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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대동여지도’, 민족주의가 굳이 필요했을까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투쟁의 서사다. ‘알 권리’를 사수하고자 하는 김정호와, 대중의 알 권리보다는 국가가 지도를 관할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흥선대원군, 마지막으로 지도를 손에 넣어야만 흥선대원군과의 정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 안동 김씨 가문. 이렇게 삼자간의 투쟁기다.     


김정호가 팔도 전국으로 방방곡곡 발품을 팔며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건 그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김정호는 잘못된 지도 때문에 한겨울에 얼어 죽은 아버지처럼, 잘못된 지도 정보 때문에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는 민초를 위한 전국 각지의 정보를 무료로 제공하기 위해 공익의 마인드로 대동여지도를 만들고 목판에 목숨을 건다.     

반면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지리가 정밀하게 표기된 대동여지도와 같은 전국 지도는 대중에게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인물이다. 일본과 청, 러시아와 같은 외세에 대동여지도가 손에 넘어가면 외세가 조선의 지리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고, 국가 안보가 흔들릴 수 있다고 보는 국가 존립의 차원이 걸린 문제라고 보기에 흥선대원군은 김정호에게 대동여지도를 비싼 가격에 팔라고 회유한다. 대중이 전국의 지리를 정확하게 알 권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국가 안보가 걸린 문제가 더욱 중요하기에 대동여지도는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안동 김씨 가문이 대동여지도를 손에 넣으려는 의도는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함도 아니고, 국가 안보가 걸린 문제라고 판단함도 아닌, 흥선대원군과의 정쟁에서 우위에 있고 싶어서다. 김정호와 흥선대원군이 대동여지도를 간직하고자 하는 욕구에 비해 안동 김씨 가문이 대동여지도를 손에 넣고자 하는 의도는 가장 저열하고 이기적인 셈이다. 공익을 위한 것도 아니고 단지 가문의 영광을 위한 차원이었으니 말이다. 김정호와 흥선대원군, 안동 김씨 가문 이 삼자가 대동여지도를 손에 넣으려는 동기만 비교한다면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투쟁의 역사’로 읽을 수 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또 하나의 투쟁의 서사로 읽어볼 수 있다. ‘인정 투쟁’이다. 대동여지도에 미친 아버지 김정호에게 딸 순실은 지도가 중요한가, 딸이 중요한가를 아버지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부성애를 다른 곳에서 충족받기 위해 순실은 다른 곳에서 대리 만족을 추구하다가 큰 위기를 맞기도 한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부분을 다른 곳에서 충족 받고자 하는 인정 투쟁 말이다.     

이는 <고산자, 대동여지도>뿐만 아니라 외화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날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캐릭터는 붉은 여왕.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만 같은 붉은 여왕도 알고 보면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그리워한 가엾은 캐릭터다.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김정호의 딸 순실,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붉은 여왕 두 여성 캐릭터는 모두 인정 투쟁에 목말라하는 캐릭터들이다.     


한데 영화는 김정호의 지도를 향한 열정만 강조했어도 되는데 하나를 더 첨가한다. 그건 바로 ‘민족주의’다.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녔지만 그가 가보지 못한 곳은 딱 한 곳, 독도다. 영화 안에는 그가 독도를 가기 위한 여정에서 갖은 고초를 당하고 안동 김씨 가문에게 시빗거리를 제공할 단초를 마련하게 되는데, 영화에서 의문이 가는 것은 영화가 김정호의 열정에만 집중해도 충분했을 것을 왜 굳이 민족주의적인 테제를 집어넣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한반도>의 필이 스며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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