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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그인 벨지움' 에세이 (제 최애 영화를 소개합니다..)

18/ June / 2022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모든 것과의 일체감’.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되 완전한 연결’.



   누군가 나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고민 없이 할 대답들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이것의 대상이 누구인지,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느낌인지는 상상만 할 뿐이지 사실은 잘 모른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일 뿐이지 신이 아니니까. 이 외에도 나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들이 내 안에 수많이 존재하는데, 예전에는 이 모순들을 스스로에게 납득을 시켜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양면성’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 모습들이 어쩌면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모순’이라고 이름 짓기로 했다.


내가 아무리 가운데에서 중재를 해도, 그 모순들은 서로 갈등하며 부딪히고 싸웠다. 싸우는 동안에 각자의 몸으로부터 작은 조각들이 깨져서 내 앞에 떨어지는데, 신기하게도 그 조각들은 거울의 모양을 하곤 했다. 그 조각들을 붙잡을 때면 ‘진짜 나’를 찾은 것만 같은 착각에, 희미한 내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는 환상에 빠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조각들은 날카로워도 그 속에 비친 나와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속에 비친 얼굴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면 마치 나를 외계인을 보듯 대했다. 그래서인지 위로와 위안, 공감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가장 멀게 느껴지는 단어들이다. 가장 따뜻한 이 단어들은 마치 그 조각들이 나의 살을 파고드는 듯한 아픔으로, 때로는 식어버린 찻잔과 같은 무심함으로, 또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허황된 꿈처럼 느껴졌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는 가식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위로와 위안, 그리고 공감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평소에도 유태오 배우님을 좋아했던 터라, DMZ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개봉을 한다는 소식에 바로 예매를 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실패했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일반 극장 개봉 소식에 바로 GV 예매를 했다. 솔직히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이 영화가 나에게 이만큼 의미 있는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먹먹한 가슴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갑작스러운 팬데믹 속에서 고립된 배우 태오는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영화의 내용을 로그라인으로 정리하자면 이 정도가 될 수 있겠다. 벨지움에서의 촬영 도중에 코로나가 터지고, 스태프들과 동료 배우들은 모두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고 태오만이 낯선 땅에 홀로 남겨진다. 하지만 뜻밖의 고립 속에서 태오는 2년 반 동안의 바쁜 일상으로 로그인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 ‘태오’ (상상의 인물인 태오를 ‘태오’로 부르겠다)가 태오를 인터뷰하면서 고립된 지 얼마나 지났는지 묻는다. 태오가 11일 정도라고 대답을 하자 ‘태오’는 콜타임이 없어서 현장에서 고립된 날들과 근 2년 반 동안의 시간들도 포함해야 한다며 정정해준다. 그러자 태오는 보통이라면 이 쉼이 반가웠을 텐데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외롭다고 고백하면서 –



“I just want to express myself.”

(나는 그냥 나를 표현하고 싶어).


“Just pain. Because I don’t feel authentic. I just want to be authentic.”

(그냥 고통스러워. 왜냐하면 내가 진짜처럼 안 느껴져. 난 그냥 진짜처럼 느끼고 싶단 말이야).



-라는 말들을 남긴다. 태오는 물리적인 고립으로부터의 외로움을 떠나, 근 2년 반 동안 바쁘게 살아오며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못하여 자신으로부터 고립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물리적인 고립 속에서 자신의 진짜 외로움을 마주 보게 된 것이다.



        다음 날, ‘태오’가 사라지고 태오는 다시 팬데믹 속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운동을 가기 전 태오는 ‘태오’가 다시 돌아올 것을 내심 기대하며 문 밖에 방울토마토와 바나나를 남긴다. 돌아온 태오는 깨끗한 접시를 보며 ‘태오’를 찾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태오는 다시 혼자만의 일상을 이어 나간다. 그렇게 야심 차게 준비한 저녁을 즐기던 중 ‘태오’가 나타나 독일어로 말을 건다. 이번엔 그림자의 모습으로, 과거의 모습으로.  



“몸은 어때?”



