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힘에 부치는 순간, 인간적 맹자가 전하는 위로

by 카인말러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가면'이라는 뜻의 연극 용어다. 연극에서 배우가 단순히 인물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둘러싼 주변 환경, 성격, 감정 전체를 짐작하여, 진짜로 배우가 그 인물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요즘은 페르소나라는 말의 뜻이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배우들이 연기 연습을 할 때 사용하는 소위 '전문 용어'였지만, 요즘은 '인격'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한창 연극부에서 연기를 연습하던 시절,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술자리를 가면 늘 하던 건배사가 있었다. "인생은 연극! 세상은 무대! 우리는 배우!" 그래서 페르소나라는 단어의 뜻이 바뀌었나 보다. 인생 자체가 연극이고 세상은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갖는 것은 요즘 시대에 필요한 강점인 것 같다.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유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철두철미하고 강직한 사람이 될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책 중에도 그런 책이 있다. 힘들 때는 나를 위로해주는 '에세이'가 되기도 하고, 열심히 살아갈 방법을 강구할 때는 '자기계발서'가 되기도 하는, 마치 가면 같은 책. 「맹자」가 나에게 그런 책이다. 힘에 부치는 순간이면 한 번씩 꺼내서 내 상황과 엮어 읽는다. 「맹자」는 자기계발서이기 전에 '자기수양서'이다. 수양이라는 말은 사뭇 다르다. 자기계발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나의 언행이나 습관들을 고치는 데에 국한되지만, 수양은 '인품(人品)'에 관련된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감정과 깊은 내면까지 치유하는 힘이 있다. 어떻게 하면 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외적으로 유하면서도 내적으로는 강직한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맹자」를 꺼내 읽는다.


(오늘 이 글 속 「맹자」는 모두 홍성욱 박사님이 쓰신 뜻풀이를 따랐다. 맹자의 사단이나 사덕 같은 개념도 현대의 우리가 더 공감하기 쉽게 풀이해놓으셨기 때문이다)




바라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生亦我所慾이언마는, 所慾이 有甚於生者라, 故로 不爲苟得也라. 死亦我所惡이언마는, 所惡가 有甚於死者라, 故로 患有所不辟也니라.

사는 것이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바라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까닭에 구차스럽게 살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죽는 것도 또한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미워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욱 심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환난을 피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 고자(상)


12살 터울의 사촌 동생이 나에게 물었다.

“오빠, 왜 비행기가 지나가는 곳에는 구름이 생겨”

“그건 비행운이라는 거야.”

“그렇구나, 비행운은 왜 생기는 거야?”


사실 한평생 문과로 살아왔으니 비행운이 생기는 원리는 설명해줄 수 없었다. 그래서 대충 내 상상을 곁들여 답했다.


“그건, 누구나 자기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거야. 마치 옛날에 우리 OO 동에 떡볶이집 갔을 때, 벽에다가 우리 이름 적어놓고 나왔지? 그것처럼 비행기도 자기가 지나간 길에 흔적을 남겨놓는 거야.”


사촌 동생은 슬슬 모든 이야기에 “왜?”를 달고 나오는 나이가 됐다. 호기심이 많을 나이이기도 하지만, 때론 저런 습관이 나중에 저 아이한테 큰 힘이 되리라 생각했다.


나는 “왜?”라는 질문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생의 예시처럼 “왜”는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반면 “왜”는 삶 자체를 바라볼 때도 유용한 틀이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때도, “왜 사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전제되어 있어야만 어떻게 살 것인지 설계가 가능해진다. 마치 군인들이 어두운 밤에는 야간투시경을 챙겨 밖을 보듯이, 우리는 “왜”라는 안경을 껴야만 비로소 칠흑같이 막막한 삶도 명쾌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맹자의 “바라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라는 표현은 독자를 절로 반성하게 한다. 내가 진정 삶 그 자체보다,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었나?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보통 어머니들은, 자식 잘되는 것 보는 게 본인의 삶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어머니도 늘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종종 그것은 나의 인생이지, 그녀의 인생이 아니기에 죄송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


우리는 때로 살면서 여러 가치관을 주입 받고, 특정한 덕목을 강요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른 말씀은 무조건 따라야 해”라는 유교적 가치관도 그렇다. 이러한 위계 질서가 확대되어 갑질과 같은 사회 문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물론 중요하고 지켜야 할 가치들도 충분히 있다. 예컨대 겸손, 경청, 성실 등은 모두 중요한 가치이고 덕목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단 한가지 가치를 꼽으라면 결국 “폼생폼사”, 인생을 내 뜻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결국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일을 찾는 것, 혹은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망을 갖는 것이 모든 가치의 첫 단추가 아닐까 싶다. 설령 나중에 그런 꿈들이 변할지라도.


왜 사는가?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스스로만이 답할 수 있다.




꿈을 이룬 사람보다 꿈을 꾸는 사람이 아름답다



必有事焉而勿正하여, 心勿忘하며, 勿助長也하여, 無若宋人然이라.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은 반드시 늘 노력해야 하는 것이니 자신이 노력하는 데 대하여 그것이 갑자기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 것이며, 그렇다고 하여 마음으로 잊어서도 안 되며, 일찍 효과를 거두기 위해 조장하지 말아서 송나라사람이 한 것 같이 하지 말아라.

