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레퀴엠 중 진노의 날(Dies irae)
베르디, 레퀴엠 중 진노의 날(Dies irae)
https://youtu.be/rV7Uj3Ap9-U?si=oRKBtxSDZk-vK8UE
1.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당신의 의견을 숨기거나 바꿀 수 있는가?”
성격 검사 문항에서 이 질문을 마주했을 때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망설임없이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답했다. 그 ‘절대’라는 단어를 굳이 선택하는 손길에서 내 안의 뒤틀린 고집을 마주한다. 나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순응적으로 보이는 편이지만, 실제로는 옳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꽤 확고한 면이 있다. 사람들은 말수가 적고 둥글둥글한 인상을 가진 나를 유순하고 포용적인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겉모습과 다소 다른 성향 때문에 간혹 융통성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의도치 않은 실망이나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부당하거나 거짓된 상황 앞에서 좀처럼 침묵하지 못한다. 미련스러우리만큼 이상한 정의감에 휘둘려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어 버릴 때도 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넘어가도 될 일에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거듭 질문하는 나를, 사람들은 양말 속에 숨어든 모래알을 밟는 것처럼 불편한 기색으로 바라보곤 했다.
2.
우리는 흔히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나 ‘평화의 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그 이름과는 달리 교회의 자리를 검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늘 있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성직 매매가 있었고, 중세에는 교황청이 정치 권력과 결탁해 전쟁을 승인하기도 했다. 한국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교회는 빠르게 대형화되었고,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세속의 성장주의를 흡수해 몸집을 키웠다. 교회 재산은 공동체의 것이 아니라 사유화된 자산으로 변질되었고, 교단과 지도자들의 성추문은 치리되지 않은 채 덮였다. 정치 권력자와 손잡은 교회는 복음 전파 기구가 아닌 표 계산과 정치적 영향력 확보의 수단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평안’이라는 단어는 자주 오용되었다. 평안은 서로의 상처를 직면하는 용기가 아닌, 불편한 진실을 덮어두는 명분이 되었다. 교회의 성장과 성과의 수치는 성령의 임재와 역사로 해석되었고, 우리가 교회의 깊은 어둠을 마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도감 속에 면죄부를 얻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안심은 거짓 평화다. 눈부신 조명과 세련된 음향 시스템이 연출하는 영적 고양감은 진실된 회개로 이어지지 못했고, 교회 건축물의 화려한 외양은 내부의 곪은 상처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효과적으로 빼앗았다. 그러나 교회가 힘을 얻고 부유해질수록 그 내부는 축복과 평안 속에 머무르는 대신 손쓸 수 없이 썩어가고 있었다.
3.
예수는 그 거짓 평안을 칼로 부수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검을 주러 왔다.”(마 10:34) 갈등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덮어두는 것을 ‘평화’라고 부르며 침묵할 때, 예수는 진리의 칼로 거짓된 화평을 찢어내고 생명의 길로 이끌었다. 참된 평안을 얻기 위해서, 때로는 먼저 평안을 깨뜨리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칼은 타자를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우리의 타성과 구조적 공모를 가르는 정의의 도구다. 곪아 터진 살점을 도려내듯, 교회의 상처를 찢고 드러내는 아픔 없이는 예수님이 선포한 참 평안에 이를 수 없다. 지금은 아프고 불편할지라도, 교회가 진정으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그 과정을 피해서는 안된다. 예수가 말한 평화는 침묵 속에 유지되는 질서가 아니다. 폭로와 고통을 통과해 도달하는 치유의 평화, 더 이상 감추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평화다.
4.
