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라이히, Music for 18 Musicians
https://youtu.be/71A_sm71_BI?si=cvLfq7NGN6YbVhq2
1.
우리는 어느새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시간의 손님이 되어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손이 스마트폰을 찾고, 잠들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화면을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휴대폰 액정 사이로 수많은 영상과 게시물이 물 흐르듯 지나가지만, 정작 “오늘 나는 무엇을 경험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 앞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시간은 분명히 흘렀는데, 그 시간이 우리 안에 무엇을 남겼는지 알 수 없다.
성경은 두 가지 시간을 구별한다. 하나는 크로노스, 시계가 측정하는 연속적이고 양적인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질적이고 의미 충만한 시간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라는 말씀에서 ‘때’가 바로 카이로스다.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역사 속에서 현현하는 결정적 순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날 알고리즘은 이 카이로스를 조직적으로 해체한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주의(attention)를 최대한 붙잡아 두기 위해 설계되었다. 추천 영상, 숏폼 콘텐츠, 자동재생 기능은 사용자가 “다음에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는 찰나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한 영상이 끝나기 전에 다음 영상이 준비되고, 한 게시물을 넘기면 또 다른 자극이 기다린다.
문제는 이러한 시간 소비 방식이 단편화된 자극의 연속으로 우리의 경험을 재편한다는 데 있다. 신경과학자들은 이를 “인지적 파편화(cognitive fragmentation)”라 부른다. 우리의 뇌는 하나의 자극에 충분히 머물러 그것을 내면화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 이미 다음 자극으로 이동한다. 경험은 축적되지 못하고 흘러간다. 마치 모래 위에 물을 붓는 것처럼, 시간은 우리 삶에 스며들지 못하고 증발한다.
2.
그렇다면 의미 있는 시간, 즉 카이로스는 어떻게 형성될까? 우리는 무상히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세 가지의 방법을 통해 의미있는 시간을 형성할 수 있다. 첫째는 의도적 선택이다. “너희는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누가복음 87:18)라는 예수님의 경고는 교훈을 주의 깊게 듣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지, ‘어떤’ 시간을 살아갈지 능동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영적 원칙을 가리킨다.
둘째는 깊은 몰입이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편 119:97)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종일 읊조리는’ 행동은 단순 반복이 아닌 내면 깊숙이 말씀이 스며들 때까지 머무르는 명상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알고리즘이 허용하지 않는 ‘머무름의 시간’이며, 우리가 마땅히 회복해야 할 인내의 자세다.
셋째는 비움과 기다림이다. 이 역설적 구조는 호렙산 동굴에서 하나님을 만난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열왕기상 19:11-13). 하나님은 강한 바람에도, 지진에도, 불에도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음성은 모든 자극이 사라진 고요함 속에서, 우리가 충분히 비우고 기다릴 때 ‘세미한 소리’로 오신다.
의미 있는 시간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변형되는 경험이다. 기도, 묵상, 사랑하는 이와의 깊은 대화, 예술 감상 같은 경험들은 시간을 소모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성화시키고, 우리 내면에 지워지지 않는 의미있는 흔적을 아로새긴다.
3.
알고리즘의 가장 교묘한 점은 우리의 선택을 대리한다는 점이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상”, “이 게시물은 어떠세요?”와 같은 문구들은 친절한 제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의사결정 능력을 서서히 마비시키는 독과 같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이를 “피로사회”의 증상으로 분석한다. 현대인은 과도한 선택지 안에서 피로해지고, 결국 선택 자체를 알고리즘에 위임한다. ‘내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대신,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영상을 받아들일까 말까, 더 볼까 넘길까’하는 즉각적 반응만 남을 뿐이다.
이는 영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체적인 선택을 요구한다. “너희는 오늘 누구를 섬길 것인지 택하라”(여호수아 24:1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7:13). 신앙의 본질은 능동적 선택이다. 그런데 알고리즘은 이 능동성을 수동성으로 전환시킨다. 우리는 시간을 경영하는 청지기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수동적 존재가 된다. 더 나아가 알고리즘은 예측 가능성을 통해 우리를 길들인다. 우리가 무엇을 클릭할지, 무엇에 ‘좋아요’를 누를지 미리 계산하고, 그에 맞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이는 편리함을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우리를 우리 자신의 과거 패턴 안에 가둔다. 새로운 발견, 예상치 못한 감동, 불편하지만 성장을 가져오는 만남같은 ‘성가시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은 점차 사라진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은총의 순간이다. 사도 바울의 다메섹 체험(사도행전 9:3-6)이나 베드로의 환상(사도행전 10:9-16), 마리아에게 임한 천사의 방문(누가복음 1:26-38)처럼, 이러한 카이로스의 순간들은 인간의 계획이나 알고리즘이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으로 일어난다.