이 간단한 말속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태오 배우님이 독일에 있을 적에 농구선수가 꿈이셨다고 한다. 하지만 무릎 십자 인대가 다쳐서 그 꿈을 포기해야 했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고 하셨다. 태오가 ‘태오’에게 자신의 과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봐서는, ‘태오’가 과거의 태오에게 이제는 괜찮아졌는지 묻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과거의 상처들 (무릎인대 파열 외에도 GV 때 배우님께서 독일인으로써 한국에서 받았던 오해와 독일에서 받았던 상처들이 트라우마로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잠깐 하셨다) 속에서 태오를 위로해주고 지켜줬던 ‘멜랑콜리’와 영화들을 상기시켜준다. 그러면서 산책을 하고 싶다는 태오에게 ‘태오’는 자신이 있기에 더 이상 혼자 산책을 해도 약하지 않다는 용기를 건네준다. 그렇게 태오는 ‘태오’의 모습으로 (다음 장면에서 태오가 자다 깬 모습을 등장하는 것을 봐서는 ‘태오’와 함께 보다는 ‘태오’의 모습으로 인 것 같다) 시내에서 자유롭게 춤을 춘다.



        산책을 다녀온 후, ‘태오’는 태오에게 만두를 만들어준다. 하지만 만두를 만들어줄 뿐, 함께 식사는 하지 않는다. 자신과의 갑작스러운 만남으로 과식을 한 태오는 체한 채 침대에 눕는다. 그러자 어김없이 다시 등장하는 ‘태오’, 이번엔 한국어로 태오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 묻는다. ‘태오’는 체한 태오의 손을 따주듯 ‘Beam drop Inhotim’을 연상케 하며 펜을 떨어뜨려 태오를 깨운다.



“근데 왜 갑자기 한국말이야?”

“뭐 그래도 최선을 다 해봐야지.”


“나 옛날에 한국 영화를 봤을 때, 말은 못 알아듣고 내용은 자막으로 보고… 그런데 소리는 꼭 시를 읊는 기분이 들더라고. 그래서 말은 못 알아들어도 감수성은 통하더라.”

“영화는 나에게 감수성이 통하는 가상의 세계야.”


“근데 내가 더 이상 꿈을 안 꾼다?”



영화는 태오에게 감수성이 통하는 세계였고 그래서 배우를 꿈꿨지만, 배우로서 꿈을 이룬 태오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 GV에서 배우님께서 한국에 오면서 받은 많은 오해들이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고 언급하셨다.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감수성이 통했던 한국의 영화를 보며 배우의 꿈을 꾸었지만, 막상 배우가 되기 위해 한국에 와서는 언어와 문화 차이를 이겨내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들을 잘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홀로 남겨져 서야 과거가 자신을 체하게 했고, 꿈을 이뤄서는 그 꿈으로 인해 체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꿈을 꾸기 위해, 예전의 꿈을 회상하며 태오는 손을 따 자신의 피를 비눗방울로 만들어 자유롭게 풀어준다. 그리고 생긴 태오의 새로운 꿈.



“두려움 없이 사는 거? 우리가 앞으로 잘 살 수 있겠지?”



‘태오’와 함께 공존하는 것.




           한국으로 돌아온 태오는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온다. 가족들과의 만남, 친구들과의 만남, 촬영 등등.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벨지움에서 만났던 ‘태오’를 그리워한다. 홀로 남겨지면 다시 나타날까 해서 혼자 산도 타보지만, ‘태오’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여기 있는데, 나는 지금인데.. 너는.. 누구니?”



자신이 쌓아 올린 돌탑을 무너뜨리는 태오. 어쩌면 자신이 ‘진짜 나’라고 쌓아 왔던 것들을 무너뜨리는 장면일 수도 있겠다. 그 후의 장면들은 다시 배우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가는 태오의 모습들이 나열된다. 하지만 앞의 시퀀스와는 달리 태오가 바라보는 자기 자신이 아닌 대중들이 바라보는 ‘배우 유태오’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배우로서 평생 잊지 못할 밤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는 신인상을 받으며 태오는 다시 홀로 남겨진다.


           홀로 남겨진 대기실에서는 ‘태오’의 흔적이 보인다. 검은 모자와 안경, 그리고 유진한을 연기했을 때 사용했던 반지들(GV 때 알게 된 정보이다. 아마도 배우님은 유진한이 가장 가깝게 느껴진 배역인 듯하다). 태오가 큰 기대 없이 대기실을 떠나려 하자, 드디어 ‘태오’가 거울 속에서 나타난다.




“So it’s neither a privilege nor is it a luxury. It’s a necessity, films are a necessity.”

(그래서 그건 특권도 분에 넘치는 것도 아니야. 그건 필요한 거야, 영화는 필요한 거야).


“There are many yous that inside of you that will come out in certain times of need. Whenever you feel weak or lonely or … fearful, there’s someone inside of you that will take care of you. Just like myself, just trust me.”

(가끔 필요할 때마다 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거든. 약해지거나 외롭거나 두려워질 때, 네 안에 누군가가 너를 지켜줄 거야. 나처럼. 나를 믿어봐).



