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데미안은 방황하는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방황하는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기를... 방황하더라도 힘들어 하지 않기를."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도 할 수가 없는 일이기에, 나는 대신 글로 남겨 독자들에게 같은 말을 전하고 싶다.
이 글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서평 겸 에세이다. 「데미안」은 정말 힘든 시기에 나를 도와준 책이다. 20살 겨울이었는데, 나는 그때 진로 문제로 무척 힘들어했다.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이 없었고, 살아야 할 구체적인 이유가 피부로 느껴지지 않았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딱 한 문장 때문에 이 책에 반했다. 그때는 막스 데미안이라는 청년이 굉장히 어른처럼 느껴졌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에게 방향성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두번째 읽은 데미안은 동생처럼 느껴졌다. 괜히 한 줄씩 읽을 때마다 힘들었던 과거의 나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줄거리만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 소설은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그의 절친 막스 데미안을 떠올리며 쓴 회고록이다. 싱클레어는 여러모로 남들과 다른 인간이다. 기독교적 교리, 공동체적 질서보다는 스스로 원칙을 만들어 살아가려는 주체적 인간이다. 그러나 에밀은 주체적 인간이기 때문에 미운 오리 새끼였다. 부모님도, 그의 두 누나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에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에밀을 유일하게 이해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친구가 등장한다. 그가 에밀이 듣는 수업에 들어온다. 그가 데미안이다.
그 시절의 나는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였다. 우리 집의 정돈된 평화 가운데서 나는 겁먹고 고통받으며 유령처럼 지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할 수도 없었고, 잠깐이라도 내 자신을 잊고 지내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자주 화를 내며 이유를 물었지만, 나는 차갑게 마음을 닫았다.
- 헤르만 헤세 지음, 「데미안」, 37쪽
「데미안」은 시적인 비유가 많은 소설이다. 이 글은 그런 것들에 대한 나의 감상과 의견일 뿐, 작가인 헤르만 헤세의 의견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힘들었을 때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 쓰려 한다.
주인공 에밀은 초등학교에서 데미안을 만난다. 독일의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김나지움(Gymnasium, 11-19세의 9년제 중등 교육기관)에 입학한다. 에밀은 김나지움 입학 후, 학교가 다른 데미안과 자연스레 멀어지고, 기숙학교에서 고된 사춘기를 겪지만, 한순간도 데미안을 잊은 적이 없다. 간절히 바라면 뭐든 이루어진다고, 김나지움을 졸업할 즈음 그는 여행에서 데미안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데미안의 집에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난다. 에밀에게 이 시기는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렇게 행복한 꿈속을 살고 있을 때, 에바 부인이 에밀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자신의 꿈을 발견해야 해요. 그러면 길은 한층 쉬워지죠.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꿈이란 없어요. 계속 새로운 꿈으로 교체되지요. 그러니 어떤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돼요.”
- 헤르만 헤세 지음, 「데미안」, 194-195쪽
영원히 계속되는 꿈이란 없다... 이 말이 왜 그렇게 와닿았을까. 저 한마디에 이 책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되었다. 나는 꿈이 바뀌는 게 무서웠다. 꿈이 바뀌면 그동안 공부해온 것들은 다 뭐가 되는 건지 싶었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고등학교 3년을 ‘경제’라는 과목을 정말 좋아해서 항상 그쪽으로 진로를 준비했다. 대학도 경제학과로 입학했지만, 막상 입학하니 경제에 싫증이 났다. 앞선 글(“작가이기에 아직 부족한 나의 이야기”)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미 대학 전공도 결정 났는데 이제 와서 다른 진로를 꿈꾸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미웠다.
