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소리를 따를 것인가 : <케이팝 데몬 헌터스>

리스트, 토텐탄츠(Totentanz)

by 토마



https://youtu.be/ZrmaZGjWg1I?si=2EZ22xgueuYNvSwo

리스트, 토텐탄츠(죽음의 춤)


1.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가 인기다. 루미, 미라, 조이로 이루어진 가상의 팝 걸그룹 ‘헌트릭스’는 무대 위에서 뛰어난 가창력과 군무로 관객을 압도하고, 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령’을 퇴치하고 한국의 ‘혼문’을 지키는 악령사냥꾼으로 활약한다. 마치 실제 K팝 아이돌과 그들에게 열광하는 팬덤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고증한 연출, 도깨비와 사자와 같은 전통 요소의 현대적 변주, K팝 퍼포먼스 문법과 초현실적인 액션을 흥미롭게 풀어낸 이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작품에서 등장한 주제음악 중 하나인 <Golden>은 미국 빌보드 및 영국 오피셜 싱글차트 톱 100의 양쪽차트에서 1위를 석권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https://youtu.be/yebNIHKAC4A?si=7QowraMVOnGDORQG

헌트릭스, Golden

K-팝의 어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이 세계의 음악은 뻔하지 않다. <Golden>은 헌트릭스의 정체성과 서사는 물론 작품 전체의 메시지를 책임지는 역할을 한다. 라이벌 보이그룹 ‘사자보이스’의 <Your Idol>은 우상 숭배와 세속적 욕망을 무대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내면적 정체성의 비밀을 안고 있는 루미와 진우의 듀엣곡인 <Free>는 서로의 약함과 두려움을 비춰주듯 고백적인 가사를 노래하며, 나를 붙잡는 목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드라마의 중심부로 끌고 온다.


https://youtu.be/cWppAbqm9I8?si=IW2VkYip_8mESqKa

사자보이스, Your Idol

https://youtu.be/fjOeJssZX_Q?si=exI0IurDzepMS_Mt

루미, 진우 Free

작품 속에서 ‘악’은 우리의 오래된 종교적 기억을 건드린다. 도깨비와 저승사자와 같은 샤머니즘적 표상은 ‘외부에서 덮쳐들어 인간의 혼을 빼먹는’ 존재로서 악을 전제한다. 따라서 해결 또한 외부를 겨냥하며, 주술과 퇴마, 의례의 거행과 같은 종교적 방법이 필요하다. 재앙을 막고 복을 얻으며,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는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는 악령을 달래거나 맞서 싸워 소멸시키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2.

이런 과정을 지켜보자면 ‘악’은 외부의 침입자이며, 인간은 ‘악’의 영향권이 미치지 않으면 ‘악’과는 상관없는 중립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우리의 시선이 숭배할 대상을 쫓을수록, 그 마음에 미혹될수록, 내면은 금이 가고 그 사이로 악이 스며든다. 이 작품은 무대 위의 환호가 곧 악에게 힘을 주는 방식으로 연결된다는 설정을 가지며, “당신이 더 크게 환호할수록 무엇이 힘을 얻는가?”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극 중에서 팬들은 미남 아이돌 사자 보이스의 매혹적인 무대를 바라보며 “네 죄마저 사랑해줄 존재는 나 하나 뿐이야”, “내가 너의 우상이 되줄게”(<Your Idol>)라는 가사에 환호하면서 영혼이 빼앗기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한편 <케데헌> 속 악이 외부의 침입자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루미와 진우의 이야기는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곧 내면의 두려움과 수치, 죄책감을 나타낸다. 루미는 “악령으로 태어난 존재”이면서 “악령을 퇴치하는 사냥꾼”이라는 모순된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며, 진우는 가족을 배신하고 스스로 악에 몸을 의탁했으면서도 과거와 기억까지 부인하며 루미와 자신을 기만한다. 두 사람은 도깨비나 사자 같은 외부의 괴물과 싸우는 동시에 자기 안의 약함과 어두움이라는 더 큰 문제점과 씨름한다. 둘은 “과거는 과거로 두자”, “우린 자유로워질 수 있어”(<Free>)라고 노래하면서도, “넌 본래적으로 악한 존재”라는 운명적 목소리를 떨치지 못해 괴로워한다. ‘목소리’는 악령 숭배를 요구하는 바깥의 유혹이자 나를 옭아매는 두려움과 죄책감, 균열 사이의 속삭임이다. <케데헌>의 서사는 “당신은 누구에게 환호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당신은 어떤 목소리를 따를 것인가?”는 문제 앞에 우리를 세운다.


3.