이렇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태오’는 자신의 물건들을 태오에게 남기고 완전히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제 태오와 ‘태오’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그렇게 하나가 된 태오와 ‘태오’는 길과 도시, 그리고 하늘을 자유롭게 누빈다.



        


   

영화에서 태오가 언급하는 몇 가지의 키워드들이 있다.



‘멜랑콜리, 영화, 감수성, 자유’.



이 영화를 통해 되찾고 꿈꾸고 싶었던 것들인 듯하다. 태오는 영화가 자신에게 감수성이 통하는 가상의 세계라고 말했다. 독일과 한국이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찾은 자신만의 감수성 – 진짜 자신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과 다시 연결되고 싶어 이 영화를 만들었고, ‘태오’를 불러낸 것이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그리고 ‘태오’를 통해서 자신의 멜랑콜리를 되찾고, 과거와 미래, 독일과 한국, 사람들이 바라보는 배우 유태오와 자신이 바라보는 태오 – 수많은 태오들을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임에서 오는 자유를 꿈꿨던 것 같다.


           다른 영화와 다르게 <로그인 벨지움>은 분석적으로 다가가기 어려웠다. 태오가 말한 ‘감수성이 통하는 가상의 세계’처럼 치밀하게 무언가 쌓아 올리지 않아도 태오가 느끼고 있는 것들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독특했던 점은 인물이 사용하는 3개국에 곁들이 상징성이다. 사실 이걸 GV 때 정말 물어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되지 못해서 나만의 해석을 적어본다. 태오에게 독일어는 자신의 그림자, 지금도 외면하고 싶은 과거를 상징한다. 그리고 ‘태오’를 통해 태오는 과거의 자신과 마주 볼 용기를 얻는다. 한국어는 태오에게 꿈과 미래를 상징한다. 하지만 그의 꿈이 이미 현재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그는 꿈을 꾸지 않고, ‘태오’를 만나며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마지막 영어는 태오에게 그 모든 시간과 자아들을 연결해주는 연결고리 그리고 과정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유태오 배우님이 연기를 처음 배우기 위해서 영국과 미국으로 유학을 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배우가 된 후에도 그는 여러 문화권의 나라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영어라는 언어 덕분에 그는 다양한 나라의 작품에 참여를 하고 있으며, 점점 성장해 나가며 미래의 태오에게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영화 속 언어에 대한 해석들을 생각하며 묘한 씁쓸함에 빠졌다. 나도 미국에서 자란 한국인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정체성에 대한 의문들이 많았다. 미국에서 난 한국인이었고, 막상 한국에 오니 난 미국인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한국인 혹은 미국인으로 부르는데, 나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지? 25살이 된 현재의 시점에서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그냥 ‘인’이라고 답을 내렸지만, 태오의 고민들을 보며 아직 완전히 답을 내린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영어는 내가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던 것들의 상징이다. 한국어는 내가 되고 싶지 않지만 되어야만 했던 것들의 상징이다. 언어의 장벽을 느껴보지 못할 정도로 – 어쩌면 이중 언어자로써 특권을 누리고 있겠지만, 내가 사용하는 언어들 속에 정작 나는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도구로서의 언어는 사용하지만, 정작 나의 언어는 없는 것이다. 태오에게 그만의 언어는 영화였던 것일까?


           이런 생각들을 하니, ‘태오’의 마지막 대사에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과거의 내가 그리고 언젠가는 만나게 될 미래의 내가 지금의 혜윤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영화 중간에 태오가 자신의 친구들 (천우희 배우님과 이제훈 배우님)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자 그들은 그 음악을 영화에 넣으라고 권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태오는 부끄러운지-



“그건 다른 정체성이야.”



-라는 말을 하고, 이에 태오의 친구 제훈은-



“다른 정체성이 어딨어? 다 형인 거지.”



-라는 말을 남긴다. 제훈이 남긴 이 말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싶다. 각자 존재한다고 믿었던 정체성들이 사실은 모두 하나의 태오에서 나왔다는 것. 언제쯤 되어야 나도 내 안의 수많은 모순의 조각들이 하나의 모습으로 화합될 수 있을까?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나야 그 조각들이 하나의 거울로 나를 비출 수 있을까? 이 영화 덕분에 평생 답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질문에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위로, 위안 그리고 공감. 나에게는 가장 멀었던 단어들이 조금은 가깝게 느껴졌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수 있구나, 사람을 통해 받는 위로가 나쁘진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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