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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인말러 Mar 20. 2021

천국으로 솟은 나무는
그 뿌리를 지옥에 두어야 한다.

<인종실록>을 읽고 느낀 점

    최근 며칠 나는 한국사 공부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한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이 된 것은 정말 잘된 일이다. 그러나 역사 교육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 교육 자체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한편, 그것이 우리의 삶과 연관되어 교육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박영규 작가의「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나는 학교 다닐 적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많이 느꼈다. 이 시대 역사의 주인공이 왕이었다면,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왕들의 모습과 내 모습을 비교하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인종실록>을 펼쳐 읽다가 글감을 얻어 노트북을 열었다. 세종이나 정조처럼 훌륭한 성군으로 평가되는 인물도 아니고, 연산군 같은 폭군도 아닌, 조선 역대 왕 중 치세가 가장 짧았던 - 인종의 치세는 1544년 11월부터 1545년 7월의 총 9개월이다 - 인종에서 나는 무슨 글감을 얻었을까.




    인종을 소개하기에 앞서 나는 어느 책에서 발견한 칼 융(Carl Jung)의 다음과 같은 명문을 언급하고 싶다.


No tree can grow to Heaven, unless its roots reach down to Hell.

천국으로 가장 높이 솟은 나무는 반드시 그 뿌리를 지옥에 두어야 한다.
- 칼 융 -


    천국으로 가장 높이 솟은 나무는 반드시 그 뿌리를 지옥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가장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악을 꿰뚫는 통찰력을 밑바탕으로 두어야 한다. 만약 악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면, 그 존재는 천국으로 뻗기 전에 시들어 죽을 것이다. 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과 맞서 싸워야 하며, 악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악을 알아야 한다. 가장 선한 자는 그 자신도 악을 내포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볼드모트의 영혼 일부가 주인공 해리 안에 있다는 것도 같은 아이디어에서 착안한 것이 아닐까. 반대로 구약성경에서 신이 가장 아끼는 존재였던 아벨이 형제 카인에게 살해당한 것은 아벨이 악에 대해 전혀 무지했기 때문 아닐까. 성경에서 선악과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저주로 묘사되었으나, 그것은 결국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종(재위 1544-1555)은 효와 예, 그리고 성리학적 이상을 자신의 삶과 정치 모두에 반영하려 했다. 아니, 자신의 삶 전체를 효와 예로써만 채웠다. 세자 시절에는 옷을 화려하게 입은 궁녀들을 모두 내쫓는 등 금욕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고 하며, 그의 계모인 문정왕후가 그를 지독히도 미워했으나, 그는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 그러나 그는 계모 문정왕후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비록 야사이지만, 31살 그의 요절의 배후에는 문정왕후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인종이 그렇게 빨리 죽은 것은 문정왕후 윤씨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한다. 인종은 계모이긴 하지만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인 문정왕후에게 효도를 다하기 위해 극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윤씨는 항상 인종을 원수 대하듯 했고, 문안 인사차 들른 인종에게 자신과 아들 경원대군(훗날의 명종)을 언제쯤 죽일 것이냐고 말할 정도로 막말을 해댔다고 한다. 그러나 인종은 그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효성이 부족함을 개탕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며 지냈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 심지어는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식을 두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박영규 지음,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245쪽



    「고려왕조실록」을 포함해 박영규 작가의 실록 시리즈를 읽으며 "역사란 승자에 의해 쓰이는 것이다"라는 말이 소름 돋을 정도로 와닿았다. 한순간의 실수로 죽음을 면치 못해 더 나은 세상을 펼치지 못한 이들이 내 뒤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방원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해 재상 중심 정치를 펼치지 못한 정도전, 수양대군(세조)에게 살해당한 김종서 등 고르지 못한 숨결이 글자 위로 떠올랐다. 인종의 죽음에 인종의 탓이 있다면 무지 아니었을까. 지극한 효심만이 가득했던 그의 능호는 '효릉'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지만, 아마 그의 죽음을 본 사람 중 그의 효심이 어리석지 않았다고 믿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인종이 문안 인사차 대비전을 찾아갔는데, 그날 따라 문정왕후는 평소와 다르게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인종을 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에게 떡을 대접했다. 인종은 난생 처음 계모가 자신을 반기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 아무 의심 없이 그 떡을 먹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인종은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얼마 못 가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박영규 지음,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245쪽



    인종이 죽은 뒤 문정왕후는 완전히 조정을 손에 움켜쥐게 된다.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이 왕좌에 올랐으나, 명종은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법이 없었고, 조정은 완전히 외척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애초에 이 역사에는 '인종 vs 문정왕후'라고 할만한 구석이 없었다. 인종은 이 역사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주인공이려면 악을 꿰뚫고 그 악과 맞서 싸워야 할 법인데, 인종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조선의 성군들을 보면서도 같은 원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종은 어떻게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을까. 세종이라는 '뿌리 깊은 나무'의 뿌리는 세종의 외척들을 모두 죽인 태종 이방원이었다. 그는 보위를 세종에게 넘겨준 이후에도 4년 동안 태상왕으로 물러앉아 군사권을 장악하며 왕권 강화에 힘썼다. 조선 후기의 성군이자 수원 화성의 설계자 정조는 어릴 적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다 치르기도 전에 상복을 벗고 효장세자(영조의 맏아들, 사도세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른 나이로 요절했다)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정조의 배경에는 단순히 충과 효, 인과 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닌, 어두웠던 성장기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도리어 그것은 정조의 힘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의 왕 중에는 극악무도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권력을 독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왕도 있고, 지극히 선했으나 힘을 기르지 못했던 왕들도 있다. 조선의 신하 중에는 밝고 명랑한 비전을 가진 조광조와 같은 신하도 있었으나 그는 정치를 이해하지 못했고, 반대로 정치를 완벽히 이해하고 통찰했으나 비전이 없었던 신숙주와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결국 역사의 주인공으로 기록됨이란 악을 꿰뚫어 보는 능력과 선한 비전을 모두 갖춰야 하는 어려운 작업인 것이다.


천국으로 가장 높이 솟은 나무는 반드시 그 뿌리를 지옥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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