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윌리엄스,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https://youtu.be/ihx5LCF1yJY?si=VTMRc7bvxQuxwexp
1.
주가가 치솟고 있다. 매일같이 불장이다. 증권사 앱을 열 때마다 붉은색 숫자들이 춤을 추고, 코인 시장은 24시간 쉬지않고 돌아간다. 주말도 없고 공휴일도 없이, 사람들은 새벽까지 차트를 보며 마음을 졸이고 있다. “잠들어 있는 동안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걱정으로 밤새 잠을 설친다.
SNS 타임라인을 내리다 보면 농담처럼 올라오는 “비트코인 떡상 기도” 게시글들이 보인다. “주여, 이번 한번만 도와주세요.”, “하나님, 고점에서 물렸어요. 살려주세요 ㅠㅠ” 이모티콘과 함께 올라오는 이 ‘기도’들은 반쯤은 자조 섞인 농담 같지만, 완전히 근거 없는 가짜 기도만은 아니다. 농담인 듯, 남의 이야기인 듯 꾸며 올리지만, 그 속에는 비굴한 농담이라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길 바라는 깨알같은 희망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내가 산 주식이, 코인이, 금이, 펀드가 오르기를. 제발 오르기를!
이것을 기도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형식은 기도의 언어를 빌렸지만 내용은 주문에 가깝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지만, 이 ‘떡상 기도’는 내 욕망의 성취를 요구하는 탐욕적 행위다. 하나님은 욕망을 들어주시는 ‘도깨비 방망이’같은 수단이 되고, 목적은 오로지 돈이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ATM기로 전락시키는 불경한 행위다. 카드를 넣고 버튼을 누르면 돈이 나오기를 기대하듯이, 기도를 드리면 주가가 오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2.
새벽 3시, 침대 옆 탁자에서 스마트폰이 희미하게 빛난다. 손을 뻗어 화면을 깨운다. 업비트 앱을 열고,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점멸하는 차트를 응시한다. 비트코인이 10분 전보다 2% 떨어졌다. 가슴이 철렁한다. 팔아야 할까? 아니면 더 떨어질까? 혹시 지금 자는 동안 더 떨어지면 어쩌지? 눈을 감아보지만 차트의 붉은 기둥이 눈꺼풀 아래서 춤을 춘다. 잠이 오지 않는다. 다시 액정을 깨워 화면을 확인한다. 이번엔 1% 올랐다. 가라앉은 마음이 밝아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는다. 시장은 잠들지 않기에 사람도 잠들 수 없다.
이것은 2025년 대한민국의 흔한 풍경이다. 암호화폐 거래소는 24시간 365일 돌아간다. 주식 시장이 닫힌 저녁에도, 주말에도, 명절에도 코인 시장은 멈추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시차를 따라 세계는 쉬지 않고 돈을 거래하며, 그 거래에 자신의 돈을 걸어놓은 사람들은 밤이 깊도록 잠들 수가 없다. 혹시 자는 동안 폭락하면? 혹시 급등하는 순간을 놓치면? 불안은 수면을 삼켜버린다.
안식의 상실이다. 주식과 코인은 현대판 우상이다. 끊임없이 마음을 옭죄고, 즉각적 기쁨과 좌절을 안겨주며, 실시간 확인해야만 하는 신. 잠시라도 한눈을 팔거나 손을 놓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사람들을 붙들고 있다.
성경은 기록한다. “엿새 동안은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라”(출애굽기 23:12). 안식일은 단순히 달력에 새겨진 공휴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신학적 선언이다. 세상은 내가 일하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의 고백인 동시에, 고된 노동에서 놓여나 하나님만 깊이 생각하고 공동체적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허락된 절대적 시간의 확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붙들고 계시기에 우리는 손을 놓고 쉴 수 있으며, 가축과 같은 노동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인간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24시간 쉬지 않는 시장은 정반대의 신학을 가르친다. 네가 잠시라도 손을 놓으면, 네가 감시하지 않으면 한번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겁박한다.
3.
