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케 하는 자의 환희: 극우주의와 왜곡된 신앙을 넘어

베토벤, <교향곡 9번>(합창)

by 토마

https://youtu.be/acmy-daxIZk?si=0L9yYZAdOoM-XwUa



1.

언젠가 뉴스를 통해 광화문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 장면을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와 함께 십자가를 들고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메시지와 신앙적 언어를 하나로 엮어 구호를 외쳤다. “대한민국을 지키자!” , “우리의 가치를 수호하자!”라는 외침이 확성기를 타고 광장을 울렸다. 화면 속 그들의 표정에는 강한 확신과 소속감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풍경은 광화문만이 아니다. 명동 거리에서도 주기적인 혐오시위가 일어나고, 때로 그 현장에는 목회자로 보이는 이들이 선두에 서서 “하나님이 이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모습이 포착되곤 한다. 신앙과 정치, 영적 언어와 민족주의적 수사가 구별 없이 뒤섞인 채 광장을 채운다.


이 장면들을 보며 나는 깊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 입장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신앙이 특정한 정치적 이념과 완전히 동일시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배타적 구호의 근거로 사용되며, 교회의 언어가 혐오와 분열의 도구로 전용되는 방식이었다. 십자가와 태극기가 함께 흔들릴 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정말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습인가?


나는 그 뉴스 화면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내가 특히 좋아해서 너덜너덜해진 복음서 한쪽이 펼쳐진 채로 놓여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며 같은 경전을 읽는다는 이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다른 메시지를 외칠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마 5:9)이라 말씀하신 분이었다. 그런데 저 깃발 아래에서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 화해가 아니라 적대가, 사랑이 아니라 증오가 신앙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있었다.


뉴스를 끄고 난 후에도 나는 계속 생각했다. 언제부터 한국 교회의 일부는 이렇게 변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복음의 핵심은 사랑, 화해, 용서, 그리고 평화였다. 그분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 사마리아인과 세리, 창녀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약자와 배제된 이들과 함께하신 분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분의 이름을 내건 공동체가 증오와 배척의 선봉에 설 수 있는가.


이는 정치적 견해의 차이가 아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배신, 망각, 왜곡 더 나아가 파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배신은 단지 저 거리의 집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우리의 일상적 대화 속에서도,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참혹한 현실이다.



2.

한국 교회의 보수화와 극우화는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는 현상이다. 이 이면에는 냉전 시대의 반공 이데올로기, 군부독재 시절의 정교유착,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의 기득권 형성 등이 얽혀 있다. 특히 일부 대형 교회들은 정치권력과 결탁하며 물질적 번영과 권위주의적 질서를 ‘축복’으로 포장해온 측면이 존재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 일부에서 나타나는 극우적 경향은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드러난다. 첫째는 배타적 국수주의다. “기독교 국가론”을 내세우며 다른 종교와 신념을 가진 이들을 적대시하는 태도가 팽배하다. 이는 다원주의 사회의 공존 원리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태도다.


둘째는 혐오의 신학화다. 성소수자, 이주민, 난민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를 ‘성경적 가치’로 포장하며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약자 보호와 환대의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셋째는 권위주의와의 결탁이다.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을 옹호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좌파 이념’으로 폄하하는 태도가 만연하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음모론의 확산이다. 정치적 반대자들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근거 없는 음모론을 유포하면서 사람들을 혼돈에 빠뜨린다. 진리를 추구해야 할 신앙 공동체가 거짓의 온상이 되는 폐해가 현재 한국 교회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다.



3.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가르침이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분쟁을 피하는 데 목적을 둔 소극적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이는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자’, 갈등과 적대를 화해와 연대로 전환시키는 용기있는 이를 의미한다. 이렇게 화평케 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른다는 것은, 그들이 모습이 하나님의 본성과 닮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원수 된 인간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분이다. 화해와 평화가 곧 하나님의 본질이다.



4.

생각해보면, 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분노하는 것, 적을 만드는 것은 쉽다.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것은 쉽다. 그러나 분열된 이들 사이에 다리를 놓고, 상처 입은 이들을 화해시키며, 증오의 벽을 허무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바로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들을 ‘복이 있다’고 선포하신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5.

