉문즉설' 광고가 붙어 있는 거예요. 갑자기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찬핵·반핵을 불문하고 사람이 많이 모일 거 아니에요?
법륜 스님은 정의로운 분이라 왠지 핵발전소에 대한 올바른 이야기를 해줄 것 같았어요. 많은 사람에게 핵발전의 부당성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가슴이 뛰더라고요.
시간을 보니 이미 행사는 진행 중이었다. 집에 가서 짐을 부리고 나니 마칠 시간이 되어가는 것 같아 잠시 망설였지만, 서둘러 콜택시를 불러 행사장인 강원대로 향했다. 강당에 들어서자 계단까지 빼곡히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옥분씨가 자리를 잡자마자 "이제 마지막 질문을 받겠다"라는 사회자의 멘트가 귀에 꽂힌다. 무조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같이 손을 든 청년에게 마지막 질문 기회가 주어졌다. 대학생의 질문은 간단했고 법륜스님의 답변도 짧았다. 이제 마치겠구나 싶어 포기한 옥분씨가 짐을 챙겨 나오려는데 법륜 스님이 "저 뒤에 계신 아주머니 질문하실 게 뭡니까?"라며 옥분씨를 가리킨다.
그 순간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에게 핵발전소의 문제를 알리려면 반대냐? 찬성이냐? 라고 물어서는 안된다.
마이크가 옥분씨에게로 향하는 찰나의 순간에 질문을 정리했다.
"지금 삼척에는 핵발전소 건설을 두고 친구, 친척, 가까운 이웃들이 분열돼 있습니다. 스님 이걸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물었더니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그런 질문을 왜 여기에서 합니까?"라고 항의한다.
술렁거리는 강연장을 조용히 시킨 법륜스님은 좋을 질문이라며 핵발전소의 위험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어요.
'갈등, 화해 이전에 알아아 할 사실은 플루토늄이 핵무기 원료이고 수천만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위험물질'이라고 하셨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법류스님 입을 통해 나오니 속이 다 시원했어요.
시간 없다던 스님이 긴시간 자세히 핵발전소에 대해 설명하시더니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느냐"라고 오히려 삼척시민들에게 묻더라구요. 그러자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어요.
한 사람이 시작한 박수는 행사장을 꽉 메웠고 옥분씨는 감동과 전율을 느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니 감사와 감동이 밀려오더라고요. 법륜스님께 너무 감사해요.
두 번의 핵시설을 막아낸 삼척 시민들은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진 삼척시의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반핵 민주 시민후보'로 출마한 이광우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위원회 기획실장을 선택했다. 삼척 시민들의 반핵에 대한 민도가 높다는 증거였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지망생들이 핵반투위를 찾아왔어요. 무소속 김양호 시장 후보는 물론이고 시·도 의원 후보들이 노란 조끼를 입고 지지를 호소했어요.
국회의원 선거 때는 당시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한 이철규 국회의원도 반핵을 공약으로 내세울 테니 밀어달라고 했어요.
나는 반대했지만 핵반투위가 선거운동을 도왔고 당선 후 곧바로 새누리당에 복당해서 지금은 석탄발전소를 반대하는 삼척 시민들 반대편에 있어요.
뒤통수 제대로 맞은 거죠.
2014년 지방선거에서 '원전 백지화'를 내세운 김양호 후보가 원전 유치 신청한 전임 시장을 누르고 당선됐다. 당선 후 김양호 시장은 중앙정부가 삼척 원전 백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민투표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원전 확대를 추진하던 박근혜 정권은 '주민투표 불가'로 맞섰다.
삼척시는 주민투표법과 무관하게 자체 주민투표를 하기로 하고, '삼척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관리위원회'를 구성했다. 2014년 10월 9일 실시된 주민투표에서는 67.9%의 투표율에 투표자의 84.9%가 반대표를 던졌다. 주민 투표 성립 요건을 훌쩍 뛰어넘은 시민들이 투표에 참여했고 84.9%가 압도적으로 핵발전소 유치를 반대했다.
삼척시와 시민들은 '핵발전소 유치 백지화'가 삼척 시민들의 의사임을 분명하게 밝혔지만, 박근혜 정권은 2016년 주민투표관리위원회가 주민투표자금 모금한 것을 두고 기부금품모집법 위반으로, 2018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로 김양호 삼척시장을 기소했다. 삼척시장이 직권을 남용해서 공무원과 이장, 통장들에게 지시하여 주민투표 실무를 처리하도록 했다는 것이 기소의 요지였다.
그러나 1·2심 법원은 삼척시장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에서도 무죄가 확정됐다. 핵발전소 반대 투쟁의 세 번째 승리였다.