비트코인의 가격은 하루에도 수십 번 요동친다. 30% 오르는 날이 있고, 40% 떨어지는 날이 있다. 이것을 변동성(volatility)이라고 부른다. 전통적인 자산, 예를 들어 은행 예금이나 국채는 변동성이 거의 없다. 주식도 하루에 10%씩 오르내리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암호화폐는 다르다. 극심한 변동성이 특징이다.
투자자들은 이 변동성에서 기회를 본다. 변동성이 크다는 것은 큰 수익을 낼 기회도 크다는 의미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큰 손실의 위험도 크다는 뜻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전자만 보고 후자는 무시한다는 점이다.
사실 변동성은 심리적 폭력이다. 오늘 아침 내 자산이 1억이었는데, 저녁에는 7천만 원이 되어 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다시 1억 2천이 되었다가, 점심에는 8천으로 떨어진다. 이런 롤러코스터를 타는 사람의 심리 상태는 어떨까? 안정될 수가 없다. 늘 긴장하고, 늘 불안하고, 늘 조급하다.
성경은 묻는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7). 걱정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나 걱정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변동성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늘 걱정한다. 떨어질까봐, 오를 기회를 놓칠까봐, 남들은 벌고 나만 손해 볼까봐. 이 걱정들은 하루하루를 소진시킨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경고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3-15).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 미래는 우리 손에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돈을 섬기든지, 그리스도인이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4.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공동체 중심이었다. 가족, 마을, 교회. 개인의 성공보다 공동체의 화평이 중요했다. 그러나 암호화폐 투자는 극도로 개인주의적이다. 게시판에서는 “내가 들어가면 떨어진다”, “친구는 1억 벌고 익절했다는데 나만 3천 잃고 손절”식으로, 남과 나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글도 심심찮게 보인다. 각자 자기 계좌에 돈을 넣고, 각자의 정보력과 기술력을 통원하여, 각자 손익을 본다. 누군가 벌었다면 누군가는 잃는 것이 이 시장의 법칙이다. 친구의 성공은 나의 실패를 더 비참하게 느끼게 한다. 시기, 질투, 원망과 같은 못난 감정들이 관계를 갉아먹는다.
이제는 익숙해진 ‘영끌’이라는 단어는 ‘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뜻으로, 모든 자산을, 심지어 대출까지 받아서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 ‘빚투’는 ‘빚을 내서 투자한다’는 의미이며, ‘약간 따기-다 잃기-빚 내기’를 반복하는 도박 중독자의 행동 패턴을 나타낸다. 판단력을 잃은 사람은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더 큰 판에 뛰어 들고, 결국 더 큰 손실을 본다. 영끌과 빚투 굴레의 결과는 파산, 가장 파탄,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상황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누가복음 12장 15절은 경고한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사람의 생명은 그가 소유한 것에 있지 않다. 내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가 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정반대를 가르친다. 너의 가치는 너의 자산이며, 너의 계좌 잔고가 너의 성공을 증명한다고.
이런 사회적 가치관이 기준이 될 때 공동체는 해체된다. 사람들은 친구 아닌 경쟁자가 되고, 관계는 신뢰 아닌 손익 계산이 된다. 초대 교회는 달랐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며”(행 2:44-45)라고 기록한다. 극단적인 공평과 나눔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의 보편 정신이다. 사랑으로 묶인 사람들은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진다. 너의 유익이 나의 손해가 아니라 모두의 기쁨이 되는 세상,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다.