<케데헌>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도 많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케데헌>은 인간과 악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신학적 통찰을 지닌다. 작품 속 ‘악’은 외부에서 침입하는 괴물의 형상으로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로도 나타난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죄와 악의 이중성을 떠올리게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어둠의 권세와 영적 악에 대한 싸움”(엡 6:12)이라 증언한다. 죄는 외부의 세력으로서 인간을 사로잡고 지배하지만, 동시에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하여 좌절과 자기기만,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이끈다. 루미와 진우가 외부의 악령과 싸우면서도 ‘내면의 목소리’에 괴로워하는 모습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상황을 투영한다.


또 하나 주목할 지점은 ‘환호’와 ‘숭배’의 문제다. <케데헌>의 설정에서 팬덤의 열광은 곧 악령의 힘이 되는데, 이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우상 숭배의 본질을 선명히 드러낸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존재를 사랑하고 높이고 환호했다. 문제는 그 대상이 누구인가다. 인간의 열망이 창조주 하나님을 향할 때 그것은 생명과 자유를 낳지만, 사자 보이스의 무대처럼 왜곡된 욕망과 자기 신격화에 쏟아질 때 그것은 파괴와 속박으로 이어진다. 바로 이런 점에서 <케데헌>의 메시지는 샤머니즘적 퇴마 서사를 초월하여 “내가 진정 환호하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라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질문으로 연결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루미와 진우가 직면한 문제는 외부의 괴물들을 물리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목소리’의 속박 앞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은, 인간 존재가 궁극적으로 은혜 없이는 자유로워 질 수 없음을 암시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방은 자기 안에서 길어올린 용기나 긍정적 자기 암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해 죄와 사망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참여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따라서 <케데헌>의 핵심 질문, 즉 “당신은 어떤 목소리를 따를 것인가?”는 “당신은 창조주를 예배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우상의 속삭임을 좇을 것인가?”라는 복음적 호소로 연결할 수 있다.


4.

프란츠 리스트의 <토텐탄츠>(Totentanz)는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의 걸작 중 하나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대규모 변주곡이다. 중세 그레고리안 성가인 <Dies Irae>(진노의 날) 선율(F-E-F-D-E-C-D)을 중심 테마로 활용하여, 죽음과 인간 존재의 운명을 극적으로 탐구한다. 피아노 독주와 오케스트라가 치열하게 교차하면서, 디에스 이레의 주제를 수십차례 변주하고 확장하며 심화시킨다. 변화무쌍한 리듬, 극단적인 강약 대비, 음산한 저음의 음색과 음향 효과는 죽음과 심판, 구원이라는 극적인 드라마를 효과적으로 펼쳐보인다.


리스트가 <토텐탄츠>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830년대 후반이다. 당시 죽음의 춤(Danse Macabre)에 사로잡힌 그는 홀바인의 목판화와 ‘죽음의 승리’ 프레스코 등 유럽 예술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와 음악을 결합시켰다. 중세 장례미사에 사용된 〈Dies Irae〉 선율을 먼저 원형에 가깝게 제시한 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번갈아가며 강렬하게 교차하면서 선율을 곱씹는다. 특히 피아노는 서두부터 거칠게 강타하는 타악기적인 방식과 옥타브와 트릴, 도약과 같은 거침없는 음형을 사용한다. 오케스트라는 저음 현과 금관을 강조하여 심판의 무게감을 더하는 듯 침잠하고, 곡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반음계 사용과 급격한 전조는 불안과 혼돈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판본은 1864년경 재수정된 버전이며, 초연은 1865년 헤이그에서 리스트의 사위인 한스 폰 뷔롤의 협연으로 선보였다.



5.

〈토텐탄츠〉는 여러 악장으로 구성된다. 서주는 내려치는 피아노로 점화를 시작하여 관현악이 장중하게 던진 <Dies irae>의 중심 선율을 피아노가 거칠게 응수하면서 진행된다. 이어지는 변주들은 주제의 리듬과 조성, 화성을 변형하면서 왈츠와 스케르초, 행진곡으로 이어진다. 때로는 춤곡처럼, 때로는 승전가처럼 보이지만 변주의 말미마다 Dies irae의 ‘심판 선율’이 끈질기게 회귀한다. 화려한 카덴차와 토카타로 절정에 이른 뒤 코다에서는 일시적인 승리의 환희가 치솟지만, Dies irae의 심판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무대 위에서 유희와 카니발이 폭발해도, 그 끝은 심판의 자리로 소환된다는 서늘한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이처럼 <토텐탄츠>의 생명 속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강렬한 삶의 에너지와,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언제나 흐르고 있는 죽음에의 심판이 이중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음악과 춤, 생과 사, 무대 위와 아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우리에게 다시금 질문한다. “나는 어떤 목소리를 따를 것인가?” 심판 선율이 끊임없이 귓가에 맴도는 동안, 삶의 환호와 숭배, 몸과 영혼은 어느 방향을 향할 것인가?