반핵 운동이 세 번이나 승리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삼척 핵발전소 반대투쟁을 하면서 절감했어요."
고 장을병 교수 고향은 삼척시 원덕읍 호산리다. 당시 성균관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던 장을병 교수는 명절에 다니러 왔다가 삼척시 근덕면에 신규 핵발전소 추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울로 올라온 장 교수는 곧바로 환경운동연합을 찾아 삼척 시민들에게 핵발전소 문제를 교육해 줄 것을 제안했고,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이 근덕면 주민들에게 한 달여 동안 핵발전소 교육을 했다. 장 교수 덕에 '근덕면 원전 백지화투쟁위원회'가 비교적 빨리 구성되었고 폭발력 있는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장을병 교수는 1980년 계엄령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해직됐다가 1984년 복직한 뒤 성균관대 총장까지 지냈다. 이후 정계에 진출해 1996년 15대 삼척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정계를 은퇴하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와 지식인 운동 등에 몸담았고 지난 2009년 숙환으로 작고했다.
투쟁 과정에서 몇 차례 이야기를 들었지만 옥분씨는 몇 해 전 호산리에 사는 장 교수의 제수씨를 만나 사실을 직접 확인했단다.
장 교수 고향인 호산리 바로 옆이 울진 핵발전소예요. 이미 핵발전소 문제를 잘 알고 있었던 분이죠. 그러니 고향 땅에 핵발전소가 들어서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던 거예요. 저는 장을병 교수 흉상이라도 세워주고 싶어요.
세 번의 투쟁을 승리로 이끈 삼척 시민 모두의 흉상이 이미 근덕면 '8.29공원'에 있지 않은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원전 백지화 기념비' 말이다.
미토 엄마와는 연락 자주해요?
옥분씨는 일본의 탈핵 운동가 미토 기요코(88)씨를 일본 엄마라고 부른다. 미토씨는 미토 이와오 교수의 부인이다. 이와오 교수는 1970년 도쿄대 교수 시절부터 반핵 운동을 하다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남편과 아들의 죽음 이후 미토씨는 배낭을 메고 외국을 떠돌던 중 2002년 대만에서 '핵발전소 필요 없다. 시모노세키 모임' 대표 사와무라 가즈요씨에게 부안 핵 폐기장반대 투쟁 소식을 들었다. 사와무라씨와 부안을 찾은 미토씨는 에너지 넘치는 부안의 반핵 운동에 감동해 일본으로 돌아온 후 노후비상금 100만 엔을 몰래 기부해 부안에서는 1000만 원의 할머니로 불렸다.
2015년 원불교환경연대의 초대로 한일 탈핵 교류 '탈핵할매가 간다'를 위해 9월 1일 한국을 방문한 미토씨와 사와무라씨 두 사람은 마침 80세 동갑이었다. 첫 방문지인 삼척에서 삼척핵반투위 사람들과 교류하고 근덕면 원전 백지화 기념비를 방문한 뒤 옥분씨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두 분 다 80세이니 가는 곳마다 팔순 잔치를 벌입시다.
그리고 전국 순회를 마친 9월 8일 마지막 밤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자발적인 축하객들을 모아 팔순 잔치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거예요. 음식과 요리는 각자 준비하고 홍보는 SNS를 활용해요.
옥분씨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영덕에서도, 영광에서도, 부안에서도 방문지마다 팔순 잔치가 열렸다. '탈핵 할매가 간다'는 한국 핵발전소 지역에서 거대한 핵마피아와 고군분투하며 투쟁하는 현장 활동가들을 격려한다는 애초의 취지를 뛰어넘어 연대와 교류가 넘쳐났다. 평생 탈핵 운동에 헌신한 팔순의 현역 선배 운동가들의 삶에 한국 탈핵 활동가들은 존경과 감사를 전했고 탈핵 할매들은 지혜와 격려를 나누었다.
출국을 하루 앞둔 9월 8일 저녁에도 SNS와 환경 활동가들의 단체 소통방을 통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각자 음식과 선물을 들고 모였다. 서울시청 앞에 도착한 미토와 사와무라씨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날이 시아버지 제사였어요. 탈핵 할매 팔순 잔치를 제안한 책임감에 일단 올라왔죠.
팔순 잔치 마치고 미토씨가 저를 끌어안으며 "You're my daughter(너는 내 딸)"라고 해서 "はい(네)"라고 대답했죠.
그때부터 미토 엄마가 되었어요."
한-일 탈핵 모녀의 탄생 또한 '탈핵 할매가 간다'가 남긴 큰 성과다.
이런 싱싱하고 깨끗한 생선을 나 혼자 먹으려니 가슴이 아픕니다. 후쿠시마 아이들은 생선도 못 먹고 마음껏 뛰놀 수도 없어요.