라이히 역시 phase music을 ‘우연히’ 발견했다. 계획되지 않았던 사고 속에서 그의 귀는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했다. 이는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종종 우리의 계획 밖에서, 통제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오는 것과 같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귀를 기울이는 것, 낯설과 불편하고 새로운 경험을 묵상할 때에 우리에게 허락된 카이로스를 알아차릴 수 있다.
4.
알고리즘의 영적 속박 문제는 또 다른 차원에서 드러난다. 알고리즘은 우리에게 ‘나를 더 잘 안다’는 환상을 제공한다. ‘내가 최근 관심있어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대화를 엿듣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알고리즘은 내 결핍과 욕구를 알아맞힌다. 맞춤형 추천이 나보다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알고리즘적 ‘안다’는 것은 나의 과거 행동의 통계적 요약일 뿐이다.
이 통계적 해석을 우리의 정체성 인식의 기준으로 삼을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자기 인식의 훈련을 포기하고 기술이 제공하는 프로파일에 스스로를 맞추게 된다. 이렇게 되면 변화와 회복, 성령의 새 역사 같은 요소는 데이터로 포착되지 않으므로 배제된다. ‘알고리즘이 나를 안다’는 착각은 결국 자기결정권을 빼앗고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축소한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복합적이며 비결정적인 존재인데, 데이터 프로파일은 그 복합성을 뭉뚱그리고 왜곡하며 환원한다. 따라서 우리는 데이터 기반의 ‘안다’에 우리의 영적 항해를 위임할 수 없다. 성령은 인격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성령의 인도는 통계를 초월하는 새로움을 가져오며 우리의 회개와 성화를 촉진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언하시며 우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재구성하신다. 이는 데이터로 규정된 자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식의 원천이다. 성령의 인도는 개인적 계시와 더불어 공동체적 분별, 곧 교회와 영적 동료, 목회적 권면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알고리즘은 영적 길잡이가 될 수 없다.
5.
진정한 반복, 의미를 생성하는 반복이 존재할까? 여기서 미니멀리즘 음악,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의 작품세계로부터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라이히는 1936년 뉴욕에서 태어나 철학을 전공한 후, 작곡으로 전향한 현대음악의 혁명가다. 1960년대, 그는 우연히 두 대의 테이프 플레이어가 서로 미세하게 다른 속도로 돌아가는 '사고'를 목격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를 실패로 치부했겠지만, 라이히의 귀는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동일한 소리가 극도로 미세한 시간차를 두고 반복될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음향 패턴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라이히의 대표 기법인 “페이즈 뮤직(phase music)”을 탄생시킨다. 그의 초기작 “It's Gonna Rain”(1965)과 “Come Out”(1966)에서 라이히는 한 문장을 끊임없이 반복하지만, 미세한 템포 차이로 인해 그 문장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전혀 새로운 리듬과 멜로디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여준다. “비가 내릴 것이다”라는 단순한 경고가 반복되면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묵시록적 명상으로 변모한다.
