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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쉑터 Jan 27. 2020

남산의 부장들, 명분과 실리 그리고 믿음


대한민국 정치와 역사 속에서 20세기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파란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1세기란 100년에서 조선이란 국가가 멸망하여 타국의 지배를 받고, 그 식민지 아래 설움을 받던 그 국가의 민족은 어느 순간 해방을 맞이하고, 얼마 후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비극을 맞이했다.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마을과 도로 그리고 같은 민족이란 역사적 동질감마저 파괴했다. 그리고 공화국이란 미명 아래 각종 사건과 사고가 터진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이던 대한민국은 오늘날에는 선진국 대열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군사정권, 독재정권에 대한 희비가 엇갈린다. 정책적 요소에서 자유주의 진영이라고 해도 실제 국가경제 시스템은 국가자본주의에 가까웠다. 정부가 대기업을 위주로 경제개발을 앞세우고, 그 아래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내세웠다. 기계에 의한 생산력보단 단순 기계에 노동인력을 이용한 공장들이 많았다. 그 유명한 전태일이 남긴 기록을 본다면, 당시 국민에 대한 인권은 국가권력에 의해 조롱당하고, 특히나 노동인권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경제를 살린 점에서 그가 세운 업적은 어느 인정할 수 있어도, 거기에 희생된 사람에 대한 예우는 처참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을 국민에게서 나오나, 그 국민을 강압적으로 납치하여 고문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큰 오점이다. 장점만 혹은 단점만을 강조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경제가 성장한 수준만큼 국민에게 조금 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권리를 나누어주고, 노동자에겐 조금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본권을 보장해주었다면 후대의 평가는 다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독재자란 칭호는 역사에서 지울 수가 없다.     



최근 국회에서 현 정부가 독재라고 했다. 과거의 독재는 좋은 독재고, 지금의 독재는 나쁜 독재라고 한다. 사람을 납치하여 때리고 죽이고, 그 가족까지 사찰하는 게 좋은 독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코미디가 따로 없을 것이다. 독재자란 영원할 수 없다. 독재자 자신도 인간이고, 그 독재자가 다른 독재자를 육성하여 다시 독재가 이어지지 않은 이상 쉽게 독재는 지속되기란 어렵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보여준 독재자의 죽음은 바로 그러한 이유이다. 독재자는 18년 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했다. 하지만 독재자 자신은 여전히 자신이 이 국가 위에 존재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것이 문제였다. 자신이 모든 존재 위에 있다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들에 대한 시선이 그만큼 바뀌기 때문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실제 역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소설을 다시 각색한 작품이다. 이름은 다른 식으로 바꾸어 제시했지만, 각각 맡은 배역에 대한 인물에 대한 은유성은 필요 없을 정도이다. 여기서 문제적 인간 중앙정보부 김부장의 행동이다. 왜 그는 자신이 그동안 모신 상관, 그리고 대통령에게 총을 겨누었을까? 영화에서 인간이 권력을 가지면 어떻게 변하는지 잘 보여준다.     


대통령 자신은 변화의 흐름을 모른다. 단지 주변이 변화했다고 여긴다. 김부장이 왜 그리 행동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대통령이 사단장일 때, 중앙정보부 김부장, 김부장 선임자인 박부장은 연대장급인 대령이었고, 경호실 곽실장은 김부장이 대령일 때 후임인 중령이었다. 다들 육군사관학교 선후배 관계였고, 같은 부대 선임과 후임이었다. 군대 기수보다 더 엄격하고 강력한 사관학교 출신자였으니, 선배기수의 명령이 곧 자신의 사명이었다.     