구약의 예언자들은 일관되게 정의와 평화(샬롬)를 함께 외쳤다. 이사야는 “정의는 화평의 열매”(사 32:17)라는 아름다운 말을 남겼다. 정의 없는 평화는 거짓 평화이며, 평화 없는 정의는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참된 ‘샬롬’은 이 둘이 입맞추는 곳에서 피어난다. 시편에서도 이렇게 노래한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 85:10). 정의와 평화는 서로 적대시 하지 않으며, 양자택일의 문제도 아니다. 입을 맞추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샬롬이다.


미가 예언자는 더 아름다운 비전을 노래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그 날을(미 4:3) 꿈꾸었다. 남을 해치는 전쟁의 도구가 생명을 일구고 살리는 평화의 도구로 변화되는 그 날을. 이것이 샬롬이다. 세계 전쟁이 종식되는 결과를 넘어 하나님의 정의가 구현되고 가난한 자가 돌봄 받으며 억압받는 자가 해방되는 총체적 평화가 샬롬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상태, 곧 우리가 이 땅에 바라며 염원하는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6.

초대교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급진적 평등을 선포한 공동체였다(갈 3:28). 당시 로마제국의 견고한 계급 사회에서 이것은 혁명적인 메시지였다. 노예와 주인이 한 식탁에서 같은 빵을 나누는 것, 남자와 여자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예배하는 것.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식탁에서는 이같은 급진적인 환대의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바울은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4-16) 화평을 이루셨다고 말이다. 십자가는 폭력의 상징이 아니다. 십자가는 화해의 상징이다. 역사적으로 정치범의 처형 도구였던 십자가는 폭력의 상징이었지만, 그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원수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눅 23:34)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만약 초대교회 성도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허물었던 그들이, 이념과 정체성으로 새로운 벽을 쌓는 우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너희가 정말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가?”라고 묻지 않을까.



7.

1824년 초연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음악사상 최초로 교향곡에 합창을 도입한 획기적인 작품이다. 특히 4악장에서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를 사용하여 인류의 보편적 형제애를 노래한 대곡이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체제의 억압적 질서 아래 있었고, 자유와 평등의 이상이 좌절된 시기였다. 그러한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베토벤은 인류애와 보편적 형제애의 비전을 제시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멜로디는 사실 교향곡의 9번 4악장에 이르러 합창 파트에서 들을 수 있다.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불꽃이여)로 시작하는 이 합창은 모든 인간이 형제가 되는 이상을 노래하는 시이고, “Alle Menschen werden Brüder”(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라는 구절은 인종, 국가, 계급, 종교를 초월한 보편적 인류애를 선언하는 문장이다. 베토벤은 이 작품에서 개인적 고통(청각장애)을 초월하여, 인류 전체의 환희와 연대를 노래한다. 개인의 고난이 보편적 희망으로 승화된 예술적 서사가 여기에서 구현된 것이다.


약 25분에 걸쳐 전개되는 거대한 음악적 드라마는 충격적인 불협화음으로 시작한다. 마치 세상의 혼돈과 소음을 표현하는 듯 하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인간의 말처럼 레치타티보로 응답하며, 1악장부터 3악장까지의 주제를 차례로 회상한다. 그러나 저음 현악기들은 이 모든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과거의 음악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고 선언하듯이, 마침내 새로운 멜로디, 그 유명한 “환희의 주제”가 조심스럽게 제시된다. 극도로 단순한 D장조 선율, 어린아이도 부를 수 있을 만큼 소박한 순차 진행의 멜로디, 바로 그 단순함이 보편성을 획득한다.


환희의 주제는 저음 현악기로 시작해 점차 확장된다. 비올라가 합류하고, 바이올린이 가세하며, 마치 새벽이 밝아오듯 오케스트라 전체가 고개를 드는 것처럼 소리의 빛이 퍼져나간다. 베토벤은 변주 기법을 통해 동일한 멜로디를 반복하되, 매번 다른 악기 조합과 화성으로 악곡을 채색한다. 목관악기가 목가적 온화함을 더하고, 금관악기가 장엄함을 부여하며, 타악기가 축제적 흥겨움을 자아낸다. 단순한 선율이 반복을 통해 점점 더 풍성해진다. 이는 공동체가 하나의 진리를 함께 만들어가는 모습을 음악으로 그려내는 듯하다.


