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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 커버넌트’ 마이클 패스벤더는 천우희?황정민?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칭하지만 우주에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보란 듯이 ‘숙주’로 삼는 고약한 생명체가 있다. 우주 동충하초(冬蟲夏草) ‘에이리언’은 인간의 가슴을 뚫고 나옴으로,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숙주에 불과할 수 있음을 지난 세기 영화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우주 버전 동충하초 SF인 에이리언이 세계 극장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호러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해가 바로 1979년이다.     

에이리언 4부작이 SF 호러였다면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1편의 감독인 리들리 스콧이 메가폰을 잡는 에이리언 시리즈의 프리퀄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에이리언: 커버넌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작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선지식이 있으면 관람에 도움이 될 듯한데, 전작과 이번 후속작인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캐릭터가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 데이빗이라는 점은 전작과 이번 작품의 여주인공인 엘리자베스 쇼와 대니얼스가 갖지 못한 결정적인 열쇠를 인공지능이 갖고 있음을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전작 ‘프로메테우스’ 속 데이빗을 상기해 보라. 그는 아시모프가 제안한 로봇 3원칙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간에게 위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무시한 채 할러웨이 박사로 하여금 외계의 이물질을 마시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데이빗이 에이리언 프리퀄 시리즈의 1편과 2편을 관통하는 연결고리가 된다는 점은, 표면적으로는 엘리자베스 쇼와 대니얼스가 영화 속 여주인공으로 보이지만 실은 데이빗이 이번 프리퀄 시리즈의 키메이커, 핵심을 담당하는 캐릭터라는 점을 보여준다. 에이리언 1편과 2편의 인공지능은 리플리에게 제압당하거나 리플리를 돕는 보조적인 캐릭터였다. 하지만 프리퀄 1. 2편의 인공지능은 본편의 인공지능이 갖던 보조적인 역할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두 편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만일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인간의 역할이 부각하길 바랐다면 영화는 전편의 유일한 ‘인간’ 생존자인 엘리자베스 쇼를 이번 신작의 연결고리로 활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전작의 여주인공을 연결고리로 삼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후속작인 이번 영화에서는 그림자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되레 인공지능 데이빗이 엘리자베스 쇼와 대니얼스의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한술 더 떠, 전작에서 할러웨이에게 몰래 외계 액체를 마시게 만든 생체 실험의 장본인인 데이빗이 이번 영화에서는 위기에 빠진 커버넌트 승무원에게 은닉처를 제공하는 ‘구원자’ 역할을 담당한다. 전작의 악역인 데이빗이 이번에는 반대로 인간을 돕는다면 데이빗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데이빗이 ‘곡성’의 천우희일까, 아님 황정민일까는 영화를 통해 확인하길 바란다.     


인간을 만든 창조자인 ‘엔지니어’에 대한 구체적인 카드가 이번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제시될 줄 알았던 관객이라면 프리퀄의 마지막 시리즈를 통해 보상받길 바란다. 아쉽지만 엔지니어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도 리들리 스콧이 거절하고 있기에 말이다. 창조자에 대한 해답을, 관객과 엘리자베스 쇼는 언제쯤에나 파악할 수 있을까.     

리들리 스콧이 메가폰을 잡는 에이리언 프리퀄 시리즈는 전작에 대한 이해도가 불분명하거나 관람을 하지 않은 채 신작을 관람한다면 이해가 불분명하거나, 혹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퍼즐로 관객을 몰고 가는 시리즈다. 에이리언 본편 시리즈가 전편을 숙지하지 않고 관람하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했다면, 이번 프리퀄 시리즈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 두 연결 고리 가운데 하나라도 놓치면 앞으로 나올 프리퀄 최종 작품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퍼즐로 몰고 가는 시리즈라 할 수 있겠다. 리들리 스콧은 프리퀄 첫 작을 통해 미끼를 던졌지만,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간의 창조주에 대한 미끼를 덥석 문 관객을 놓아줄 생각을 도무지 하질 않는다.


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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