6.

<토텐탄츠>가 가진 구조와 미학을 <케데헌>과 연결해본다. <케데헌>은 도깨비나 사자, 악령과 같은 외적인 악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죄책감, 자기기만과 같은 내면의 목소리가 어떻게 힘을 얻는지 보여준다. 환호와 숭배라는 장치를 통해 힘을 얻는 이 세계는 우리가 보내는 함성과 환호가 개인과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보여준다. <Golden>과 같은 환희에 찬 곡과 <토텐탄츠>의 왈츠풍 변주는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무대의 환호와 흥분이 높아질수록 끈질기게 따라붙은 심판의 선율은 더 선명해진다. 우리의 삶이 영광의 황금빛으로 빛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7.

앞서 바울은 “혈과 육”이 아닌,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우는 것이 우리의 본질임을 고백했다(에베소서 6:12). 동시에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절규한다(로마서 7:19). 우리를 감싸는 악은 외부적으로 침입하는 동시에, 분열된 자아와 죄성과 얽혀 힘을 키운다. 예수도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빈집을 보고 더 악한 것들을 데리고 들어오니”(눅 1:24–26)라고 말씀하시며, 단순히 악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경고한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을 무엇으로 채우는가이다.


한편, 진우가 자신을 던져 루미를 구해내는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떠올리게 한다. 진우는 루미를 먼저 찾아가고, 계속해서 손 내밀고, 설득하다가 마침내 대신 죽는다. 우리 대신 죽음의 자리로 나아감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열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진우라는 표본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과 결단만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구원의 길은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요한복음 10장 27절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를 따른다”고 말했으며, 요한복음 8장 36절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라고 기록한다. 인간의 해방은 의지와 결단으로 이룰 수 없다. 우리를 해방으로 이끄는 힘이자 진정 우리가 따라야 할 목소리는 자기 암시가 아닌 성령의 내적 증언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의 선포다. 참 생명의 길은 비워낸 악의 자리가 은혜로 채워질 때 열린다.



8.

<케데헌> 최고의 인기곡인 <Golden>은 “함께일 때 우린 빛나고 있어. 황금처럼 빛날거야. 그게 바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야”라고 노래한다. 이 곡은 우리가 때로는 문제투성이로 보여도 그것마저 특별하고 완벽한 존재이기에 빛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루미와 진우의 <Free>는 “네가 가진 어두운 면, 너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야. 우리가 도망쳐온 것들과 함께 맞서본다면 어떨까”라고 노래한다. 진정한 자유는 내 안의 약함을 인정하고, 스스로 완벽하지 않음을 고백하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믿음이 있을 때 누릴 수 있다는 진리를 역설한다. 사자보이스의 <Your Idol>은 우리를 끊임없이 성취와 비교, 자기기만의 무대로 끌고 들어가면서 악령들이 선보이는 유혹의 춤과 목소리가 어떤 형태인지 한걸음 물러서서 확인하게 만든다.


<케데헌>이 보여주는 반복적인 염원은 우리의 약함과 상처를 가린 표면적인 반짝임을 뛰어넘는, 존재 안으로 확장된 영광의 금빛이다. 진정한 ‘골든’은 자신의 약함을 온전히 인정하고 그 약함을 이웃과 나누는 공동체의 연대 위에서 비로소 빛난다. ‘프리’ 또한 겉모습의 자유가 아니라 나의 죄와 연약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함께 일어날 때 시작되는 참된 자유이자 해방이다. 아울러 우리가 뒤따를 ‘아이돌’은 “고통과 수치를 보이지 않게 숨기라”고 속삭이는 악령, 곧 내 죄를 묻어두고 사랑하게 만드는 미혹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으로 죄를 없애심으로써 구속을 갈망하게 만드는 한 분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케데헌>의 주제가 “어떤 목소리를 따를 것인가?”에서 시작하여 “창조주를 예배할 것인가, 우상의 속삭임을 좇을 것인가?”라는 기독교적 질문으로 이어진다고 할 때, 이는 내면의 욕망과 외부 악령의 속삭임 사이의 갈등이나 영적 전쟁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주와 우상에 관한 성찰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귀 기울이며 ‘자유와 완전함’을 향한 여정으로 연결될 때 의미가 있다. 최종적으로 인간의 참된 정체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머무를 때 회복된다.



9.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약함을 지니고 있다. 허전한 빈집처럼, 내 영혼은 따뜻한 온기와 목소리를 기다린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피하거나 부정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약함을 마주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의 약함과도 연대할 수 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채워질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닌 존재로, 각자의 작은 몸짓과 목소리들이 한데 모여 진짜 황금빛 아름다움을 빚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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