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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사랑 지상주의에  똥침을!

여자는 뮤즈로 남길 바라지 에로스가 되길 바라지 않아

음악을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가이’, 한데 그는 사랑하는 음악을 놓아야 할 위기에 처했다. 사랑하던 여자가 가이를 떠나자 가이는 그녀에게 음악을 들려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음악을  계속해야 할 당위성을 상실한다.


어쩌면 가이에게 있어 중요한 건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들려주는 대상을 잃어버렸다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주지 않는 음악은 가이에게 있어 음악으로서의 구실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런데 실의에 빠진 가이에게 다른 여자가 나타난다. 그리고는 왜 이렇게 좋은 음악을 더  이상하지 않느냐고 다그치고는 죽어버린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불타오르게 만든다. 그녀의 이름은 ‘걸’. 가이는 여자로 말미암아 음악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다른 여자인 걸을 만남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 생에 대한 열정을 재확인하고 다시금 음악을 시작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가이는 음악을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다. 음악을 사랑해줄 대상인 여성이 있을 때에야 그가 만든 음악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기에 그는 음악을 사랑한다기보다는 그가 만든 음악을 사랑해줄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처럼, 그녀가 가이의 음악을 사랑해 주었을 때 음악은 가이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원스’의 세계관 안에서는 가능할 것이다. 음악이라는 대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음악을 들어줄 피플, 사람이 음악보다 소중한 게 ‘원스’의 세계관 안에서 작동한다.

그러다 보니 주도권을 잡는 건 가이보다는 걸이다. 아니, 남성보다는 여성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확할 듯하다. 사랑하는 여자가 멀어짐으로 남자는 상처를 받았지만, 다른 여자인 걸로 인해 다시금 생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니 가이는 주체적으로 음악적인 생을 영위하는 게 아니라 여성이라는 타자에 의해 그의 음악 인생이 죽어가기도 하고 다시 되살아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은 가이의 바람대로 가이의 여자로 순순히 포섭되지 않는다. 이는 걸이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한 관계로 체코어로 가이에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할지언정 가이에게 좋아하는 속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애를 태운다.


음악적으로 죽어가는 가이를 살리는 ‘뮤즈’가 되기는 해도 걸이 가이의 ‘에로스’가 되어 가이와 합일하는 건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죽어가는 가이의 창작욕을 일으켜주는 동인(動因)은 허용하지만, 가이에게 모든 걸 내어주는 사랑으로서의 합일은 허락하지 않는 이가 걸이다.

걸의 이런 전략은 자신의 모든 걸 사랑하는 남자에게 바치고도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진 까미유 끌로델의 ‘사랑 지상주의’와는 대척에 놓인 전략으로 해석 가능하다.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에게 미술적인 영감과 사랑 둘 다를 제공했지만 돌아온 건 사랑의 비극이었다. 


하지만 걸은 까미유 끌로델처럼 가이에게 음악적인 영감을 제공하기는 해도 그에게 걸의 육체와 마음은 내어주지 않는 일정 부분의 절제를 선택함으로 걸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흡수당하지 않는 현명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원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걸 바치지 않고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어가는 음악적인 재능을 되살릴 줄 아는 걸의 현명한 처신으로도 읽어볼 법한 뮤지컬이다. 사랑이 모든 문제를 말끔하게 씻어주고 해결해 줄 것이라는 ‘사랑 지상주의’와는 달리, 사랑한다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남자를  기사회생시킬 줄 아는 여성의 기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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