1976년 발표된 그의 대표작 <18인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Music for 18 Musicians)은 이 원리를 완성시킨다. 이 곡은 미니멀리스트 음악 작품으로,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작곡되었다. 곡의 구조는 시작 부분에서 연주되고 끝 부분에서 반복되는 11개의 코드로 구성된 사이클을 기반으로 한다. 현악기(바이올린, 첼로), 두 대의 클라리넷(베이스 클라리넷 겸함), 네 명의 여성 보컬, 네 대의 피아노, 세 대의 마림바, 두 대의 실로폰, 그리고 비브라폰으로 구성된 대규모 앙상블을 위해 작곡되었다. 연주자 수는 “18인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이라는 제목과 달리, 실제로는 최소 18명 이상이 필요할 수 있으며, 연주자들이 여러 악기를 다루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악기는 어쿠스틱이며, 보컬과 일부 악기에 한해 마이크를 사용하여 전자음을 최소화했다. 전체적으로 한 시간가량 지속되는 순환적인 형태를 띠며, 연주 내내 반복되는 패턴들이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곡의 시작과 끝에는 11개의 코드가 연주되는 사이클이 있으며, 이 코드들은 작품의 기본 골격을 형성한다. 이 사이클 내에서 각 코드에는 멜로디가 분해되고 음표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곡에는 두 가지 종류의 리듬이 동시에 존재한다. 첫 번째는 피아노와 말렛 악기(마림바, 실로폰, 비브라폰)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규칙적인 리듬적 펄스이다. 두 번째는 보컬과 관악기(클라리넷, 베이스 클라리넷)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호흡 리듬이다. 이 악기들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특정 음을 길게 연주하며, 이러한 호흡 패턴이 각 코드의 지속 시간을 결정한다.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현악기들도 베이스 클라리넷의 호흡 패턴을 따라 리듬의 흐름을 조절한다. 각 코드는 두 번의 호흡 길이만큼 유지되며, 다음 코드로 점진적으로 넘어간다. 11개의 코드 사이클이 모두 연주되면, 앙상블은 첫 번째 코드로 돌아간다.
이 첫 번째 펄싱 코드는 약 5분 동안 두 대의 피아노와 두 대의 마림바에 의해 유지되며, 이 위에서 작은 악곡이 구성된다. 이 악곡이 끝나면 두 번째 코드로 갑작스럽게 전환되고, 그 위에서 또 다른 작은 악곡이 만들어지는 식이다. 각 펄싱 코드 위에는 하나 또는 두 개의 작은 악곡(섹션)이 만들어진다. 이 섹션들은 주로 아치 형태(ABCDCBA)를 띠거나, 혹은 리듬적 과정을 통해(쉼표를 박자로 대체하는 방식) 처음부터 끝까지 전개되는 형태를 취한다. 한 섹션에 나타난 요소들이 다른 섹션에서 다른 화성과 악기 편성으로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섹션 간의 변화는 비브라폰이 단 한 번 연주하는 패턴을 통해 다음 악절로 이동하도록 큐를 준다. 이는 발리 가믈란에서 드럼 연주자가 패턴 변화를 알리거나, 서아프리카 음악에서 마스터 드러머가 패턴 변화를 알리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러한 가청 큐는 음악의 일부가 되어 연주자들이 서로 계속 귀 기울이도록 돕는다.
청자는 처음 10분은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내하며 귀를 기울이면, 어느 순간 패턴들이 서로 어긋나고 다시 만나며 만들어내는 놀라운 조화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미니멀리즘의 핵심이다. 알고리즘은 “끊임없이 다른,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만 실은 같은 자극을 가지고 있다. 반면 라이히의 음악은 “끊임없이 같은, 동일한 것"을 들려주나 실인 다른 깊이를 지닌다. 약 한 시간 동안 쉼없이 연주되는 이 음악을 듣는 것은 시계의 초침을 쫓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질적으로 확장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된다. 음악이 끝나고 침묵이 찾아올 때, 우리는 시간이 '소모된' 것이 아니라 '성화된' 것을 경험한다. 음악을 듣기 전의 나와 들은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6.
미니멀리즘 음악은 소비사회의 거짓을 폭로한다. “더 많이”가 “더 의미 있게”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단순한 진리를 깊이 묵상하는 것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성경 역시 이 진리를 이미 알고 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사람이 이를 가져다가 밭에 심었더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마태복음 13:31-32)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거대한 스펙터클이 아니라, 가장 작은 것에 담긴 보이지 않는 생명력이다. “작은 일에 충성된 자”(누가복음 16:10)가 큰 일을 맡으며,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라는 말씀처럼, 대형 집회가 아니라 작은 모임에 주님은 임재하신다.
라이히의 미니멀리즘 음악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미학적 정의에 머무르지 않고, 신학적 진리의 반영하는 또 하나의 서정신학(lyric theology)의 가능성으로 나아간다.
7.