마태복음 10장 34-4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선언은, 언뜻 보기에 일반적인 평화의 메시지와 상충되는 듯 보인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본질과 신앙생활이 직면할 현실적인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진정한 평안과 감사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피상적인 외부적 평화가 아닌 내면의 변화와 진리를 위한 분리를 강조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1세기 유대 사회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와서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해방과 물질적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이러한 세속적인 기대와 다른, 아니 그 이상의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고 인간의 내면적 변화와 죄로부터의 구원을 강조하는 실천적이며 영적인 차원의 평화를 선언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주신 교훈을 담고 있다. 이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겪게 될 고난과 희생을 미리 알려주신 것으로 해석한다. 제자 파송은 선교 활동을 넘어 복음으로 인한 새로운 공동체 형성과 그에 따른 사회적 변화를 상징하며, 이는 때때로 가족 내에서도 실제적인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처럼 예수님의 메시지는 당시의 구태의연한 기득권 체제를 전복시키는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5.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실 때의 ‘평화’는 헬라어 ‘에이레네’를 사용한다. ‘에이레네’는 ‘갈등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단순하고 세속적인 평화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평안은 외부 환경의 조건과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통해 내면에서 누리는 평강을 의미한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반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모든 환경을 초월한 영원한 평안이다. 예수님은 물질적 풍요로 인한 안락함을 평안이라 여기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달리, 하나님 없는 평안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유로 가르치셨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랑,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고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서로의 가치관이 충돌하여 갈등을 야기할 수도 있다.
‘검’을 의미하는 헬라어 ‘마케이라’는 문자적인 무기가 아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복음이 가져오는 급진적인 변화, 그로 인한 가족간의 분열과 사회적 분열을 의미하는 메타포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검’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살리는 칼이다. 이 칼은 우리의 마음을 베어 내고, 세상을 향했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한다. 분열을 위한 분열이 아닌, 회복을 위한 결단으로 행하는 ‘마음의 할례’다. 이 ‘검’은 죄와 불의, 마귀의 사상에 저항하고 투쟁할 것을 요구하는 도구다. 잘 벼려진 예수님의 진리의 ‘검’을 소유했다고 자만하는 우리는, 우리 안의 썩어 문드러진 상처에는 무뎌지지 않았는가.
6.
이 말씀은 시대와 신학적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모든 사람과 화평하여 아무에게도 공격을 받지 않는 목사는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전쟁과 화목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본질적으로 외부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다. 장 칼뱅 역시 “복음 전파가 영혼 구원뿐 아니라 세상의 기득권과 충돌하는 개혁적 성격을 지녔다”고 보았다. 따라서 참된 평화는 세상적 화평과 다르고, 반드시 갈등과 불화를 수반한다. 오늘날에 와서 이 말씀은 복음이 세상과 본질적으로 충돌한다는 보수적인 해석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적 혁신의 관점에서 모순된 기득권을 깨뜨리는 혁명적 성격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해석한다.
분명히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의 가치관, 즉 성공과 부, 개인주의적 평안 등을 추구하는 흐름과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이 갈등은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원론적 무대 중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일까? 우리는 예수님의 ‘검’으로 세상과 타인이 아니라, 우리와 교회 내부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물질적 번영을 평안이라 부르고,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기독교적 가치’를 내세우는 행태,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예배를 쇼와 엔터테인먼트로 포장하며 성직자의 부패와 권력형 범죄를 은폐하는 현실. 이 모든 것이 ‘공동체의 평화’라는 명목 아래 가려진 거짓 평안은 아니었을까. 예수의 ‘검’이 바로 이 교회 안의 침묵과 외연의 장막을 가르려 하신 것 아닐까.
7.
주세페 베르디의 <레퀴엠>은 다른 어떤 진혼곡보다도 격렬한 슬픔과 진노의 색채를 띤다. 포레나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며 남은 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따스한 음악이었다면, 베르디의 곡은 그 영혼을 심판대 앞으로 끌어내듯 격렬한 긴장과 두려움을 자아낸다. 특히 작품 안에서 여러번 반복되는 ‘진노의 날’(Dies irae)은 거대한 팀파니와 금관의 폭발하는 음향과 합창의 절규로 시작해, 인간을 무너뜨리는 심판의 날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장례 미사곡이 죽은 자를 기리고 남은 자를 위로하는 음악이었다면, 이 곡은 살아 있는 이들이 자기 자신을 향해 지난 삶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심판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경고의 음악이다. “진노의 날, 바로 그 날, 환난과 비참의 날, 한없이 위대하고도 고통스러운 날”이라는 선언이 폭풍처럼 휘몰아칠 때, 듣는 이의 심장은 서늘해지고 뒷목은 뻣뻣해진다.