'탈핵 할매가 간다' 부안 방문 당시 부안 사람들과 함께 간 횟집에서 미토씨의 혼잣말이 가슴에 남았다. 방학이 되면 방사능 오염이 상대적으로 덜한 서일본 쪽에서 '후쿠시마 아이들 보양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말에 원불교환경연대 강해윤 대표는 '후쿠시마 아이들 한국 보양프로그램'을 약속했다.
2017년 일본에서는 한국 보양프로그램에 참여할 후쿠시마 아이들을 모집했고 한국에서는 프로그램과 공동기획단을 조직했다. 또래 청소년들 맞이는 대안학교 크리킨디 센터가 맡았다. 몸과 마음의 보양을 위해 맑은 바다와 하늘을 자랑하는 삼척의 옥분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옥분씨는 당연히 '콜'을 외쳤고 7박 8일 일정 중 3박 4일을 삼척 바닷가 옥분씨네 마을에서 지내기로 했다. 미토 엄마가 '후쿠시마 보양프로그램' 사업단장을 맡았다.
중학생 3명, 고등학생 3명, 대학생 2명 그리고 어른 스태프 4명의 일행이 2018년 8월 16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삼척 바다를 배경으로 일본 방한단원 한 명, 한 명을 그려 넣은 '야, 놀자' 현수막에 미토 단장 눈이 휘둥그레진다. 옥분씨가 인맥을 총동원해 정성껏 만든 현수막에는 보양단에 참여한 아이들과 미토 단장의 모습이 들어있었다.
기적의 연속이었어요.
3박 4일 12명의 외국인, 그것도 후쿠시마 아이들을 맞이해야 하는 옥분씨는 7일 동안 보양이 될까 싶었지만, 최대한 삼척의 바다와 건강한 먹거리를 준비하려고 애썼다. 무엇보다 아이들이다 보니 한국 학생들을 섭외하는 것이 제일 신경 쓰였다.
수소문을 하니 최근 일본 배낭 여행을 다녀온 대학생이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
일단 통역 문제는 해결했고 같이 놀아줄 청년들이 필요했다. 강원대 학생들을 소개받고 만났다.
아무래도 음악이나 악기 같은 것이 있으면 친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같이 부를 노래 같은 것 준비해 볼래요?
저희 밴드 동아리 멤버들이에요.
어머, 그래요?
그런데 악기는 동아리 지도교수님 허락 없으면 외부 반출이 안 돼요.
지도교수님이 누군데요? 성원기 교수님이요.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성원기 교수가 밴드 동아리 지도교수라는 사실도 놀라웠고, 눈 앞에 펼쳐진 우연은 더욱 놀라웠다. 옥분씨가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성 교수는 "내가 이렇게 쓰이려고 5년 동안 동아리 지도교수를 놓지 않았나 보다"라며 밴드 동아리와 악기 반출을 흔쾌히 허락했다.
8월 18일 우리 마을 경관 조명 설치 완료에 맞춰 비밀키친&살롱 경관 조명 오프닝 이벤트를 하더라구요. 유명 셰프의 '비밀 요리'라는 이름으로 해산물 요리를 시연하고 마침 시식 행사까지 하는 거예요. 후쿠시마 아이들을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
마을 바닷가에서 불꽃놀이 보면서 유명 셰프가 만들어 준 해산물에 저녁 만찬을 즐겼어요.
또 한 번의 우연이 필연처럼 빛났던 광경이다.
대학생이었던 후쿠시마 피난민 미쿠니는 삼척을 떠날 때 '자신의 삶을 짓눌렀던 돌덩어리를 삼척 바다에 내려놓고 가볍게 간다'라고 했어요.
환선굴 등 천연동굴도 가고, 삼척시장님 만찬도 즐기고 삼척 반투위에서 제작한 기념식수와 기념비도 원전 백지화 기념탑 옆에 세우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어요.
아이들과 부모들이 참여하는 단체 소통방에 옥분씨는 아이들 사진을 올려 안심시켰고 일본 부모들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이렇게 밝고 즐거워하는 아이들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감사 인사를 남기기 바빴다.
7박 8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마중 나간 부모들은 풀이 죽어 공항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 모습에 "재미없고 힘들었나?"라고 생각했었단다. 엄마, 아빠를 만난 아이들은 "오기 싫었어요. 한국으로 다시 가고 싶어요. 삼척에서 살고 싶어요"라며 떼를 썼다고 한다.
다음 해 자매 중 동생인 한나는 무주의 대안학교로 유학을 왔고, 그 후 언니 미쿠니도 한국을 몇 차례 다녀갔다. 그사이 옥분씨도 탈핵 연대 등의 일로 일본에 갈 일이 생기면 아이들과 부모님을 만났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에게 왜 이렇게 친절한 건가요? 인생에서 보물 같은 7일이었어요.