그러나 오케스트라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다시 불협화음이 터지고, 이번에는 실제 인간의 목소리가 개입한다. 바리톤 독창자가 등장해 선언한다. “오, 친구들이여, 이런 소리가 아니라, 더 즐겁고 기쁨에 넘치는 노래를 부르자!” 악기만으로는, 추상적 소리만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뚜렷이 모으기에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곧 인간의 말, 구체적 언어가 등장한다. “환희여!”라는 외침과 함께 합창이 시작된다. 실러의 시를 노래하는 합창은 “환희여”를 최고음으로 도약시키며, “당신의 거룩한 힘은 다시 결합시키네”라는 가사에서는 모든 성부가 유니즌으로 하나가 되어 울려퍼진다. 분열된 것들이 음악 안에서 화해하는 순간이다.


터키풍 행진곡 변주에서 분위기가 바뀐다. 큰북, 심벌즈, 트라이앵글이 등장하며 축제적이고 이국적인 리듬을 만든다. 테너 독창자가 “형제들이여, 당신들의 길을 달려가라, 영웅처럼 승리를 향해!”를 부르며, 환희가 감정이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행동의 힘임을 드러낸다. 정점은 이중 푸가에서 온다. 환희의 주제와 “포옹하라, 수백만의 사람들이여!”라는 새로운 주제가 동시에 전개되며, 여러 성부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조화가 양립 가능함을, 아니 서로를 강화함을 베토벤의 음악이 증명한다.


마지막 코다는 프레스티시모, 가능한 한 빠르게 질주한다. 환희의 주제가 압축되고 리듬이 촘촘해지며,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거의 숨 막히는 속도로 가속된다. 하나님 나라는 점진적으로만 오지 않는다. 때로 그것은 폭발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은총의 쇄도로 임한다. 소프라노가 최고음까지 올라가며 환희를 외칠 때, 우리는 모든 눈물이 닦이고 죽음이 없어지는 그 날을 엿본다. 환희,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화합. 천상의 소리가 이 땅에서 구현된다!



8.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는 계몽주의의 이상을 표상하는 시이다. 이 시는 자유, 우애, 이성에 기반한 새로운 인간관을 보여주며, 개인의 존엄성과 보편적 연대를 노래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실러는 인간 내면에 ‘환희’라는 신적 불꽃이 있어 이를 통해 사람들끼리 연결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 연결이 바로 ‘형제애’(Brüderlichkeit)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한 시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숨어 있다. 실러는 반전제적 인물로, 평소 군주제에 반대하는 내용의 문학작품을 많이 썼으며, 이 시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태어났다. 본래 실러는 이 시를 ‘자유(Freiheit)’의 송가로 기획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의 검열 체제는 강력했고, ‘자유’라는 단어는 너무나 위험했다. 결국 실러는 ‘환희(Freude)’로 제목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시 안에 담긴 반군주제적 내용은 완전히 감춰지지 않았다. 실러가 죽은 이후인 1808년 재출판된 판본에서는 몇 개 줄이 수정되고 한 절이 통째로 삭제되는 운명을 맞았다. 자유를 노래하는 시는,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에 의해 검열되고 왜곡되었다.


‘환희’로 위장된 ‘자유’의 노래. 권력의 검열 속에서도 살아남아 결국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형제애의 메시지. 그것은 어쩌면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억압될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검열은 단어를 바꿀 수 있었지만, 시의 영혼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9.

베토벤은 실러의 시를 음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시의 전체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선택과 편집, 강조를 통해 자기만의 신학적, 인간학적 해석을 드러낸다. 그는 시의 보편적 형제애 선언을 음악적 에너지로 승화시키되, 개인의 고통과 사회적 현실을 동시에 담아내는 구조를 만들었다.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결합은 인간적 목소리와 집단적 힘이 조화를 이루는 상징적 장치다. 이는 공동체적 연대의 가능성을 음악적 차원에서 제시하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실러의 시와 베토벤의 음악은 본래 정치적 이용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텍스트로 역사속에서 자리매김했다. 다양한 정치 권력은 이 작품을 자기 정당화의 도구로 사용해 왔는데, 이는 작품 자체의 본래 의미가 정치적 맥락에서 왜곡되고 재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오용에도 불구하고, 실러의 인간 형제애 선언은 오늘날 혐오와 차별의 시대에 다시 읽혀야 할 윤리적 자원이다.