6.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어디에 있는가?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은 무엇이며, 둘은 어떻게 다른가? 땅의 보물은 잃어버릴 수 있다. 좀이 먹고, 녹이 슬고, 도둑이 훔쳐간다. 현대적으로 번역하면 인플레이션이 가치를 깎아먹고, 시장 붕괴로 증발하고, 사기꾼이 가로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암호화폐 시장의 해킹과 조작 사건, 거래소 파산, 폰지 사기들. 땅의 보물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하늘의 보물은 다르다. 그것은 잃어버릴 수 없다. 하늘의 보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사랑, 정의, 자비, 거룩함과 같은 영원한 가치들이다. 이것들은 시장이 폭락해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으며, 계좌가 텅 비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공동체를 배제한 채 개인적으로 취할 수 없으며, 비윤리적 방식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가치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있다. 내가 비트코인에 전재산을 걸어놓았다면 내 마음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예민하게 차트를 확인할 수 밖에 없고, 마음 편히 잠들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거기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 보물이 하나님께 있다면, 내 마음도 거기 있을 것이다. 시장이 오르든 떨어지든, 내 물질로 인생의 흥망성쇠를 담보잡히지 않았다면, 나의 내적 평안은 흔들리지 않는다. 내 보물은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사랑의 눈으로 피조세계와 이웃을 바라보기.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유, 진짜 보물이다.
7.
내 인생의 가치에 매긴 가격표를 떼어내는 일, 이것이 모든 것을 자본으로 환원하는 현대인이 지친 영혼을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가격표를 붙이는 세상에서 산다. 이 차는 얼마, 이 집은 얼마, 이 학벌은 얼마. 심지어 사람에게도 붙인다. 저 사람은 연봉이 얼마인지, 자산이 얼마인지, 어떤 외모와 직업, 부모를 가졌는지에 값을 매기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선언한다. 너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고유한 존재라고. 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어 이 세상을 구원하셨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꿈꾸게 하셨다. 너의 가치는 계좌 잔고나 대학 졸업장, 거주하는 아파트 이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증명되었다. 인간에 대한 모든 속박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복음이다.
8.
1910년 9월 6일, 영국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한 곡이 초연되었다. 랄프 본 윌리엄스가 작곡한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Fantasia on a Theme by Thomas Tallis)이다. 본 윌리엄스는 당시 30대 후반의 작곡가로 아직 대중적 명성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곡으로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초연을 듣기 위해 온 두 젊은 작곡가, 허버트 하웰스와 아이버 거니가 감동을 받아 밤새 글로스터 거리를 걸으며 이 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곡은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악 오케스트라만을 위한 곡이지만, 연주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눈다. 큰 현악 오케스트라, 작은 현악 앙상블, 그리고 현악 사중주. 사중주는 보통 무대의 먼 곳에 배치되어, 메아리처럼 들리는 효과를 낸다. 마치 대성당의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응답하듯 음악이 오간다.
곡의 주제는 16세기 영국 작곡가 토마스 탈리스가 쓴 찬송가 선율이다. 탈리스는 헨리 8세부터 엘리자베스 1세까지 네 명의 군주를 섬긴 작곡가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영국 종교개혁의 격동기였다.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탈리스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지만, 개신교 군주 엘리자베스 1세 밑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는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1567년, 탈리스는 캔터베리 대주교 매튜 파커의 의뢰로 시편가를 위한 아홉 개의 선율을 작곡했다. 각 선율은 서로 다른 교회 선법으로 쓰였다. 그 중 세 번째 선율, 프리지아 선법으로 쓰인 이 곡은 시편 2편을 위한 것이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로 시작하는 시편이다. 350년이 지난 후, 본 윌리엄스가 <영국 찬송가집>을 편집하던 중 이 선율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이 프리지아 선법의 선율이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에 사로잡혔다. 장조도 아니고 단조도 아닌, 신비롭고 고대의 느낌을 주는 선율을 작곡가는 조셉 애디슨의 찬송가 “죽음의 침상에서 일어날 때”의 가사와 결합시켰다. 그리고 4년 후 1910년, Three Choirs Festival을 위한 위촉 작품을 쓰면서 본 윌리엄스는 이 선율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탈리스의 50초짜리 짧은 찬송가를 15분짜리 오케스트라 환상곡으로 확장했다. 16세기 영국 르네상스 음악의 정신을 20세기로 불러오는 작업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와도 같은 뭉클한 시도였다.
