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서울>
누구나 삶에서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을 거다.
그럴 때마다 다른 이들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살기 위해 도망쳤나,
그것도 아니라면 고통이 나를 밟고 지나갈 때까지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견디어내기만 했나.
미지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쳤다.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세계로부터, 한 번의 실패로 나의 모든 것이 망가진 듯 구는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는 문고리를 단단히 걸어잠궜고, 그곳으로부터 몇 년간 단 한발자국도 걸어 나오질 않았다.
그후 제 발로, 제 의지로 다시 세상 밖으로 걸어나온 미지는 모든 게 괜찮아진 것처럼 보였다. 비록 이전의 영광도 인기도 모두 가셨지만, 그딴 것 없어도 충분히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지에게 찾아오는 절망의 순간은 여전히 끝이 없다. 미지는 매순간 넘어지고, 절망하고, 도망친다. 또다시 자신을 속이고, 거짓말을 한다.
나는 단 한번의 커다란 고통을 겪으면 삶이 완전히 뒤바뀔 줄 알았다. 그게 마땅했고, 당연했다.
영화가, 미디어가 그렇게 가르쳐주었으니까. 영웅은 누구나 한번의 성장통을 겪고 행복해지니까 - 내 성장통은 끝났다 생각했다.
그러나 삶은 영화가 아니었고, 나는 영웅도 아니었다.
한 번의 고비가 끝나면 또다른 고비가 찾아오고, 이번엔 정말 괜찮아졌다 생각하면 저 멀리서 또다른 파도가 서서히 밀려온다. 휩쓸려갈 준비를 하라는 듯이
인생 처음으로 도망치고 싶다 생각했던 곳은 집이었다. 내게 집이란, 안전하고 평온한 공간이 아니었다. 매순간 평가받고, 존재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숨이 자주 막혔다.
하지만 첫 탈출 시도는 장렬히 실패했다. 스스로도 먹이고 재울 줄 모르는 아이는 도망쳐봤자 제 명줄을 깎을 뿐이었으니. 머리가 조금 더 큰 뒤에야 제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회사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 같다. 팀원이 싫어서, 일이 힘들어서, 와 같은 단순한 이유로 치부하기엔 “도망친다”는 화려한 동사는 여간 어울리지 않는다.
복잡스러운 이유는 차치하고, 이곳에서의 나는 존재가치를 잃었다. 이곳에서의 나는 죽어있는 것 같다. 숨을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다.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는데, 이야기가 날 숨쉬게 해줬듯이, 누군가에게 숨통을 틔여 주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는데. 이야기와 자꾸만 멀어지는 일도, 일상도 나를 자꾸만 가라앉히고 죽이는 것 같다.
하지만 죽을 것 같을 때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때마다 매번 도망치는 방법으로 일을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 또한 공존한다.
우린 고통을 견디어야 강해질 것이란 믿음을 주입받고 살아온 사람들이니까. 어쩌면 이 숨막힘이 나를 더 넓은 공간으로 인도하진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희망이 도망치려는 내 발목을 잡는다.
미지가 그랬던 것처럼, 삶의 성장통은 한번으로 끝나진 않는 것 같다. 그리하여 도망치고 싶은 순간은 앞으로도 쉴 새 없이 나를 찾아올 것이고 - 그 무궁무진한 순간들 속에서 나는 도망칠 것인지 버티고 서서 견딜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살고 싶어서 도망치는 건 용기라는 대사가 나온다. 비난받을 이유도 없고, 멋있는 짓이라고.
타고난 천성이 도피주의자에 가까운 나는, 아마 전에도 그랬듯,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나를 살릴 것 같은 곳으로 도망치겠지. 도망칠 곳이 없다면, 적어도 도망치고 싶은 곳으로부턴 벗어나겠지. 설령 벗어난 곳이 내게 또다른 도피의 욕망을 심어준다고 하더라도 - 그곳에서 또다시 도망칠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더라도.
그러니 삶은 어쩌면 살기 위한 도피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내내 괴로움을 안고 사는 인간은 각자의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는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질 때에서야 어리석게도 나는, 고통받는 것은 나만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르니, 다들 그렇게 견디며 사는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