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깍이 독일 교환학생
우리나라에서 죽음은 매우 슬프다. 국민 한명한명의 목숨은 소중하고, 따라서 안전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호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좁은 영토와 높은 인구 밀집도라는 특성상 국가는 국민생명에 위험이 되는 사고를 원천 방지하는게 용이하고 실제로 다양한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다.
위 사진은 2021년 이맘때쯤 제주도의 성산일출봉에 갔을때의 사진이다. 우리나라의 산이나 언덕, 특히 관광객이 많고 유명한 곳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안전 시스템을 갖춰 놓은 경우가 많다. 바닥은 걷기 좋게 만들어 놓고, 손잡이를 설치하고, 중간 중간 쉴수 있는 벤치같은 휴게 공간을 만들어 둔다. 이러한 시설들은 노약자들도 쉽게 멋진 자연경관을 구경할 수 있게 하고 혹시모를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위의 사진들은 이번 여행에서 다녀왔던 자연지형들이다. 더블린의 호스의 트래킹 코스는 난이도 별로 Green line, Blue line, Red line, Purple line 총 네개가 있었는데 모든 난이도의 트래킹 코스는 저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지나야 했다. 저 절벽위의 길은 마주보는 사람이 오면 겨우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수 있을 정도의 폭이였어서 잘못 헛디디거나 옆사람이 툭 밀면 그냥 떨어져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밑의 아서스 시트는 에딘버러를 가면 꼭 가야하는 관광지 중 하나였다. 멀리서 보는 아서스시트는 제주도의 성산일출봉과 비슷해 보였다. 그만큼 관광객도 성산일출봉 못지 않게 많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안전장치 같은것은 찾아볼수 없었고 정상 근처에서 발을 헛디디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보였다. 특히 최정상은 돌산으로 위험해 보였음에도 별로 관리가 돼있지 않았다. 세번째 사진은 펜틀랜드 국립공원으로 상대적으로 관광객은 찾지 않는 곳이였는데 이 역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였다.
물론 자연경관을 자연 그대로 두면서 그 자연을 정말 있는 그대로 탐험하는 느낌은 받을 수 있고 자연경관 보존에도 유리할 것이다. 그래서 정말 다치지만 않는다면 여행자로서, 관리자로서 얻는 효용은 아마 더 클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건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노약자는 그 안전장치의 부재로 관광의 기회조차 놓치는 것인데 이대로 방치하는게 맞을까. 우리나라였으면 사고가 일어나면 영조물 관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가배상청구소송을 하겠지? 그러면 그 배상 비용보다 사고 방지를 위한 비용지출이 더 적다는 판단으로 결국 안전장치를 모두 설치하지 않을까? 아니 이런 위험한 관광지를 방치하는 정부는 뭘 하는거지??
이에 대해선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죽음'에 대한 시각의 온도차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어쩌면 서양은 우리나라보다 죽음을 덜 무서워하는게 아닐까? 죽음을 덜 무서워하기 때문에 안전을 이유로 국가가 사람들의 자연경관 향유의 자유를 제한하고 국가의 자원을 소모하면서까지 안전장치를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닐까?
영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벤치들에서 위 사진과 같은 문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추측컨대, 죽은이들을 기리기 위해 관계자의 허가를 받아 사비로 벤치를 만들고 적고싶은 글귀를 적어넣고 설치해 그들을 애도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니까 죽음이라는 것이 훨씬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죽음은 슬프다. 특히 내 주변사람들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슬픈 죽음을 마냥 두려워하지 않고 일상생활 속으로 끌어옴으로서 죽음의 슬픔에 더 의연하게 대처하고 죽은 사람을 더 잘 기릴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아이가 어릴때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면, 많은 아이들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이, 우리나라에서 혐오시설이 되어버린 납골당을 부모님 손에 이끌려 가게 된다. 이와 더불어 아이 입장에서 재미 없는 제사나 성묘와 같은 일련의 절차들을 거쳐야 할수도 있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아이의 일상과 오히려 멀어지게 된다. 물론 아이가 다 커서 그런 절차들의 의미를 모두 이해하게 된다면 그 이후로는 다르게 전개될수도 있지만 어렸을때부터 느꼈던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엄숙함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반면 저런 벤치는 공원에서 아이가 편히 쉬고 놀면서도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애착을 형성할 수 있다. 아이에게 죽음이란 그렇게 무섭고 엄숙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조기교육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벤치에 앉는 사람들도 그 지역에 살았던 이들의 숨결을 느끼고 역사의 연속성 하에서 내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벤치가 단순히 잠깐 앉아서 쉬는 공간을 넘어서 여러가지 의미를 가질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굳이 정부가 개입해서 시장의 파레토 효율을 방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벤치를 만든 사람, 벤치에서 쉬는 사람, 공공시설 관리자 모두에게 득이 될 수 있다.
위 사진들은 생태도시 프라이부르크의 공원묘지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들어가면서 우리는 우리나라 묘지에서 느끼는 엄숙함이나 불편함은 느끼기 어려웠다. 이것이 공원인지 묘지인지 가끔은 분간이 안될때도 있었다. 묘지들은 모두 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있었고, 포근하고 따뜻했다. 이런 공원묘지에 시신이 안치된다면 언제든지 아이들이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러 놀러 올 수 있을 것 같았고, 직장인이 퇴근후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께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해서 동양과 서양이 접근하는 방식은 역사적으로도 달랐다. 이 두가지 방식 중에 그당시 어느 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차이의 원인에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유교와 카톨릭의 차이, 국토 면적의 차이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원인이 주요한지를 떠나 죽음을 보다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우리 사회에 좀 더 필요해 보인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빽빽한 아파트, 빌딩 속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다 죽는다. 그리고 죽고 나서는 동네 주민들의 혐오적 시선 속, 동네 외곽에 격리된 납골당 단칸방에서 꼬박꼬박 관리비를 내며 지내게 된다. 납골당이 아닌 다른 죽은자에 대한 대우 역시 친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죽음을 친숙하게 품어줄 수 있을때 죽어서 만큼은 더 쾌적한 공간에서 가족들, 후손들, 동네 주민들의 따스한 시선 속에서 지낼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죽은이들에게 관대해 진다면 각박한 한국의 경쟁 사회 속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좀 더 관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인간이 사는 한살이(유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고, 나이를 먹고는 세상을 떠나는)의 이미지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직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받아들일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뿐 아니라 스핑크스의 저주도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짜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신화의 힘(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