나를 자기 비애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준 게 저 구절이다. 꿈이 바뀌는 게 무섭고, 피하고 싶은 나에게 에바 부인은 꿈이 바뀌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꿈이 바뀐 나 자신을 미워할 필요도, 자책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건 당연한 현상이니까. 무엇에 ‘매진’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매진하면 한순간 한순간을 즐길 수 있다. 꼭 잘할 필요도 없다. 그냥 좋아하는 만큼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집착을 하면, 성과에도 목을 매게 되고, 꿈이 변해도 새로운 꿈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경제학에 관심이 없어진 이후,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가장 관심이 가던 영화와 연극에 ‘매진’했다. 이리저리 책도 찾아보고, 흔히 ‘영화’마니아라고 하면 다 아는 히치콕이나 고다르의 흑백 영화를 보며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물론 그 꿈도 바뀌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만큼의 충격은 없었다. 애초에 영화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꿈이 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뒤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방황에 준비가 되어있기를, 오늘이고 내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 바뀌어도 주저하지 않고 도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금은 경제학을 공부하여 빈곤국의 아이들, 특히 교육의 혜택과 기회가 적게 돌아가는 아이들을 돕는 게 꿈이지만, 언제고 이 꿈이 새로운 꿈으로 바뀌어도 당황하지 않는 나 자신이 되려 노력한다.
데미안을 안 읽어본 사람도 한 번쯤 들어본 데미안의 명대사가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대중매체에서는 이 구절까지 인용하고 그 다음 내용을 생략한다. 나는 오히려 그 다음 문장이 더 와닿았고, 방황하는 이들, 특히 나 같은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헬레니즘 시대에 신화나 종교처럼 받아들여진 신이다. “아브라카다브라”라는 주문의 어원이 되는 신이기도 한데, 에밀은 학교 수업에서 아브락사스가 어떤 신인지 배운다. 작가인 헤르만 헤세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종교 이야기를 하려고 아브락사스를 꺼내온 것은 아니다. 그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서재에서 꺼내는 작은 사유(思惟)다.
“아브락사스는 훨씬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단 이 이름을 신성과 악마성을 결합하는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신적 존재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 헤르만 헤세 지음, 「데미안」, 125쪽
에밀은 한동안 이 “아브락사스”라는 신에 빠진다. 신성과 악마성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는데, 나는 신성이라는 단어는 익숙하지만 악마성이라는 단어는 왠지 낯설다.
‘신성’은 이웃을 사랑하라, 부모님을 공경하라, 간음하지 말라 등등 기독교 십계명에 나오는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악마성’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정의를 해야 하는지 갑갑하다. 악마성이 신성과 반대되는 개념이고, 범죄를 저지르라는 식의 반인륜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럴듯 하지만 주인공 에밀의 생각은 다르다. 에밀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올바른’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악마성은, ‘스스로 판단하기’라는 뜻이다. 올바름이 무엇인지,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공동체에 의해 강요되는 '신성'과 달리, '악마성'은 주체적인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월든」과 「시민 불복종」이라는 저서를 남긴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깨어있는 시민”으로 기억되는 시인이자 작가이다. 1846년 미국은 서부를 개척하기 위해 멕시코와 전쟁을 펼치고, 루이지애나 주에 살던 원주민들을 몽땅 내쫓는다. 소로는 미국 시민으로서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었지만, 전쟁이 터지자 인두세를 납부하지 않았다. 폭력성으로 무장한 미국 정부에 반기를 든 것이다. 소로는 올바름의 기준을 공동체에 의해 강요되는 '법'으로 삼지 않고, 자기 스스로 기준을 세웠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는 감옥에도 투옥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온갖 욕을 먹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우리는 그를 “깨어있는 시민”이자 “주체적 인간”으로 기억한다.
인생에 크고 작은 모험, 기준은 자기가 정해야 한다. 때로 그 기준은 남들과 대화하면서 세우게 될 수도 있고, 홀로 사색하다가 깨달을 수도 있다. 내 꿈과 원칙을 정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당연한 소리를 몇 문장씩 했다. 헤르만 헤세도 이 당연한 말을 장장 200페이지 가깝게 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만큼 그렇게 사는 게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체로서의 삶은 힘들고 어렵다. 그러나 매 순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 그 노력 자체가 빛이 나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추구하는 대로 살았나? 이렇게 매일 밤 물어보는 사람은 소로만큼이나 충분히 멋진 사람이고, 나는 그렇게 행동하는 모든 사람이 존경스럽다고 느낀다.
모두가 똑같은 협곡, 저 깊은 심연에서 내던져진 주사위들이어도,
저마다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날아가려고 치열하게 노력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서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