실러의 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성찰점을 안겨주는 텍스트로 새로이 읽을 수 있다. 실러의 시는 첫째로, 보편적 존엄성을 주장한다. 사람들은 태생, 국적, 신념 등으로 서로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다시 상기시키는 텍스트로 읽어낼 수 있다.


둘째, 연대의 정치학을 제공한다. 개인적 환희가 공동체적 연대와 결합할 때, 사회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셋째,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인식하게 한다. 실러 자신이 혁명의 이상과 폭력의 현실 사이에 간극을 의식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이상을 향한 실천이 폭력과 배제, 불평등을 낳지 않도록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10.

한국은 다종교 사회라는 현실적 조건을 가진 나라다. 기독교의 독점적 지위를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성경적이지도 않은 태도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가나안 여인, 로마 백부장 등 ‘이방인’들과 대화하셨고, 그들의 남다른 믿음을 칭찬하셨다. 종교 간 대화는 신앙의 타협이 아니라 평화의 실천이다. 기독교는 이웃종교와 더불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정의와 자비, 평화라는 공통의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협력의 장을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는 특정 정치 세력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기관이다. 물론 교회는 정치적 이슈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 정당이나 이념을 지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교회의 정치적 발언은 항상 복음의 가치, 즉 정의, 평화, 사랑, 진리에 근거해야 하고, 어떤 권력도 절대화하지 않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평화와 인류애의 상징으로 연주되는 이유는, 이 작품이 개인과 집단, 국가와 이념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도 특정 국가나 정치 세력의 이념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적 복음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는 선언은 특정 국가와 민족만 옹호하는 편협한 국수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국가와 이념을 초월한, 무한하고 보편적 사랑을 의미하는 구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라는 신앙적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그분의 십자가는 모든 민족, 모든 언어, 모든 문화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화해의 표지로 해석할 수 있다. 교회가 이 사랑의 보편성을 잃을 때, 그 집단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세속 권력의 하수인에 머물게 될 것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선언이 곧 우리의 정체성이다. 평화를 만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 됨의 증거라는 신학적 결론이 여기에 담겨 있다.


11.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상태다. 극우 정치와 결탁하여 시민사회의 질타를 받으며 배타와 혐오의 길을 계속 갈 것인지, 아니면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평화와 화해의 공동체가 될 것인지 다시 한번 숙고해야 한다.


베토벤은 청각을 잃은 상태에서도 자신을 향한 연민과 위로가 아닌, 인류의 환희를 노래했다. 실러는 차가운 검열 속에서도 자유의 메시지를 ‘환희’로 위장하여 살려내었다. 교회도 어두운 시대일수록 평화의 빛을 밝혀야 할 사명을 가진다. 억압의 시대에도 희망을 노래하고, 분열의 시대에도 연대를 외치며, 증오의 시대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화평케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신앙인의 사명이다.


생각해보면, 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가장 어렵지만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쉽게 분노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것, 쉽게 적을 만들 수 있는 세상에서 친구를 만드는 것, 쉽게 벽을 쌓을 수 있는 세상에서 다리를 놓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 사는 길이다.



12.

모든 인간이 형제가 되는 그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그날을 꿈꾸며 오늘 여기서 평화를 실천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ß der ganzen Welt!”(수백만의 사람들이여, 서로 포옹하라! 온 세계에 이 입맞춤을!)라 노래한 실러와 베토벤은, 이것이 교회의 노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우리를 그들의 숭고한 예술적, 신학적 세계로 초대한다.


내 이웃과의 화해,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의 환대,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 이 작은 평화들이 모여 큰 평화를 이룬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수많은 악기들의 조화로 실러의 시를 생생히 살려냈듯이,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각자의 작은 평화 만들기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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