영화에서 군사혁명을 일으킨 그날을 회상한다. 한강대교를 넘어가는 그 시점에 다리 너머 방위대 병사들이 기관총을 발사했다. 직접 총알은 맞지 않으나 그 총알이 마치 옆에 스쳐가는 듯했다. 목숨을 걸고 한강대교를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 영화 속에 김부장은 패배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충성을 다해 사단장이었던 대통령을 보좌한다. 그런 그가 왜 총을 내밀었는가? 우리는 김부장 본인이 아니므로, 실제 그 느낌을 알 수 없다. 영화의 모티브가 되던 김재규 부장과 그 주변 사람들이 남긴 증언과 기록만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선 그런 김재규 부장의 심리를 현대적 감각으로 살린 작품이다. 영화는 파격적인 영상보다는 미장센적 요소에 많은 것을 의미한다. 화면 구도, 심리적 상태를 소품과 빗물까지 이용한다. 화면 구도 내에는 몽타주적인 요소도 있다. 어렵게 몽타주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영상편집으로 의미부여가 아니라 단어적 요소나 사물의 배치로서 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왜 김부장이 총을 쐈을까? 영화 시나리오에서 배경적 조건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이란 국가는 북한과의 긴장관계가 있으며,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란 강대국에 의한 외교적 갈등이 있었다.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미국 CIA가 대통령을 교체하기 위한 설이 말이다. 영화에서 그런 요소가 보인다. 미국에서 대통령은 2선까지 가능하지만, 한국에서 3선을 넘어 영구 독재까지 가능하게 하려 했다. 한국이 미국의 우방이고, 군사적으로 통제를 받는 국가라면,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정치권의 의중을 잘 따르지 않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미국 대사관은 미국 정치권과 CIA의 흐름을 김부장에게 끊임없이 전달한다. 소설과 영화적 발상일 수 있겠지만, 국민에 대한 독재정치를 청산하지 않으면 미국이 한국정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청와대가 도청당하고, 前 중앙정보부 박부장은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불리한 증언과 기록물을 남긴다. 김부장은 박부장의 동기이고, 김부장에 의해 박부장의 책은 회수해온다. 하지만 왜 박부장은 자신이 그동안 충성한 사람에게 배신의 칼날을 들이댄 것인가? 위에서 말하듯이 독재자가 통치하는 국가가 그 자신만의 세상인지 아니면 본인 자신만 아니라 그 이상의 독재정치의 연속성을 이어가는지가 관건이다. 중앙정보부장은 대한민국 권력 넘버2였다. 서열 2위가 바로 중앙정보부장이다. 막강한 권력,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국가조직상 대통령이 최고 수장이라면 다음은 국무총리이지만, 총리란 그저 행정업무만 맡은 관료에 불과했고, 사실상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정국을 지배한 셈이다. 독재자는 권력만 집착하는 게 아니다. 여자와 재물에도 큰 욕심을 부렸다. 박부장이 김부장에게 말한 것 중에 하나가 대통령의 비밀 비자금이 있는데, 이 돈을 중앙정보부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충성을 다해 모셨는데, 충성을 다한 자를 믿는 게 아니고, 제삼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독재자인 대통령은 부하를 믿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피곤한 상황을 부하에게 해결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모두 그 부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를 잡았으니 사냥개를 이제 필요 없다. 그러니 당연히 잡혀먹는 게 권력이란 순리였다. 영화에서 술자리가 자주 나온다. 대통령은 비싼 양주보단 막걸리에 사이다를 섞어 마시는 막사를 좋아했다. 김부장과 같이 술을 마시며, 일본어 “그때가 좋았다(その時期が良かった)”고 말하자 김부장 역시 “그때가 좋았습니다(その時期が良かったです).”라고 대답한다. 권력을 추구하던 사단장이던 대통령이 옛날이 좋았다는 점은 과거의 김부장은 좋았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막사를 나누던 모습에서 경호실 곽실장은 그렇지 않았다.     



비 오는 날 경호실장과 막사를 마시던 대통령은 김부장에 대해 심한 험담을 한다. 게다가 더 이상 필요 없으니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하는 발언을 한다. 문제는 이 대화를 옆에서 몰래 김부장이 도청하고 있었다. 비를 맞고 몰래 올라간 그의 머리를 빗물로 흠뻑 젖었고, 대통령이 자신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때 그의 안경 빗물이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비통해한다. 영화에서 김부장과 곽실장은 계속 충돌을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곽실장 편을 든다.     


김부장은 시대가 변했고, 게다가 미국의 개입을 확인한 상태에서 현재 상태로 정치를 이끌면 분명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 여겼다. 여기에 반해 곽실장은 시대의 변화는 필요 없고, 미국이 뭐라 하든지 현재 상황에 충실하면 된다고 여겼다. 도청사건을 두고 곽실장은 탱크를  청와대 앞으로 배치하게 하나, 김부장은 이것을 두고 크게 반발한다. 이 일로 청와대 주변에 사는 노인들이 크게 놀라 병환이 났다는 보고도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변하지 않는다. 김부장은 어떻게 해야 할까? 대통령을 위해 친구인 박부장을 살해하니, 대통령은 그를 두고 친구마저 죽이는 인간도살자로 취급한다.     