이 레퀴엠에서는 일반 미사통상문에 포함되는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 상투스, 베네딕투스, 아뉴스 데이 가운데 글로리아와 크레도가 생략되었다. 대신 장례미사의 고유문에 해당하는 ‘디에스 이레’(진노의 날)를 노래하는데, 하나의 세쿠엔티아(부속가)로 묶여 있는 이 ‘진노의 날’은 다시 아홉 개의 곡으로 세분화된다. 그 뒤에 이어지는 봉헌송 ‘도미네 예수 크리스테’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상투스’는 기쁨이 넘치는 밝은 색채를, ‘아뉴스 데이’는 안식을 기원하는 평안과 신성함을 띤다.
음악의 배경에는 베르디의 개인적인 상실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를 잃었고, 이후에도 존경하던 대문호 만초니의 죽음을 맞으며 삶의 허무를 깊이 경험했다. 그의 절망과 슬픔이 깃든 이 레퀴엠은 죽은 자의 안식을 기원하기 보다는 고통과 오열로 하나님께 구원을 갈망하는 절규에 가깝다. ‘진노의 날’이 심판의 공포가 폭발하듯 펼쳐졌다면, 그 뒤에는 ‘저를 구원하소서’(Libera me)라는 처절한 기도가 이어진다. 공포와 경고의 메시지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을 바라는 연약한 존재임을 반증하는 듯하다.
8.
마태복음의 “검”과 베르디의 “진노”가 공통적으로 일으키는 심상은 공포와 두려움이다. 말씀과 음악 모두 삶과 신앙의 여정에서 마주하는 갈등과 심판을 언급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진정한 평안과 감사의 의미를 탐구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예수께서 말하는 ‘검’은 타자를 해치는 무기가 아니라 우리안의 타성과 침묵, 공모를 가르는 의로운 도구이며, 베르디의 ‘진노의 날’ 역시 격렬한 두려움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새로운 평안과 안식을 맞이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은 후에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는 해석은, 신앙적 고난을 거친 후에 진정한 평안에 이르는 신앙인의 여정과도 유사하다.
결국 예수의 ‘검’과 베르디의 ‘진노의 날’은 같은 진실을 지적한다. 우리가 평화라고 부르는 것이 실은 회피와 은폐, 혹은 다수를 위한 안락의 침묵일 때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라는 것을. 참 평안은 갈등 없는 표면적 위안이 아니라 심판과 폭로와 눈물의 과정을 통과한 뒤에야 주어진다. 마태복음의 말씀과 베르디의 음악은 모두 우리 안의 어둠과 교회의 곪은 상처를 가차 없이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 아픔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치유와 구원의 가능성을 노래한다.
죽은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있어야만 새살이 돋아난다. 거짓 평화를 깨뜨릴 때 새 평화가 싹튼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은 이 준엄한 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대의’라는 명분 아래 덮어두었던 부패함, 권력과 재물을 좇는 탐욕, 교리와 제도를 맹목적으로 절대화하는 경직성, 약자와 피해자를 외면하는 무정함, 그리고 편안을 추구하며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태도. 이제는 경건의 외형만을 갖추고 일상의 거룩은 무시하는 자기중심성을 깨닫고, 우리 안의 안일한 평안을 직접 깨뜨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의 뜻과 어긋나는 모든 부도덕함 앞에서, 우리는 기꺼이 예수의 불편한 ‘검’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