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엔 동네 친구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매번 어느 순간에든 그 자리에 있는 친구. 휴대폰이 없어도 어디에 있는지 직감으로 알 수 있는 친구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오래 전, 내가 못하는게 뭔지 알게 해줌과 동시에 나와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이 뭔지 알게 한 어떤 한 친구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잊혀진 친구들의 무리가 다시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고맙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그 속에 내가 있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보기가 더욱 어려운.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칠월여 안생七月與安生"이란 제목으로 선개봉 후,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바꿨다. 우리나라는 왜 '소울푸드' '소울메이트'를 버리지 못하는 걸까. 우리나라에 비슷한 이름의 드라마가 있다. 그 드라마는 성인의 삶을 다루고 있고 현실적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다시 보면 그렇게 현실적이지 않더라. 삶엔 고민이 있다. 그 고민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서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부끄러웠다.
주인공 두 사람이 동시에 중국 3대 영화제인 금마장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었던 이 영화는 어느 누구 하나가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논하기엔 그 스트레스가 여실히 느껴진다. 어떤 역할이든 다 연기하기 매우 어려운 캐릭터다. 그만큼 현실적이고 비슷한 고민을 우리는 겪고 성장해오고 죽어간다. 그렇게 나는 이 영화에 박수를 보내고, 영화를 다 본 다음에 바로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너랑 나 같은 영화가 나왔어."라고.
우리의 부모님은 언제부터 서로의 존재를 모르게 되었을까.
어릴땐 신기하게 친구랑 우리 부모님이 서로를 아셨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괜히 있었던게 아니다. 이제는 '이웃주민' 또는 '남남'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지만, 예전처럼 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절엔 지역주민들은 거의 비슷한 직장, 산업군에 종사했고, 그만큼 서로가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심지어 휴가날까지 비슷했으니, 말 다 했다. 지금에는 서로의 생활방식이 다르고,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 휴가가 언젠지는 알지 못하게 되었지만, 예전엔 친구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은 서로를 알고 인사를 주고 받는 사이였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서도 그런 모습이 등장한다. 열세살의 어린나이(캣초딩). 장난스러운 두 꼬마아이가 친구가 되고, 서로의 집을 오가며 서로 다른 자신의 삶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칠월의 부모님은 안생에 대해 알게 되고, 혼자 고독하게 삶을 짊어진 안생을 격려한다.
그렇게 가까워진 친구 사이를 13살부터 27살에 이르기까지, 약 15년간 따라가는 이 영화는 지금 나이의 어린 친구들보다는 80년대생이 격공할 것이라 생각한다. 휴대폰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친구를 찾아가는게 익숙했던 시절을 추억하고자 하는 이들이 공감하기에 편한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2G폰, 친구에게 꾸준히 편지를 쓰는 모습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기다림이 주는 느낌이랄까.
세상에 둘 뿐이었던 그들. 키도, 심지어 가슴 크기조차 비슷했던 그들이었지만 자라면서 각자가 선택하는 삶은 점차 달라진다. 선택한 것이 맞지만, 선택하게 되었단 표현도 맞아떨어진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자란 칠월은 명문대 입시를 준비하는 열공모드 고등학생으로, 돈과 삶의 해방이 그리웠던 안생은 직업학교에서 미용을 배우며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점점 달라져간다.
항상 같은 곳을 바라보던 우리, 첫 어긋남
사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진학하고, 회사를 옮기면서 계속 다른 사람들과의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나와는 다른 삶, 나와는 다른 사고방식. 생각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어울리는 건 아니다. 어릴 때처럼 모든게 같지 않은 서로의 모습 때문에 갈등이 빚어지고, 서로를 떠나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두 주인공도 갈등 속에 서게 된다.
어느 시트콤처럼 "너, 내 친구에게 잘하는지 두고 보겠어."라며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으름장을 놓은 안생에게 반한 칠월의 예비 남자친구. 그것도 모른채 고백한 칠월과 그 남자는 사귀게 되고, 그런 애매한 삼각구도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사이가 아닌 [참아내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그 긴장을 견디다 못한 안생은 칠월을 위해 고향을 떠나고, 칠월은 그렇게 떠나는 안생을 끝내 잡지 않는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떠나주길, 사라져주길 바라는데 표현을 할지 말지 망설이는. 하지만 막상 떠나면 붙잡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를 하게 되는 관계. 물론 예외도 있다.(눈치)
모범생 답게 고향에 안주한 칠월과 구속되던 삶을 벗어나 일탈 속을 헤매는 안생의 삶은 서로 떨어져 있는 사이, 격차를 좁히기 어려울 정도로 더 벌어져 버렸다. 남자친구를 찾아 도시에 우연히 들르게 된 칠월, 그리고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안생. 그렇게 칠월은 또 다시 안생과 등을 돌리게 된다. 가명 쓔레기(칠월 남자친구 이름 = 가명).
안생과 칠월, 이름처럼 살자
영화를 보는 내내 안생이 안쓰러우면서도 처절하게 느껴졌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안생의 삶은 먹이를 먹을 줄도, 뛰는 방법도 모르는 작은 새끼 고양이 같다. 이것 저것, 자신의 분수에 대한 제한을 두고 처절하게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손을 잡아주고, 천천히 걸음마를 시작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칠월, 이름처럼 생그럽게 살자. 칠월을 보면서 나의 열등감도 함께 폭주했다. 열등감을 많이 느낀건 안생보다 칠월의 쪽. 열심히 해야 겨우 나아가고, 틀에서 벗어나본적 없던 칠월에게 안생은 생그럽고 밝고 자유로운 모습을 동경하게 한다. 그렇게 안생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서야 칠월은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게 된다.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었을 때, 그 순간부터 우리는 더 다른 삶으로 나가아게 된다.
항상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생각했던 우리는 첫 어긋남을 경험하게 된다. 그게 곧 여물거라 생각하지만 그게 시작이다. 그때의 상실감은 잠시 뿐, 우리는 더 큰 상실감을 여러번 경험하게 된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우리의 [달라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두렵다.
이 영화를 보기 얼마전, 친구와 크게 다투었다. 자꾸만 나를 부럽다고 하는 친구.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던 그 친구는 얼마나 마음 속에 [지쳤다]는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는 걸까. 그 친구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특히 칠월을 보고 나면 어떤 생각을 할까?
칠월이 침대에 누워 안생을 바라보며 울면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도 너처럼 자유롭고 싶어."
더 이상 자유롭지 않은 [안생]의 삶을 살아가는 안생에게, 칠월은 철지난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내보인다. 고백한 열등감은 더 이상 열등감이라 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그래프 폭이 겹쳐진 순간이 아주 짧았던 순간이었지만, 그들에게 함께라는 안도감을 주었다면, 그걸로 다행.
그렇게 그들은 세 번째 이별 인사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