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있는 책

-[아이가 처음 방문을 잠근 날] 중에서

by 최희숙

중학교를 다닐 시절 동네에는 가끔 트럭에 싣고 다니며 명작전집을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무지 많은 책을 아주 싼 가격에 주는 양 흥정을 하는 풍경을 종종 보곤 했다. 어느 날 집에 갔더니 한 벽장을 채우고도 남을 만한 명작전집이 도착 해 있었다. 고풍스런 갈색 책장에 딱딱한 하드지의 명작전집을 꽂아 두니 읽을 목적보단 전시용으로 꽤 있어보였다. 트럭 아저씨의 상술과 아버지의 지적 허염심의 결과물이 벽장을 가득 채웠다. 한동안 꺼내보지도 않던 책들에 손이 갔던 건 여름방학 때였다. 무더위에 축 늘어져 거실바닥에 누워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한량놀음을 하던 내 눈에 꽂히는 제목이 하나 있었다. <변신>. 작가 이름도 있어보였다. 카프카. 거기다 매우 짧았다. 호기심이 생겨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책을 읽은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읽고 나서 구역질이 났다. 벌레로 변한 주인공 때문이 아니라 벌레로 취급하는 가족들의 모습에 구토가 일었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성실한 회사원이다. 부모님의 생계와 여동생의 학비까지 준비해야 하는 책임감으로 열심히 돈을 번다. 그러던 잠자가 어느 날 커다란 벌레로 변한다. 기괴한 변신에 본인도 가족도 놀라지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기대를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벌레에서 변하지 않는 잠자가 가족들은 귀찮아지고 그가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어느 날 벌레가 된 잠자는 죽고 가족은 짐을 벗은 듯 소풍을 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레고르 잠자는 돈 버는 기능인으로 존재 했었다. 벌레로 변해서 경제적인 능력을 상실하자 가족에게 버림받는다. 그의 기능이 다 했기 때문이다.

샤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본질은 어떤 역할, 기능 등을 말한다. 선생님, 변호사, 의사, 회사원 등의 직업이 본질이 되는 것이다. 사물과 인간의 차이는 실존과 본질 중 무엇이 우선 하는가 이다.

사물의 경우 칼의 본질은 자르는 것이다. 본질이 먼저 있고 그리고 칼이라는 물건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사물은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인간의 경우는 의사가 되려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태어난다. 실존이 먼저이다. 그리고 어떤 역할, 기능을 할지는 부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레고르에게는 돈 버는 기능이 우선했다. 가족에게 그는 돈 버는 기능인으로서만 필요했다. 사물화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벌레로 변했다고 해서 기이할 것이 못된다. 변하기 전부터 이미 돈버는 벌레였으니까.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에게 실존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학생이었을 때 읽었던 <변신>을 어른이 되어서 중학생 아이들과 수업을 한다. 아이들에겐 이 책이 어떻게 다가올까? 아이들에게 실존주의는 그들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변신>을 읽은 사춘기 남학생은 자기에게 아버지는 실존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아버지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을 만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주시는 학비와 용돈을 당연하게 받고 있는 자신은, 아버지를 그레고르 잠자처럼 대했던 것이구나 생각하며 가슴 아팠다고 한다. 말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 자신을 성찰해 보는 것, 아버지의 실존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으로 카프카의 <변신>은 그 남학생에게 ‘관계있는 책’이 된 것이다.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가 되려고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다 ‘아버지’라는 이름표 떼고, 남자라는 이름표도 떼고, 직위도 떼고, 남편이라는 역할도 떼고 이것저것 다 떼고도 남는 것. 그것이 ooo 일 것이다.

-김광규-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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