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9월 23일 수정 >
초등학생 때 나는 미국에서 학교생활을 했다.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 표정이 가장 밝았던 시기였다. 그때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해리 포터가 유행했는데, 나도 친구들을 따라서 해리 포터 전권을 사서 읽었다. 소설의 분량이 긴 만큼 친구들 사이에서는 누가 먼저 다 읽나 경쟁도 붙었다. 800 페이지가 넘는 5권(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2주 만에 다 읽었을 때는 너무 뿌듯해서 어딜 가든 자랑하고 다녔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특목고 입시를 위해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라는 책 딱 한 권만 읽었다. 그 책은 중학생이 이해하기에 버거운 내용이어서 독서에 흥미를 붙일 계기가 되지는 못했다. 작가들이라 함은 한글을 읽힐 무렵 책부터 잡고 손에서 안 놓고, 10대 때 이미 출판사에 투고를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그것과 거리가 멀다. 존경하는 작가인 아니 에르노는 초등학생 무렵부터 책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귀를 기울이면>의 주인공 시즈쿠는 중학생의 어린 나이에 글쓰기에 매진하여 첫 장편소설을 완성한다.
내가 독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살의 대학 생활 경험이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한참 동안 그곳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주변 학생의 모든 행동들이 가식 같아 보였고, 어느 감정 표현도 그것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때 내가 읽은 책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고, 그 책은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힘을 길러주었다. 그 뒤로도 많은 책을 읽었고, 그 책들이 이 브런치북에서 소개될 것이다. 돌이켜보니 내가 그때 가식 같다고 느낀 것들은, 내 주변 어딜 가든 있는 것이며,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영어학원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며, 아이들이 저마다 서로의 영어 실력을 칭찬하는 동시에 상대방을 경계하는 걸 보았다. 나는 누굴 칭찬하기가 두려워졌다. 한 명을 칭찬하면 그에게 그것은 전리품이 되고, 남은 다른 학생들은 자존심 상할까 봐서였다. 어쩌면 우리가 가식이라고 느끼는 것은, 경쟁 시스템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경험하고 학습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불혹이 넘은 어른들에게서도 보인다. 그런 세상에 불평불만을 제기할 생각은 없다. 때로 나도 잘난 상대방을 시기질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날까 봐 먼저 떠날 준비를 해보기도 했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 같지 않아서 다른 부모와 내 부모를 비교하기도 했으니까. 나도 그들과 정확하게 똑같은 사람이다.
책은 이런 것들로부터의 자생과 치유를 제공한다. 읽을수록 남들로부터 나를 분리시킬 수 있고, 스스로의 좁은 그릇을 반성할 거울이 되며, 해보지 않은 것들을 도전해 볼 용기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자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준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본인을 계속해서 괴롭힌다면, 이 브런치북에서 소개되는 책들을 비롯해 다양한 책들을 읽어보기 바란다. 나는 때로, 누구도 용서해주지 못한 내 모습을, 소설 속의 화자가 용서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잘못은 반성과 개선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려면 스스로를 용서해 주는 용기도 필요하다.
나에게는 앞서 언급한 에르노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재능은 없다. 글을 통해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다던가, 불안과 우울증이 사실은 별 거 아니라면서 토닥여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대신 그들의 말과 생각을 빌려,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응원을 제공해주고 싶다. 이 브런치북을 통틀어 나는 내 글의 작가라기보다, 그들의 독자라는 시점을 유지할 것이다. 당신과 나는 책들을 함께 읽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본인이 선호하는 책은 직접 찾아서 읽어보고, 그러다가 또 다른 독서의 뿌리를 심으면 된다. 돌이켜보니 대학생활로 방황할 당시에는 소설이, 군대에서 힘들 때에는 에세이가, 그리고 제대 후 알바를 구하느라 전전긍긍할 때에는 돈 관련된 자기 계발서들이 도움을 줬던 것 같다. 좋고 나쁜 책은 없다. 시기에 따라 그 책이 본인에게 도움이 더 될 수도, 덜 될 수도 있을 뿐이다. 부디 그 점을 명심하고, 어떤 책은 별로라며 황급히 다음 장으로 넘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