본 윌리엄스는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라고 불렀지만, 영국 성공회 음악 전통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직접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지만, <영국 찬송가집> 편집 작업은 그에게 단순한 일거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신앙이 만들어낸 음악의 아름다움을 깊이 이해했고, 그것을 통해 무언가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9.
마치 대성당의 넓은 공간에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소리로, 조용한 현악 화음이 매우 천천히 탈리스의 주제를 소개한다. 400년 전 찬송가가 지금 여기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통해 다시 살아 숨쉰다. 곡은 15분 동안 이 탈리스의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한다. 때로는 장엄하게, 때로는 속삭이듯이, 큰 오케스트라와 작은 앙상블이 서로 묻고 응답하며 밀려오고 흘러간다. 먼 곳에 배치된 현악사중주가 메아리처럼 대답할 때면, 마치 대성당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기도가 울려퍼지는 것만 같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변주에도 불구하고 주제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하고, 조용히 속삭이기도 하고, 때로는 거의 사라질 듯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항상 그대로다. 탈리스의 선율은 400년이 지나도, 수많은 변주를 거쳐도, 여전히 탈리스의 선율이며 아름다움과 고유성은 퇴색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깊은 위로를 준다. 곡이 안겨다주는 감동뿐 아니라,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눈과 귀와 마음으로 확인시켜 주며, 표면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그 아래에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런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마음은 불안을 떨치고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시대가 바뀌고 양식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복음의 강력한 메시지와 닿아있는 음악. 탈리스가 종교개혁의 격랑 속에서 찾았던 그 평안은 20세기 초 본 윌리엄스를 통해서 재발견되었다.
10.
차트를 보며 밤을 지새우는 현대인에게 본 윌리엄스의 환상곡은 세 가지의 아름다운 가치를 이야기한다. 첫째, 시간을 초월한 가치다. 1567년의 탈리스의 선율을 사용한 1910년의 본 윌리엄스의 환상곡을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듣는다는 것, 이 450년이 넘는 시간을 가로지르는 음악의 생명력과 연결성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짧은 역사를 가진 코인과 화폐들, 상장폐지된 수많은 기업들은, 한 때 미래의 화폐와 사업이라 불렸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증발하며 가치를 잃는 생생한 역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운 음악은 오래토록 이 자리에 남아 우리와 교감을 나누며 기억된다.
둘째, 변하지 않는 중심의 가치다. 크게 울리다가 조용해지고, 빠르게 움직이다가 멈추는, 15분 동안 끊임없이 변하는 음악에 귀 기울여 보면, 그 모든 변화 속에서도 우뚝 서 있는 탈리스의 주제 선율을 발견할 수 있다. 폭등과 폭락을 반복하는 차트의 변동성에 마음을 빼앗기면 우리는 변하지 않는 중심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진리는 시장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언제나 그 곳에 있다.
셋째, 공동체성의 가치다. 이 작품은 혼자 연주할 수 없다. 또한 큰 오케스트라와 작은 앙상블, 사중주라는 세 덩어리의 현악 그룹은 최소 13명의 연주자를 필요로 한다. 한 그룹이 노래하면 다른 그룹이 대답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적 대화, 교감, 상호 소통이 없이는 연주될 수 없다. 반면 투자는 철저히 개인적이다. 혼자 결정하고, 혼자 책임진다. 모두가 윈-윈 할 수 없으므로 타인도 친구도 경쟁자다. 그러나 신앙은 공동체적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한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 것이 바로 교회다. 함께 듣고 연주하고 응답하는 것, 그것이 이 환상곡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고귀한 가치다.
1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 하나님의 안식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 자족함과 감사를 노래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한다. 24시간 돌아가는 시장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인으로, 탐욕과 공포 사이에서 흔들리는 영혼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 위에 우뚝 선 신앙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탐욕이 만든 불면의 시대에서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우리는 늘 피로하고, 긴장하고, 언제나 초조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탐욕과 소음을 넘어, 변동성과 혼란을 넘어, 마침내 모든 욕망과 근심을 다 내려놓으라는 하나님께로의 초대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간을 초월한 천상의 가치를 품은, 참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