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벡 남편은 2012년, 노동자 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와 5년을 일했고, 결혼 후에도 공장과 인력사무소를 전전하며 십여 년을 묵묵히 보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았던 결혼 초, 친정의 도움을 조금 얻어 대출을 안고 오래된 집 하나를 마련했는데, 그 집은 낡았지만 우리가 함께 살아갈 출발점이 되어주었다.
결혼 초, 석 달 남짓 우즈베키스탄 시댁에서 지낸 시간이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 인생을 뒤흔든 경험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했을까,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마음속에 삼켰다.
한국으로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들었고, 불빛 하나 없는 시골 마당에 서서 서럽게 울던 밤도 많았다.
그 와중에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치안을 걱정하며 두리번거리던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기도 하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알게 되었다.
그 절망 같았던 경험이 내게 처음으로 “나는 달라져야 한다”는 다짐을 안겨준, 황금 같은 시간이었음을.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처음으로 돈 공부라는 것을 시작했다.
부동산 책을 읽고, 강의를 찾아 듣고, 독서 모임에도 나가 보았다.
직장을 다니며 월급에서 100만 원씩 저축하면 충분하다 여겼던 내가, 어느 순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
돈을 더 벌고 싶다,
잊고 있던 꿈을 다시 꿔보고 싶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서른 살의 나는 그렇게 달라지기를 원했고, 그 생각이 이후의 삶을 조금씩 다른 길로 이끌었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늘 순탄하지는 않았다.
결혼 초 5년은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살림과 육아를 같이 하다 보니 크고 작은 갈등이 생겼고,
결국 남편과의 다툼으로 번지는 날도 많았다.
그래도 우리가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 늘 절약하고 아껴야 했던 남편이었지만,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때로는 짠해 보였고, 동시에 우리가 버텨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기도 했다.
이제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남편은 오래 품어왔던 꿈을 꺼내 한국에서 식당을 열었고,
나는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따내며 또 다른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곁에서 놓치고 싶지 않아 시작했던 온라인 활동은 결국 내가 오래 마음속에 품어왔던 목표 중 하나였던 ‘월 천만 원 수익’이라는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이 길이 결코 늘 일정하거나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떤 달은 원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아 불안하기도 했고, 또 어떤 달은 기대 이상으로 채워져 놀라기도 했다. 다만 분명한 건,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내가 스스로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감각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우즈벡 남편과 함께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힘든 일이 지나고 나면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음을 배운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조금은 가볍게 여겨야 한다는 것,
상대를 바꾸려 애쓰기보다 내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는 것,
그 단순한 진리를 몸으로 익히며 살아온 것 같다.
킬른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며, 때로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나라는 사람의 일부이자 정체성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다시 외국인 시어머니와 한집살이를 시작했는데 예전 같았더라면 남편을 붙잡고 불평을 늘어놓으며 사소한 일에도 다툼으로 번지는 날이 많았을 텐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남편과 둘만 지낼 때보다 시어머니가 곁에 계신 지금이 더 든든하고, 때로는 더 편안하게 느껴질 때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