「맹자」 - 공손추(상)


한 송나라 사람이 자기 밭의 싹이 잘 자라지 않자, 그 싹이 커 보이게끔 살짝 들어 올렸다. 아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놀라 급하게 밭으로 나가 봤는데, 싹들이 다 말라 죽어 있었다. 맹자는 이 이야기를 들어 무슨 일이든 한순간에 이루어지기를, 급하게 성취하기를 바라지 말라고 조언한다.


'글쓰기'를 떠올려보니 맹자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글쓰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대학교 자기소개서였다. 그때 같은 반 친구들끼리 선생님께 첨삭도 받기 전에 서로 초고를 공유해가며 "너 진짜 잘 썼다" 칭찬하며 읽었다. 나도 나름 내 글이 마음에 들었다. 고등학교 3년의 공부 과정이 하나의 스토리 라인으로 이어져 나의 성장이 잘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첨삭을 받기 위해 담임 선생님 교무실 책상 위에 자기소개서를 올려두고 나는 바람 좀 쐬자며 친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한창 학교 앞 상가에서 군것질하다가 전화가 걸려왔다.


"우용아, 자소서 읽어봤어."

"아 네, 선생님."

"그런데 내가 읽다가, 너무 형편 없어서 더 못 읽겠더라."

"..."

"선배들 자소서 선생님 책상에 올려놓을테니까 이따가 와서 챙겨 가. 한 번 읽어보고 다시 써보자."

"넵, 알겠습니다."


덤덤하게 전화는 받았지만, 속으로는 실망감이 내 뒤를 찔렀다. 잘 쓰지는 못했더라도 형편없는 수준인가 싶어 속상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글쓰기가 싫어지지는 않았다. 노트북을 켜고 워드에 글자들을 채워갈 때면 가장 자유롭다고 느꼈다. 지금도 내 글쓰기가 그렇게 잘 쓰는 편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래도 근 2년 동안 가장 많이 좋아진 게 '글쓰기 실력'이다.


수학이나 영어는 대학에 들어와서도 시험의 대상이 됐고 매번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밤을 새워가며 공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렇지 않았다. 시험을 보는 과목도 아니었기 때문에 벼락치기 하듯이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언젠가는 잘 쓰게 되리라'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쓰다 보니 조금은 늘었다. 이제는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 종종 대학 선배들이나 동기들한테도 연락을 받는다. "글 잘 썼더라. 나도 요즘 글 쓰려고 하는데, 어떻게 쓰는 게 좋아?" 이런 연락을 받으면 고맙고 뿌듯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과분하다고 느낀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꿈을 이룬 사람보다 멋있는 게 꿈을 꾸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순간 이루어지는 꿈은 좋은 꿈이 아니다. 성공이나 명성을 이뤄낸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그 중 꿈을 이룬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별다를 존경심을 느낄 수 없었다. 앞으로 이 사람에게 펼쳐질 인생도 굉장한 것들이 있겠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꿈을 꾸는 사람은, 그것이 조금 허무맹랑해 보일지라도, 멋있다고 느꼈다. 특히 TV에서 인류의 화성 착륙을 꿈꾸는 엘론 머스크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가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지금이라는 한 가운데 포개져 마주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순간 이루어지는 꿈보다 좋은 게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꿈이고, 그런 꿈은 송나라 사람처럼 급한 마음을 먹었다간 오히려 더 멀어지기 마련이다.




힘이 들 때는 말을 줄이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孟子曰 愛人不親이어든, 反其仁하고, 治人不治어든, 反其知하고, 禮人不答이어든, 反其敬이니라.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을 사랑하는데 남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 경우에는 자신의 어진 태도에 대하여 문제가 없는지를 돌이켜보고, 남을 다스리는데 잘 다스려지지 아니하면 자기의 지혜로움에 대하여 반성할 것이며, 남에게 예의 있게 대하였으나 그에 대한 답례가 없으면 자기의 공경함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맹자」 - 이루(상)


「맹자」 이루 편의 저 문장이 지금의 내 성격을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 바람직한 삶에 대해 내 의견을 피력하기 급급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과 충돌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런 과정에서 겸손치 못한 발언, 남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들을 한 적이 많다.


"왜 내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더 강하게 주장하고, 더 정확하게 지적해야겠다"라는 생각은 은연중에 사람의 머릿속에 침투하기 쉽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럴 때는 정작 나 자신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는지 생각해보는 쪽이 좋다. 요즘 내가 지키는 습관 중 하나는 절대로 남이 말을 하는 중에는 맞장구가 아닌 이상 내 입을 열지 않는 것이다. 남에게 친절하게 조언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도리어 그 사람에게는 친절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을 경우가 많다. "진짜 친절"은 내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내 귀를 열어주는 데에 있다.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아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세상 사를 향해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귀를 여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해야 나중에 내가 이야기를 해도 상대가 더 귀담아듣는 것 같다.


나도 힘에 부칠 때가 있다. 그러나 세상 만사를 바꿀 힘도 내 안에 있다. 힘들 땐 말하고 행동하기를 쉬어가도 좋다. 어차피 그럴 때야말로 우리 내면이 가장 강해지는 시간이다. 힘에 부치는 순간들에 좌절하지 말자. 스스로 가진 힘을 믿고, 무엇보다 때를 기다렸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에는 글자가 너무 많아, 여백이 존재할 공간을 주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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