알고리즘이 우리 일상의 리듬을 지배할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시간, 즉 코람데오(Coram Deo)의 시간이다. 시편 46장 10절은 명령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여기서 ‘가만히 있다’는 히브리어 ‘하라쉬'는 모든 통제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자신을 여는 능동적 수동성, 능동적 멈춤을 의미한다. 그런데 알고리즘은 모든 공백을 즉각 채우도록 설계되었다. 사용자의 손가락이 스와이프를 쉬지 않게 만들어 끊임없이 플랫폼에 머물게 하는 것, 그것이 알고리즘의 사명이다. 대기 시간, 이동 시간, 잠들기 전 침대 위의 시간마저도 모든 틈새는 빠르고 자극적인 콘텐츠로 메워진다. 알고리즘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침묵,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여백, 말씀을 곱씹는 인내의 시간을 가질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누가복음 11:29)라고 경고하셨다. 표적을 구하는 세대는 즉각적인 확증을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침묵 속에서, 기다림의 시간 동안 우리를 빚으신다. 요셉의 감옥 생활, 모세의 광야 40년, 예수님의 공생애 전 30년처럼, 혹독하고 지난한 시간은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는 카이로스였다.
8.
그렇다면 어떻게 알고리즘의 시간으로부터 카이로스를 되찾을 수 있을까. 진부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디지털 사용을 줄이고, 일상의 영성생활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의도적으로 지루함을 선택하며, 혼자가 아닌 공동체적 신앙 리듬을 만드는 것이 좋다. 이를 위해 첫째로는 디지털 안식일을 지정하고 실천할 수 있다. 출애굽기 20:8-10의 안식일 계명을 기억하자. 안식일은 그저 일을 쉬는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시간의 주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예배적 행위다. 주중 하루, 혹은 매일 일정 시간을 정해 모든 디지털 기기로부터 자율로워져야 한다.
둘째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4세기부터 이어진 성경 묵상 방법으로, 한 구절을 천천히 읽고(Lectio), 묵상하고(Meditatio), 기도하고(Oratio), 관상하는(Contemplatio) 단계를 가진다. 렉시오 디비나는 알고리즘의 속도에 정반대되는 ‘느림의 영성’을 지향하며, 앞서 소개한 라이히의 음악처럼 하나의 구절을 반복하며 그 깊이를 발견할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셋째는 의도적으로 지루함을 선택하는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방에 조용히 혼자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말했다. 지루함은 현대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정이지만, 바로 그 지루함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만난다. 라이히의 음악을 55분 동안 다른 일 없이 온전히 듣는 것, 그러한 시도 자체가 영적 훈련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공동체적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사도행전 2:46)라는 기록처럼, 서로 시간을 함께 보내도록 마음을 모으며 애를 썼다.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홍수처럼 밀려오는 알고리즘의 압력을 끊기 어렵다. 신앙 공동체와 함께 정기적인 예배, 기도회, 나눔의 시간을 가지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숨쉴 틈 없이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도파민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9. 시간의 주인을 다시 세우기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감옥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선한 능력으로 고요히 감싸여서, 놀랍게 위로받으며 편안하게, 나는 당신과 함께 지내는 이 날들을 당신과 함께 내일로 나아가나이다.” 알고리즘의 시간은 ‘내일로 나아가는 시간’이 아닌, ‘영원한 현재에 갇힌 시간’이다. 시간의 심오한 세 차원,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지 못하고, 모든 것이 ‘지금 여기의 자극’으로 수렴되고 과거도 미래도 없는 평면적 시간만 남는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과거(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미래(재림과 완성의 소망)를 현재에 연결하는 입체적 시간이다.
에베소서는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5-16)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세월을 아낀다’는 표현은 그리스어 ‘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τὸν καιρόν(엑사고라조메노이 톤 카이론)’인데, 직역하면 ‘카이로스를 사들인다’는 뜻이다. 마치 속박된 노예를 값 주고 사서 자유케 하듯, 우리는 알고리즘에 포획된 시간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되사야 한다.
우리의 회복은 각 개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성령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빅데이터가 아닌 전지하심으로 우리 각자를 아시며, 알고리즘이 과거 데이터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로 우리를 부르신다. “너를 모태에서부터 알았다(렘 1:5)”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를 가장 깊이 아시는 분이다. 알고리즘의 추천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우리는 “바람이 임의로 불 듯(요 3:8)” 예측 불가능하지만 선한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게 된다. 서로를 간절히 찾고 기다릴 때 임하시는 성령님과의 관계는 알고리즘이 파괴하려는 관계적 영성을 회복시키고, 인간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한다.
10.
오늘 우리는 시간의 주인인가, 아니면 시간의 손님인가? 알고리즘이 채워주는 시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의도적으로 비우고 채우는 카이로스를 살고 있는가? 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선택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카이로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