영화에서 김부장은 혁명을 무엇을 위해 일으켰고, 그 혁명에 왜 자신들이 동참했는지에 대해 묻는다. 박부장의 책에서도 대통령은 혁명을 시작한 자이나, 혁명을 망친 사람이라고 한다. 혁명이란 의미는 헤게모니의 전도이다. 어려운 말을 쉽게 풀이하면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 피지배자가 저항하여 그것을 전복하고 새롭게 정치적 권력을 쟁취하는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 군사혁명에서 혁명의 가치를 가난에 찌든 국가를 부유하게 해보자, 혹은 부패한 정치를 청렴하게 하자라고 하는 여러 가지 슬로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재자로 군림하여 스스로 부패하고, 민주주의 국가 주인이야 할 국민이 피지배계급으로 계속 억압한다면 김부장 스스로가 생각한 혁명이란 단어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박부장은 김부장에게 정치보단 작가에 어울린다고 했다. 힘으로 억압하기보단 문화적으로 사람들을 통치할 수 있을만한 사람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렇게 하기에는 어려웠다. 김부장이 처음 로비스트를 만나면서 그녀에게 가족 이야기를 한다. 협조적으로 대해주지 않으면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신변에 큰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이다. 국내 산업화가 발전하면서 대통령과 경호실장은 TV 이야기를 한다. 경호실장은 국내 기술력이 좋아졌으니 칼라TV가 나와 대통령의 모습을 제대로 국민에게 보여주는 게 좋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아직까지 흑백TV가 더 좋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칼라TV는 다양한 색으로 보여주므로, 다양한 사상과 가치관이 전파될 수 있으나, 흑백TV는 흑과 백이란 2가지로 구분된다. 즉 이분법적 가치관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자는 백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모조리 흑이 된다. 하얀색이 흑색이 들어오면 오염되기 때문에 제거한다. 이게 바로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부마항쟁이 계속 증폭되고, 국민은 반독재 운동으로 이어간다. 그런 시기에 대통령은 총으로써 국민을 지배하려 한다. 그리고 김부장은 초심과 변한 대통령에게 권총을 들이댄다.   

   

영화의 연장선이나 보안사령관은 그 모습을 잘 이해했다. 박대통령은 주변 사람을 제대로 믿지 못해 살해당했다면, 보안사령관은 그 반대로 주변 사람에게 잘해주었다. 국민에게 큰 독재자였으나, 적어도 주변 사람에게 독재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2사람의 차이점은 마지막 임기였다. 전자는 국민을 탱크로 밀어버리려 했다면, 후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이 있었지만, 역시 CIA의 개입이 있었다는 여러 가지 설도 있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우리나라 국가의 기밀정보도 접근이 어려운데, 타국의 기밀은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은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부장은 사냥을 마친 후 잡혀 먹힌 개라면, 김부장은 사냥을 마친 후 도리어 물어뜯긴 개라는 점이다.     



권력이란 거대한 신기루에 현혹되어 자신의 주변 사람을 믿지 않은 대가는 배신이다. 영화는 김재규란 인물을 김규평이란 인물로 재해석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늘 느끼는 바는 인간은 왜 배신하는가?라는 점이다. 첩보원이나 정보원들은 자신의 상관에게 철저히 충성한다. 실제로 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장 부하들은 각각 자신들의 상관에게 충성을 다 한다. 죽음의 길임을 알면서도 위험이 도사린 것도 알면서도 충성을 다 한다. 그들이 목숨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자신의 상관이 자신들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박부장에게 했던 말은 김부장에게도 하고, 곽실장에게도 했다. 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의 2인자 다툼으로 보였겠지만, 사실 대통령에겐 누가 먼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지 순번만 정해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자질 중에 가장 큰 실수는 국민을 믿으려 하지 않은 점이다. 야당 총수를 대화로 풀어나가지 못한 채 오히려 정치적 압박만 가했고, 국민들에겐 손을 내민 것이 아니라 총을 내밀었다. 만일 국민에게 손을 내밀고 야당 총수에게 대화로 해결하려 했다면 김부장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을까?      


역사란 만약이란 단어가 없다. 단지 역사적 사례를 통해 반성하여 깨닫고,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답이라고 알려준다.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한 것처럼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한다. 신군부 집권 이후 김규평으로 묘사된 김재규 부장은 경호실장과 알력 다툼, 거기에 대통령이 자신에게 대하는 행동에 대한 불만으로 인하 살인사건을 일으켰다고 재판에서 판결된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변론 겸 유언은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고, 오히려 재판 과정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형을 선고하기를 원했다.      



미디어에서 보인 그는 속이 좁아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인간이라면, 역사의 증언과 현재의 시각에서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스스로 희생한 인간으로 보인다. 남에게 그 어떤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스스로 살인이란 죄를 짊어진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든 타인을 살해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 하지만 살해된 자가 많은 사람을 살해한 사람이라면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미국이란 국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다시 생각했다. 군부독재나 쿠데타에서 CIA가 모를 리가 없고, 신군부가 정권을 잡을 때도 CIA의 묵인을 받았다. 하지만 독재정권이 지속되자 CIA가 압력을 가하고, 미국 하원에서도 큰 문제를 제기한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국이나, 그 우방은 역시 미국의 이익에 반대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독재정권이 미국 정부에 이익이 된다면 미국의 편이 되겠지만, 때에 따라 미국의 우방이기에 반인권적 행위는 미국이란 민주주의 국가 측근 동맹국으로 가지는 위상을 깎아내린다. 명분과 실리에서 그 실리가 국가 내 국민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 권력층에게 주는 것인지에 따라 명분의 가치가 변모된다. 김부장은 대통령에게 권총을 겨누며 이렇게 말한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결국 명분이 없는 정치는 대국적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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