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처음 방문을 잠근 날]

자존감, 효능감을 높이는 독서처방전

by 최희숙
표지(최종).jpg

<프롤로그>

몸도 마음도 기진맥진 해 있었다.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된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일주일에도 몇 차례씩 딸과 언성을 높였다. 나에 대한 원망과 애증이 뒤섞인 딸아이의 비수 같은 말들에 대책 없이 휘청대던 나약한 엄마였다. 그날도 그랬던 것 같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아이와 언성이 높아졌고 서로 독한 말들로 상처를 후벼 팠던 것 같다. 화가 났던 건지 억울했던 건지 아이를 남겨두고 쾅 하니 문을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방안에서 닫힌 문을 향해 뒤돌아 선 게 채 몇 초도 되지 않았는데 방금 전 문 밖에서 무슨 일 때문에 아이와 다퉜는지 서로 무슨 말들을 했던 건지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려 해도 마치 머릿속이 하얀 도화지가 된 것 마냥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시간의 기억이 공중에서 사라지듯 하얗게 비워졌다. 맙소사, 울음이 났다. 입을 틀어막고 꺼이꺼이 울었다. 감당할 수 없을 때 잠시 기절시켜 생명을 보호하듯 내 기억을 기절시켰구나. 내가 이렇게 유약하구나.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던 시간의 터널을 지나왔다. 동굴에 갇힌 게 아니라 터널을 지나는 것이었다. 엄마가 밉다고 울부짖던 중학생 아이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고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엄마는 내 엄마로 과분하다고, 이 날이 생일이어서 다소 과장된 면이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누구나 터널의 시간이 있지 않을까, 지금 터널을 지나고 있고 그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래도 그건 터널이라고 동굴이 아니라고 말 해주고 싶다.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책을 읽었다. 갈 곳이 없을 때 도서관에 갔다. 잘 살고 싶어서 나를 훼손시키지 않고 터널을 지나고 싶었다. 외로움이 몰아쳐서 누구라도 붙잡고 싶을 때,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내게 고독하라고 말했다. 고독 속에서만이 성장한다고 모든 중요한 일은 어려운 거라고 말해 주었다. 답을 몰라 헤맬 때는 잠시 그 생각을 서랍 속에 넣어두라고,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다는 건 그걸 해결할 능력이 지금은 내게 없다는 것이니 잠시 서랍 속에 그 문제를 넣어두라고 했다.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는 걸 잊지만 않고 있으면 언젠가 답이 찾아온다고. 그렇게 릴케는 나의 품위를 지켜주었다.

아이의 걸어 잠근 문이 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의 축적이 필요해서가 아니고 아이 마음의 정확한 지점을 제대로 들여다 볼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단숨에 또 누군가는 더 오랜 시간이, 더러는 닫힌 채로 살 수 있다. 그러나 미해결된 채 방치된 감정은 전 생애를 통해 삶의 발목을 잡기에 각자의 호흡 속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서적 방문이 열리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방문을 열기위해 방문 앞에 서 있지 말고 내가 커야한다는 것이다.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에서 아이와 시시비비 따지기보다 몇 걸음 물러나 오히려 자기 내면의 방문을 여는데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내가 채워져야 했다. 내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고, 없는 걸 주려고하니 지치고 거칠어졌다.

자녀를 키우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보였다. 부모가 되지 않았다면 굳이 건드려지지 않았을 치부가 생살로 낱낱이 드러났다. 아이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인줄 알 뻔 했다. 부끄러웠고 아팠지만 그래서 치유할 수 있었다. 드러나지 않는 것은 치료도 할 수 없으니 지금의 나로 키운 8할은 아이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키운 셈이다.

녹녹치 않았던 지난 시간들, 치열하고 힘겨웠던 그 시기에 인문학은 내게 실용서였다. 때론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의 답을 찾아야했고 때론 억울해서 위로가 필요했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격려를 받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지와 왜곡된 신념에 반격을 당하기 일쑤였다. 내가 틀렸다는 걸 알 때마다 오히려 통쾌했다. 문제가 보인다는 건 해결점도 보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의 무수한 책들은 내게 지원군이었고 책을 통해 내 인맥으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내게 조언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렇게 ‘나’를 보게 해주었고 ‘아이’의 마음을 보게 해 주었다.

내게 성장이란 지식의 덧붙여짐이라기보다 기존의 무지가 깨지는 과정이었다. 무지와 왜곡된 생각이 깨지는 만큼 성장했고, 성장은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는 선물을 주었다. 작가님, 집중해서 글 쓰기 좋은 새벽이네요.
이렇게 글자를 입력하고 드래그하면 메뉴를 더 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