까맣던 나의 인생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어요.어디를 가든 희망으로 넘치는 하얀색 말이에요.
후쿠시마를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었고 우리에게 관심 갖는 사람들이 많아서 고마웠어요. 살아갈 힘을 얻었어요.
7일의 기적을 일군 '후쿠시마 보양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아이들이 남긴 후기다. 삼척의 바다와 옥분씨의 정성이 일군 기적이기도 하다.
옥분씨는 예쁘고 손에 잡힐 듯 아기자기한 바닷가 마을에 산다. 파란 고래가 모래사장과 접한 벽면을 활기차게 채우고 바닷물에 밀려온 조개껍데기와 고동, 플라스틱 소품들로 구성된 모빌이 벽면 한 쪽을 장식한다. 집 앞 모래사장에 버려진 아이들 장난감이며 앙증맞은 슬리퍼도 담벼락에 걸치면 훌륭한 소품이 된다.
이 집의 압권은 장독대에 장독 대신 자리한 파라솔이다. 식탁에는 잠시 쉬러 왔던 손님들이 두고 간 온갖 차가 올라오고 마당까지 연결한 스피커에서 남미 음악이 흐르면 동화 속 어디메쯤인 듯 착각하게 된다. 바다와 모래사장을 정원으로 가진 세상 부러운 것 없는 옥분씨는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역사가 쓰였는지 모른다고 회상한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에 오셨잖아요. 그때 바로 이 자리에서 성원기 교수랑 예수회 조현철 신부님이 막걸리 한 잔하다가 탈핵 도보 순례단이 교황님을 맞이하자고 결의했어요.
2014년 8월 15일 대전에서 수만 명이 모이는 미사에 맞춰 6월 30일 부산 고리 핵발전소에서 출발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모승천대축일 미사가 열리는 대전 월드컵 경기장까지 탈핵 희망 도보 순례를 하기로 했다. 사전 작업으로 교황 방한을 준비하는 한국 주교단에 한국 핵발전소 문제를 알리고 메시지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속한 수도회가 예수회라 조현철 신부를 중심으로 서한을 작성하고 전달하기로 했다.
40여 일을 걸어 탈핵 도보 순례단이 대전 월드컵 경기장 앞까지 갔지만 결국 행사장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메시지는 전달되었고 교황님도 핵발전소에 대한 우려의 입장을 밝혔단다.
본인을 극소심 형, 겁쟁이라고 명명하는 옥분씨가 탈핵과 탈석탄 현장에서 용기를 낸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결혼 전 연극이나 보러 다니고 바닷가 마을 출신 친구 덕에 삼척을 들락거리던 옥분씨는 어느 일요일 2층 자신의 방에서 내려다 보다 사람들이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로 가는 것을 보고 의문과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저들이 가는 저 길에 무엇이 있길래 저리로 몰려가는지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그러던 중 성당에 다니던 앞집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가톨릭 장례 미사는 조용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마침 집에서 가까운 곳에 신축한 자양2동 성당이 문을 열었고 '호기심 천국' 옥분씨는 궁금증을 풀러 성당 문을 두드렸다. 아일랜드에서 시작한 골롬반선교회 소속 성당이어서 그런지 주임 신부님 또한 아일랜드인이었고 궁금해서 알아보러 왔다는 옥분씨에게 '많이 알아보라'고 웃으며 맞아주었다. 첫 인연이 된 유데스 신부님은 마음 약한 옥분씨가 탈핵 운동에 뛰어든 것을 보고 기도로 힘이 되어주셨다.
그렇게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옥분씨는 신앙인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탈핵 운동도, 탈석탄 운동도 부정의에 대한 신앙인으로서의 당연한 저항일 뿐이다. 석탄 발전소가 가동되면 송전탑 건설이 불가피하다. 그러니 '탈석탄 운동'과 '탈송전탑 운동'은 세트다. 탈핵 운동 또한 마찬가지다.
석탄발전소가 비록 시범운전에 들어갔지만 반드시 멈추게 할 거예요. 그게 정의잖아요.
삼척에 있는 두 성당 모두 골롬반선교회에서 설립했다. 우연 같은 필연이다. 옥분 씨에게 '탈탈탈' 운동은 신앙 실천이다. 늘 이긴다고 기도하고 행동한다.
우리마을 사람들이 그물을 만드는데 코를 꿰어서 서로를 연결해요. 그물을 풀어보면 한줄로 연결되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그처럼 연결되어 있으니 얼마나 소중한 인연이예요?
무해한 바닷가에서 무해한 옥분씨가 물장구 치고 노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